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63화 (16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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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카시안의 슬픈 운명

카리오스가 한 말은 카시안에겐 그야말로 사형선고였다. 어떻게 빛의숲에서 살아갈 수 없는 엘프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었음에도 카시안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며 빛의숲을 빠져나가가고 있었다.

“내가 뱀파이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200여 년 동안 이곳에서만 자라온 카시안이었기에 지금의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벅 저벅.

한참을 걷던 중, 카시안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척이란 너무도 미세한 수준이었기에 그는 상대가 엘븐 스나이퍼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누구지? 설마…….’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시안은 제발 그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빌며 몸을 돌려 자신을 뒤따라오는 엘프를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에레인…….”

카시안은 절망했다. 한때는 우정과 사랑을 함께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만난 것이다.

“하프 뱀파이어가 됬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정말 할말이 없다. 내가 이 꼴이 될 줄이야…….”

카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에레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엘프들은 다 비웃음을 보내겠지만 그녀만은 아니었다. 슬픔과 애처로움만이 얼굴을 잠식하고 있었다.

“잘 알고 있겠지? 빛의숲의 규율대로라면 오염된 엘프는 이곳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래. 너도 어쩔 수 없겠지.”

카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가 어찌 엘프족 전체의 규율을 막을 수 있겠는가. 백번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카시안은 이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것하나만은 알아둬.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이야.”

“사랑? 풋, 가당찮은 소리 작작 하시지 그래? 한낱 공명심 때문에 종족을 버린 주제에…….”

“?!”푹!

놀랄 틈도 없었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 화살 한발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엘븐 스나이퍼 에레인의 손끝에서 나간 것이었다.

“어, 어째서…….”

“몰라서 물어? 너는 더 이상 엘프가 아니야. 우리의 철천지원수, 뱀파이어일 뿐이야. 숲 속에 들어온 숙적에게 사정을 봐줄 엘프는 아무도 없어!”

“…….”

순간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카시안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좌우로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곤 고개를 흔들며 지금의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네가, 네가 그럴 리가 없어!”

“이제 그만 죽어주는 게 어때?”

차가운 어조로 한 마디 한 에레인이 스틸레토를 뽑아 들었다. 카시안은 극도의 암담함에 멍하니 빛을 뿜는 그녀의 백색 검신을 바라보았다.

에레인과 함께 대장장이가 만드는 것을 구경하다가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장난을 하다 팔을 베여 며칠 동안 고생했던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녀와의 수많은 추억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이 바로 저 검이었다.

이제 그 검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부르르르

카시안은 자신의 스틸레토를 떨리는 손으로 가져가 보았다. 분명 왼팔에는 화살이 꽂혀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의 오른손잡이고 스틸레토는 한손검이다. 궁술에선 좀 밀리지만, 카시안은 에레인과 검술로 싸워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한 대련이 아니었다. 카시안은 에레인을 죽일 의지 아니, 아예 싸울 의지조차 없었다.

“젠장!”

카시안은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엘븐 스나이퍼들 중에서 가장 느린 자신이, 뛰어난 저격술의 소유자인 에레인을 상대로 도망치려 하다니?

하지만 카시안으로선 그것만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핑!

또 한발의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시안은 심장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달릴 뿐이었다.

푹!

얼마나 뛰었을까? 카시안은 등 뒤로 온 몸이 난자될 것만 같은 고통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아픈지 조그만 신음성조차 뱉어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한 모양인지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쓰러지진 않았다.

“하악, 하악!”

미친 듯이 빛의숲을 빠져나가는 카시안의 두 눈에선 샘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만 싶었다.

“하아…….”얼마나 한참을 뛰었을까? 산발적으로 날아오던 화살이 어느 샌가 날아오지 않자 여유가 생긴 카시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에레인이 보이지 않았다. 몰래 숨어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시안 또한 명색이 엘븐 스나이퍼. 그녀의 기척쯤은 감지해낼 수 있었다.

“추격을 포기한건가?”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는 몸뚱이에 박힌 화살부터 빼는 게 먼저였다. 지금 그가 뛰어온 풀밭은 지속적인 출혈로 떨어진 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으으윽.”

카시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등과 어깨에 박힌 화살 두발을 힘겹게 뽑아내었다. 그리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두 손으로 막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욱히 뿜어져 나오는 피냄새는 스스로 맡아봐도 코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숲밖으로 당장 뛰쳐나가야 엘븐 스나이퍼들에 의해 죽을 확률을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는 길이었지만, 카시안은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어쩌면 죽는 게 편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느끼는 정신적인 고통이란 그로선 도저히 감당해내기 힘들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운명은 카시안을 빛의숲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빽빽이 우거진 숲 사이를 빠져나온 카시안의 눈앞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서 우리의 일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네 녀석은 애초에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거냐?”

“크크큭, 뭐 그렇다고 해두지.”자신의 운명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 지온이 광소를 하며 다가왔다.

“어떠냐. 동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대한 소감이?”

“너라는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고 싶을 정도다.”

바닥에 주저앉은 카시안이 증오 어린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놈이 없었다면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죽었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지금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으니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에게 협조할 의사는 없는가보군.”“잘 아는군.”

비록 동족에게서 추방당한 몸이었지만, 카시안은 박쥐가 될 생각이 없었다. 눈앞의 철천지원수와 한패가 되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넌 죽을 수밖에 없다. 혹시 마음속으로 뭔가가 끓어오르지 않나? 정신은 그대로고 몸만 바뀌었을 뿐인데, 고결한 척하며 수백 년을 함께 해왔던 동료를 가볍게 내치는 저 더러운 족속들에 대한 무언가가 말이다.”

음침하게 웃던 지온이 넌지시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자 카시안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분명 현혹술 같은 게 아니었다. 진심이 깃들어 있는 평범한 한 마디였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서서히 어둠의 일면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고결한 척하면서 평생을 같이 해온 동족을 추방한 위선자들.’

엘프들에 대해 정의내릴 말을 오래전부터 찾고 있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뱀파이어로부터 해답을 얻었다.

카시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출혈로 인해 온몸이 어지러웠지만 하고 싶은 말 한 마디가 그의 의식을 조종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과 손을 잡으면, 저 더러운 위선자들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분노의 눈빛은 빛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카시안에겐 선택사항이 한정되어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물론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죽기전에는 분명 가능할 것이다. 크크크크.”

“그럼 최대한 힘을 써보도록 하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엘프들을 죽이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카시안에게선 엘프에 대한 정과 소속감이 깡그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부상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증오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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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연참 들어갑니다.

정말 완결하기 쉬운게 아니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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