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66화 (16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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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운명, 그리고 만남

[저긴가 보군.]

카스턴의 말에 목걸이를 품속에 넣은 스탐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오두막이 있었는데, 그 주위를 일단의 엘프 전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두막 안에는 1:1로 협정을 맺을 것이니, 당신만 들어오도록 하시오.”

스탐의 앞으로 다가온 엘븐 스나이퍼의 마스터, 카리오스가 나직이 말했다.

“웃기는군. 이거 너무 뻔히 보이는 짓거리 아닌가?”

스탐은 코웃음을 치며 엘프들의 얄팍한 수를 비난했다.

엘프들은 숲 자체가 집이었다. 나무로 만든 집이 있긴 있으되, 대부분은 나무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종족들이다. 굳이 협정장소를 저 허름한 오두막에서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없다면 되돌아가든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카리오스가 그렇게 내뱉었다. 자신들의 계략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과 휴전 협정을 맺어야 된다니.’

스탐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화가 솟구쳤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 갈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들어가자니, 사자의 입 안인 것을 알면서 들이미는 기분이 들었다.

‘뭐, 놈들이 얼마나 재롱을 잘 부리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아마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바로 나와서 헬팬텀을 타고 도망치면 제아무리 엘븐 스나이퍼라도 하이 배틀러인 자신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휴전 협정은 반드시 맺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협정을 맺으러 온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했다면? 입장이 아주 난처해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협정 사절을 보낸다면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극의 원수라도 효율적인 외교는 필수였다.

하지만 오두막에 들어서는 순간, 스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하얗게 잊혀지고 있었다.

“세리아?”

“스탐…….”

놀랍게도 오두막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엘프는 세리아였다. 그녀는 미리 다 알고 있다는 듯, 처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한참을 당혹스러워하던 스탐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카리오스, 이 교활한 놈!’

5년 전 검성으로부터 세리아를 구출해 도망칠 때, 카리오스는 둘 간의 관계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덫으로 던져 놨겠지. 함께 죽으라고. 자신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놈일 테니, 세리아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피피핑!

“뭐, 뭐야!”

“이놈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벌써부터 사슬 퍼런 화살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작정을 하긴 한 모양인가보다.

“넌 어쩔 거지?”

스탐이 냉랭한 어조로 세리아를 쏘아붙였다. 만약 자신이 손을 쓰지 않는다면 그녀는 구석에 숨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다.

“날 죽이고 방패로 내세워.”

“뭐라고?”

깜짝 놀란 스탐이 검을 뽑아드는 그녀를 보며 정색을 했다. 지금 이 엘프는 삶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엘프족 최강의 전사 카리오스도 고개를 저을 자신에게 칼을 들이미는 건가!

하지만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세리아의 두 눈동자 깊숙이 투영되어 보이는 슬픔의 빛을. 스탐은 금세 내막을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카리오스놈! 끝까지 세리아를 이용하다니…….’

문밖에서는 이미 호위병들의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당백의 실력을 자랑하는 그들도 엘븐 스나이퍼들을 대동한 엘프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사실 스탐도 그들이 시간을 버는 틈을 타 헬 팬텀을 타고 도망칠 생각이었건만, 이제는 글러버렸다.

문을 여는 순간 고슴도치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낡은 오두막 안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곳곳에 뚫려 있는 구멍들은 마치 자신을 죽이기 위해 직접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핑.

스탐은 구멍 안으로 날아 들어온 화살 하나를 재빨리 받아 처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신호탄에 불과했는지, 곧이어 수십 발의 화살이 오두막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물러서!”

세리아를 밀쳐낸 스탐이 다크 오러를 끌어올려 쏟아져 오는 화살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화살은 몸으로 때우고, 오러 애로우만 집중적으로 막아내니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하지만 스탐 개인이 뿜어내는 다크 오러에는 한계가 있었고, 엘븐 스나이퍼들은 많았다. 카이사르가 구해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전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검 좀 치워!”

스탐은 한참 화살들을 막아내는 와중에서도 검을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검을 놓지 않고 있었다.

‘죽여야 하는 건가?’

스탐이 한숨을 쉬었다. 고도로 발달된 뱀파이어의 감각이 눈앞에 있는 엘프의 목숨을 취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약간이나마 갈등이 되었다.

하늘 아래 같이 설 수 없는 종족이라곤 하나, 자신의 마음 한곳에 자리하는 그녀의 위치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뱀파이어로서의 고독한 생애 중에서 진정으로 웃어본 적이 있을 적은 세리아와 함께 있을 때밖에 없었다.

푹!

“으윽!”

하지만, 어깨에 화살이 한발 박히자, 스탐의 본능은 이성을 잠식해버렸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가장 신경 쓰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세리아였다.

“어서 날 죽여.”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 세리아는 검을 쥔 채 목을 내밀었다. 꼬옥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스탐은 어쩔 수 없이 쏟아져 오는 화살을 막으며 세리아에게 손을 뻗어왔다.

그때였다.

쒜에에엑!

“위험해!”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낡은 오두막 구멍 사이로 들어온 화살 한발이 세리아를 향했던 것이었다.

우습게도, 스탐은 그것을 본 순간 죽이려는 생각 대신 살리려는 생각이 들었다.

털썩!

세리아를 안은 스탐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비를 모르는 엘프들의 화살이 언제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릴지 모르니 말이다.

“으응?”

일어서려던 스탐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곳은 바로 세리아의 목 아래였다. 그녀는 목걸이가 하나 매여 있었는데, 그것의 모양이 유난히 낯익었다.

‘설마…….’

스탐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넘어질 때 세리아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목걸이를 밖으로 흘린 상태였다. 그런데…,

자신의 목걸이와 세리아의 목걸이의 모양이 똑같았다.

“그 목걸이는…!?”세리아도 스탐의 목걸이를 보고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태극 모양의 목걸이.

그것은 색깔만 다를 뿐 분명 똑같은 모양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

“너는!”

점점 커지던 스탐의 눈이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똑같이 놀라워하는 세리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스탐은 깨달았다.

“세현이……?”

“설마…, 민이야?”

서로 동시에 내뱉는 한 마디. 이것으로 두 남녀는 서로가 누군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아아…….’

최악의 순간이었지만 스탐의 머리는 이제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로서, 뱀파이어로 환생한 스탐은 무려 200여년 만에 자신이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자. 세리아, 아니 세현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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