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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운명, 그리고 만남
“카리오스님!”
그때, 한 엘프 전사가 급하게 뛰어왔다. 카리오스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 자신을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뱀파이어 측에서 종전협정을 제의해왔습니다.”“미친 소리는 작작 해라고 해.”
카리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들을 조롱하는 걸까? 분명 뱀파이어들은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엘프 전사의 한 마디에, 카리오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카이사르라는 적의 부사령관이 직접 사절로 온다고 합니다. 협정장소는 아까 휴전협정을 맺으려 했던 장소입니다.”
“그래? 일단은 가봐야겠군.”
분명 휴전협정도 자신들이 깨뜨린 마당에 웬 종전협정을 들이미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카리오스로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혹시나 싶어 엘븐 스나이퍼들을 대동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흐음, 정말인가보군.”협정장소에 금방 도착한 카리오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뱀파이어들이 단 세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매복에 대해선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엘븐 스나이퍼들이 지척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감지하지 못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걱정 마시지. 우린 간사한 너희 엘프처럼 협정을 빌미로 암살을 시도하진 않으니까.”
옷차림으로 보아 적의 부사령관으로 보이는 뱀파이어의 비꼼에 잠시나마 카리오스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정말 종전 협정을 할 생각이오?”
“물론. 하지만 평등한 협정을 벌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카이사르가 비릿한 미소로 말했다. 그러자 카리오스의 인상이 순간 일그러졌지만 곧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거짓이 아닌 진정한 종전 협정이라면 뭐든지 줄 수 있소.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야.”
“그 무리한 요구에도 기준이 있겠지. 이제부터 천천히 그것을 바로잡아 나가봅시다.”
임시로 마련된 나무탁자 위에 서류를 올린 카이사르가 카리오스에게 펜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카리오스가 서류에 시선을 주는 순간, 그의 이마가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아, 우리의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협정서는 우리의 문자로 써야 되는 게 옳을 것 같더군.”
능글맞게 말하는 카이사르의 한 마디가 그렇게 약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뱀파이어의 글과 말을 아는 엘프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카리오스는 당연히 엘프어로 협정서를 작성할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의 뱀파이어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쳐버렸다.
이렇게 되면 카리오스는 자기 스스로 쓸 수가 없다. 무조건 카이사르가 쓰고 읽어주게 되는 것이다.
페이스가 완전히 넘어갔다고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카리오스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으로선 종전 협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엘프족이 뱀파이어들에게 거의 지배받을 정도의 일방적인 협정서가 만들어 지는 것을 최대한 막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무관하게도, 카리오스는 시종일관 카이사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 대충은 완성된 것 같군. 읽어주지. 앞으로 빛의숲은 캄에덴과의 종전협정을 맺는 대가로, 해마다 일정량의 공물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협정은 깨진다. 공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곧이어 카이사르의 입에서 단어가 하나씩 튀어나올 때마다 카리오스는 치미는 분노를 삭히기 바빴다. 갖가지 목재를 비롯해, 엄청난 양의 철과 금, 은, 그리고 미스릴…. 빛의숲에서 난다는 것은 모두 거론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양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는데, 뱀파이어의 문자를 모르는 이상 얼마나 축소시켰는지 알 길이 없어 카리오스로선 답답할 뿐이었다.
“공물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고, 이제 볼모로 삼을 엘프와 뱀파이어들을 불러주지.”
“설마 엘븐 스나이퍼들을 볼모로 삼을 생각은…?”“잘 아는군.”
“이런 엉터리 협정이 다 있나!”
순간 카리오스가 흥분해 카이사르에게 활시위를 당겼다. 엘븐 스나이퍼는 빛의숲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없다면 엘프들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기사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눈앞에 번쩍이는 오러 애로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카리오스를 천천히 타일렀다.
“아, 걱정 마시오. 볼모로 삼을 엘븐 스나이퍼는 다섯 명 밖에 되지 않으니까. 엘프 전사 500명이랑, 장로 1명. 일반 엘프 1000명뿐이까.”
“그럼 우리가 데려올 볼모는?”
“하프 뱀파이어 병사 300명.”
“그게 다인거요?”
카리오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도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의 구분은 잘 알고 있었다. 피를 주식으로 하는 뱀파이어 대신 하프 뱀파이어를 볼모로 준다는 사실은 다행이면서도 불공평했다. 그들에게 있어선 있으나마나한 전력일 테니까.
하지만 곧이어 꺼낸 카이사르의 한 마디에 카리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우리측 총사령관인 스탐과 카시안을 볼모로 삼지. 아, 만약 그들 둘이 빛의숲을 나가게 되면 엘븐 스나이퍼 다섯은 다시 보내주도록 하지.”
“흐으음, 불공평해보이진 않는군.”
카리오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시무시한 힘을 갖춘 적의 총사령관을 볼모로 삼는다라. 어떻게 보면 유리해 보였지만 그가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볼모로 삼은 것만 못했다.
“어떻소? 이 협정이 마음에 드는지?”
하지만 카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이 협정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으니까.
카리오스와 함께 혈서를 찍는 것을 끝으로, 뱀파이어와 엘프들간의 종전협정은 맺어지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해보도록 하지.”
“나도 마찬가지.”
악수를 하는 와중에서도 상대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카리오스로선 알 길이 없었다.
K.C 4424년 8월 24일. 인간계를 주름잡던 삼대 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철의 왕국까지 복속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캄에덴의 원정대는 놀랍게도 철천지원수였던 빛의숲 엘프들과 종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일정 기간 동안 쉬다가 다시 전쟁을 재개하는 휴전이 아닌, 완전히 두 세력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종전 협정 말이다.
아무리 협정서의 내용이 불리해도 엘프들에겐 서로를 얼싸 안고 ‘위대한 아르티시앙!’을 연발할 상황이었지만, 뱀파이어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뱀파이어 로드가 총사령관인 스탐에게 직접 친필로 쓴 서신을 보낼 정도였으니, 그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스탐은 사정이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답신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아이슬로너는 그를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그 이유가 정말 용서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스탐이 배틀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인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종전 협정이 되자마자 빛의숲에선 협정서의 내용대로 무수한 양의 공물을 볼모와 함께 캄에덴으로 보내었다. 캄에덴에서도 협정서에 적힌 대로 300의 하프 뱀파이어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총사령관인 스탐의 인솔 아래에 엘프들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엘프들과의 전쟁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자 뱀파이어 원정대는 인간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아직 남아있는 몇몇의 왕국들은 혈맹인 크로프란의 견제 아래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덕분에 3대 제국을 점령한 원정대는 차츰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인간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제국의 저항군들은은 점차 그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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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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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입니다^^;;(퍼퍼퍽)
솔직히 이게 끝이라면 홀가분하겠군요.
다른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불끈 불끈 쏫구쳐 올라서 말입니다.(방학때 써서 완결시키기로 한 스타 팬팩은 아직 4편밖에 못썼습니다 ㅠㅠ)
아무튼 다크 슬레이어도 이제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드는군요.
댓글의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시피 인간, 드워프, 엘프들간의 갈등도 거의 다 없어져서 지금 완결이 지어져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끝장은 봐야겠죠? 크크큭(지온 목소리)
다음 편부터는 아이슬로너의 재위를 놓고 벌이는 찬탈전과 함께, 이때까지 언급만 되었었던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놀랄만한 반전이 한 가지 준비되었으니, 한번 음미하시기 바랍니다^^(감격이냐, 몰매냐가 문제지만...아마 몰매를 맞을지도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