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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찬탈전
까마득한 절벽처럼 보이는 높은 성벽과, 그 가운데 우뚝 선 무시무시한 크기의 건물. 그리고 마치 피를 부어놓은 듯 붉은 꼭대기.
그 어떤 불세출의 책략자라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이 거대한 성은 바로 뱀파이어들의 제국, 캄에덴 최고의 성인 혈왕성이었다.
이 거성의 꼭대기인 붉은 탑 안에는 한명의 뱀파이어가 조용히 블러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후후후. 드디어 왔는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소리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세상은 참 재미있군. 이 고독한 군주의 흥미를 끌어줄 만한 놈들이 많으니 말이야.”
어느새 잔을 비운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점들이 보였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건물과, 그 사이를 오가는 인파들. 일국의 절대자인 그는 캄에덴의 백성들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시선을 주고 있는 뱀파이어는 단 한명이었다.
“어서 오라, 혈기왕성한 도전자여. 나의 피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어느새 뱀파이어 로드의 두 눈에는 투지가 들끓어 올랐다. 그것은 그가 수백 년 동안 캄에덴을 통치해 오면서 한번도 드러내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저벅 저벅
스탐은 혈왕성의 성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아는 경비병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다. 이미 지온이 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캄에덴 전역에 소리 없이 퍼져나간 뒤였다.
“역사가 만들어지겠군.”
뒤를 따라오던 카시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항상 어둡던 캄에덴이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혈왕성까지 오는 도중에 만난 모든 뱀파이어들은 마치 하찮은 미물마냥, 스탐 앞에서 벌벌 떨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가 내뿜는 강대한 기운에 말이다.
아마도 로드와의 찬탈전은 기정사실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군요.”
한참을 걷던 스탐이 살짝 웃으며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뱀파이어들을 응시하였다.
그들은 캄에덴의 일원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잘 아는 존재들이었다.
세대교체 전에 서열 1위를 고수하고 있었던 무적의 전사이자 1전단의 전단장, 바크 라시온. 그리고 서열2위로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인 카라프 덴슬립.
어쩐 일인지 그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스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많이 강해졌구나, 스탐. 내게 찾아왔을 때만 해도 나약한 초급 배틀러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카라프는 노골적으로 스탐을 도발해왔다.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당신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말입니다.”
스탐은 맞도발을 했다. 그는 이미 눈앞의 두 사내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눈치 채고 있었다.
“오호라, 그러셔? 배틀 마스터가 되고 나니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나보군.”
“그러게 말이야.”
둘은 시종일관 조소를 지으며 스탐을 도발해왔다. 하지만 머지않아 스탐의 눈빛을 보고 자신들의 의도가 들켰음을 깨닫게 되자, 단도진입적으로 말했다.
“긴말 할 것 없다. 로드를 뵈러 가기 전에 우리부터 쓰러뜨려라.”
“용건이 바로 그것이었군요.”
대충은 짐작했었다는 듯, 스탐의 얼굴엔 한 치의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디 캄에덴의 세 번재 배틀 마스터로 떠오른 녀석의 실력이나 보실까!”
흥미롭다는 외침과 함께 카라프의 비수 같은 수도가 스탐의 목을 노렸다. 웬만한 최상위급 뱀파이어도 긴장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군.’
하지만 배틀 마스터가 된 스탐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의 공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절정의 경지가 그의 능력을 대폭적으로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수도로 카라프의 수도를 가로막은 스탐은 한 때 스승이었던 자에게 매서운 반격을 가했다.
퍼어억!
“커헉!”
히든 브레이커인데다 배틀 마스터이기까지 한 인물의 주먹이다. 아무리 카라프가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라고는 하나 그의 공격은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카, 카라프!”
반격 한방에 맥없이 바닥을 나뒹군 카라프를 본 바크가 비명성에 가까운 고함을 토해냈다.
충격으로 보아 카라프는 더 이상 일어날 여력이 없어보였다. 단 한방에 말이다!
“이 놈!”
바크가 분노 어린 목소리를 토해내며 스탐에게 달려들었다.
단지 카라프가 당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은 오대패자다. 그 이름만으로도 캄에덴의 산천초목이 떨고 모든 뱀파이어들이 고개를 숙일 일국의 절대자들이었다.
그런데 겨우 뱀파이어 평생의 반도 살지 못한 애송이 따위에게 한방감이 되버리다니?
치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퍼벅 퍼버버버버벅!!
스탐에게 접근한 바크는 곧 무시무시한 연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최정예인 1전단의 전단장직을 수백 년 동안 역임해올 정도로 뛰어난 전투력을 바탕으로 한 그가 쉴 새 없이 퍼부어대는 풀 다크 오러 세례! 그 위력이란 하나하나가 바위를 돌멩이 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탐은 그 파상공세를 단 한손만으로 어렵지 않게 막아 내고 있었다.
‘맙소사! 말도 안돼…….’
바크는 경악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무리한 공격으로 지친 그의 품 안으로 스탐의 날카로운 주먹이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퍽!
“우욱!”
단말마의 비명성과 함께 바크의 신형이 기역자가 되었다. 스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추가적인 공격을 더 보태었다.
퍼퍽!, 퍼퍼퍼퍼퍽!
카라프와는 달리 바크는 상당한 맷집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마저도 배틀 마스터가 된 스탐에게 1분 이상을 버틸 수 없었다.
털썩!
머지않아 경악 어린 얼굴로 스탐을 바라보던 바크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불과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스탐은 캄에덴의 내로라하는 두 명의 뱀파이어들을, 너무도 손쉽게 쓰러뜨린 것이다.
“과연…, 이게 바로 배틀 마스터의 힘인가.”
평상시에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카시안이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할 뿐이었다.
지온을 쓰러뜨려서 설마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오대패자의 핵심멤버 둘까지 가볍게 쓰러뜨린 것이다.
“어때, 카시안?”
손을 탁탁 털던 스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카시안은 다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말이지?”
“이 정도면 내가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뜨릴 수 있지 않겠어?”
“방심은 금물이다.”
카시안은 충고 삼아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내심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요 몇 년 동안 여러 명의 오대패자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대교체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이면 뱀파이어 로드가 바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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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