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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찬탈전
붉은 탑을 향하는 스탐에게선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두 눈에는 단호한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나는 충분히 뱀파이어 로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두 차례의 대결에서 우러나온 자신감이었다. 물론 단순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온, 카라프, 바크 모두 뱀파이어 로드를 제외하면 캄에덴 최강의 전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스탐은 그들을 너무도 손쉽게 꺾었다.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터벅터벅
한걸음 한걸음씩 오르고 있는 계단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목적지가 어마어마한 높이를 가진 혈왕성의 꼭대기임을 감안해본다면 당연한 소리였지만 예전에 갈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스탐은 머지않아 뱀파이어 로드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드!”
문을 거칠게 내뱉는 흥분 어린 한 마디. 일국의 군주를 만나는 가신의 처지임을 감안해볼 때 너무도 무례한 행태였지만 스탐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인물도 그런 자잘한 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이슬로너가 자욱한 미소를 떠올리며 물어온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스탐은 깨달았다. 목소리엔 궁금함이 담겨 있지만, 이 여우같은 제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올 것인지 잘 알고 있다는 눈빛을 띄고 있었다.
“크로프란을 친다는 서신의 내용이 사실입니까?”
“물론이지.”
마치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다. 입가에 걸려 있는 의미 모를 미소가 스탐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어째서입니까?”
“서신에 적혀 있었을 텐데. 나는 더 이상 인간을 믿을 수도 신용할 수도 없다.”“그들 덕분에 인간계를 정복할 수 있었잖습니까! 그들 덕분에 인간계의 세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었잖습니까!”
스탐이 흥분한 어조로 아이슬로너를 몰아붙였다.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배여 있지 않았다. 거기다 그 말의 진위는 수백 년 동안 크로프란을 관리해온 뱀파이어 로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크로프란의 왕도 세뇌시킨 마당에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전에 내가 한번 물어보지. 일개 뱀파이어에 불과한 네가 감히 뱀파이어 로드인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지?”
“……!”
바로 이거였다. 뱀파이어 로드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크로프란에 관한 문제 때문에 나에게 서신을 보낸 게 아니구나!’
스탐은 캄에덴의 세 절대자들과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빛의숲을 나오자마자 지온이 나타난 것은 승부욕이 강한 놈의 성격 탓이라고 치자. 그러나 혈왕성에 들어오자마자 싸움을 걸어온 카라프와 바크에 대해선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탐은 설마 하는 얼굴로 아이슬로너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대로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한 건 바로 나다.”
“이유는, 저와 찬탈전을 치르기 위해서입니까?”
아이슬로너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 너에게 손쉽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놈은 혈기만을 앞세우는 멍청이지. 대병력이 벌이는 전투에선 크게 활약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절정의 배틀 마스터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두 명의 배틀 마스터들이 캄에덴의 절대자가 누군지를 가리는 것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잘 아는군. 후후후.”
순간 스탐과 아이슬로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 다 그 눈빛이 뜻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아이슬로너가 천천히 스탐에게 다가왔다.
“난 지금 너무도 기쁘다. 뱀파이어 로드의 자리에 올라 선 직후, 한번도 풀리지 못했던 고독은 끈을 풀 수 있으니까. 그것도 젊은 시절에 보았던 한 어린 뱀파이어에 대한 예언이 현실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하는군요.”
“하하하. 나도 그렇군.”
잠시마나 둘 사이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어느새 싸늘한 냉기가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주위를 차갑게 만들었다.
“찬탈전…, 오늘 당장 하실 겁니까?”
“아니. 내일, 모든 캄에덴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이기로 하지. 그 시간 동안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네.”
둘의 대화는 마치 사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만 들렸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미리 귀띔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오늘 만나 단지 눈빛을 주고받음으로써 캄에덴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찬탈전을 결정한 것이다.
혈왕성에서 나온 스탐은 레버쿠젠의 곳곳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들은 모두 아이슬로너의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바뀔 테지. 내일이 되면 저들은 나를 따르는 위대한 캄에덴의 백성이 될 거야.’
[너무 속단하는 거 아냐?]
듣고 있던 카스턴이 의문을 던졌다. 분명 그도 스탐이 지온에 이어 카라프나 바크 같은 쟁쟁한 실력자들을 연달아 격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슬로너는 그들과 레벨이 다른 그릇이다. 내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나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유지시켜야 내일의 찬탈전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것이 바로 그의 지론이었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 서로의 힘이 아직까지 우열을 가리지 못한 이 상황에서 그것마저도 없으면 수백 년 동안이나 캄에덴을 통치해온 무적의 군주가 가진 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래도 넌 이것만이 그녀와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보군?]
‘뭐…, 대충은.’
스탐은 부정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리아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뱀파이어 로드의 자리에 대해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보좌하며 캄에덴이 이 세계를 제패할 그 날만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슬로너는, 자신과 세리아 사이를 갈라놓을 지도 몰랐다. 그 전에 자신이 선수를 쳐, 뱀파이어 로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놈들은 아무도 없을 거야.’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하지만 카스턴은 그런 스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쥐면서부터, 그가 그 세리아라는 여자가 없으면 살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로드도 낭만적인걸? 이렇듯 나에게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게 해 줄 말미를 주다니 말이야.”
스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혈왕성의 붉은 탑을 응시하였다. 지금쯤 뱀파이어 로드는 블러드 와인을 홀짝이며 자신과 함께 오늘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던 중, 문득 까마귀들이 보였다. 떼를 지어 다니는 그 검은 새들은 붉은 탑 주위를 한참 맴돌더니 어디 론가로 기수를 돌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후후후. 해가 떠오르고 있군.”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이슬로너도 마찬가지였다. 창문 사이로 다량의 햇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슬로너는 그 햇빛을 고스란히 맞으며 창문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레버쿠젠의 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뱀파이어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하프 뱀파이어들이 채워나가고 있었다.
똑똑똑.
스탐이 나간 집무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스탐과는 달리 아주 정중했다.
“들어와라.”잠시 후. 두 명의 뱀파이어가 아이슬로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몰골은 모두 엉망이었는데, 얼핏 보아도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면목 없습니다, 로드.”
“놈이 이토록 강해졌을 줄이야.”
카라프와 바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로드에게 받을 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슬로너는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하하하! 걱정 말게나. 난 상황이 그리 될 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너희만한 실력자들을 손쉽게 이기다니, 정말이지 기대가 되는군.”어느새 아이슬로너는 두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카라프와 바크는 침울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기쁨에 젖어 있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 기대되는군.’
‘아마 내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싸움이 될 것이야.’
그들도 해가 지면 시작될 찬탈전을 고대하고 있는 이들 중에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