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6 / 0217 ----------------------------------------------
45. 찬탈전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선 말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뱀파이어들에게 있어 지루한 일상이 아니었다. 오늘은 바로 캄에덴의 4000여년 역사에 한 획이 그어질지도 모를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배틀 마스터가 된 이래로 무적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는 뱀파이어 로드 아이슬로너.
그리고 지온, 카라프, 바크를 연달아 격파해 캄에덴의 새로운 찬탈자로 떠오른 스탐.
오늘이 바로 그 둘이 찬탈전을 벌이는 날이었다.
캄에덴의 모든 이들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식이 귀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평소에 해왔던 모든 생업을 그만둔 채, 찬탈전이 열리는 전용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이 찬탈전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 정말인가보군…….”
관중석의 맨 앞자리로 빠르게 다가온 뱀파이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바로 카이사르였다. 빛의숲과의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게 되자 카이사르는 빛의숲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스탐 대신 총사령관 직을 대행하면서 점령지인 삼대 제국을 관할해왔다.
휴전협정 당시, 행복한 얼굴을 보이던 스탐을 보면서 카이사르는 그가 영원히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하지만 로드는 역시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군.’
카이사르는 스탐이 빛의숲을 나와 캄에덴에 돌아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로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물론, 카이사르의 입장으로 볼 때는 뱀파이어 로드가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저벅 저벅
경기장 안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시커멓게만 보이던 두개의 홀에서 오늘의 주인공들이 나오자 우레와도 같은 환호성이 그들을 반겼다.
“와아아아!”
“드디어 나타났다!”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이건 꼭 보고 말 것이야!”
관중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흥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싸움. 싸움이야말로 뱀파이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낙이였다. 평화로운 시기에 자살하는 뱀파이어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블러드 워와 같은 대규모의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그 어떤 뱀파이어도 자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로 배틀 마스터 아이슬로너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캄에덴에는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스트라이드가의 지온에 이어 최연소 배틀러였던 스탐까지, 무려 두 명에 이르는 뱀파이어가 배틀 마스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캄에덴 역사상 배틀 마스터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시대에 두 명의 배틀 마스터가 공존한 전례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캄에덴은 세 명의 배틀 마스터가 굳건히 버티고 있지 않은가!’
모든 관중들이 감격에 감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정작 오늘은 주인공인 두 뱀파이어들은 차분했다. 찬탈전을 하기로 한 어제부터 지금까지의 말미 동안 들뜬 마음이 싹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오늘에서야 뱀파이어 로드와 진정한 한판을 벌이는 건가.’
스탐은 아이슬로너를 응시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 기세에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가히 엄청난 위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탐의 가슴속은 차분했다. 마치 몸이 상대의 힘을 의식해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것만 같았다.
‘카스턴. 너는 잠자코 보고만 있어.’
스탐은 지금 카스턴을 매고는 있었다. 그러나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감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상황이 다급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순수한 뱀파이어 대 뱀파이어로서 싸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뭐,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약은 녀석.’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인즉 자신이 위급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리다.
어떻게 되었든 좋다. 지금은 뱀파이어 로드를 쓰러뜨리는 게 최우선이었다.
“자아, 그럼 어디 즐겨보실까, 피어오르는 투(鬪)의 향연을 말이다.”
아이슬로너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천천히 다가온다. 스탐은 쥐고 있는 주먹이 점점 떨리는 것을 느꼈다.
차분했던 감정에 갑자기 돌을 던진 듯, 파문이 일어났다. 마치 녹아내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이 격정의 열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흐아아아압!”
스탐은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뱀파이어로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수십 가지의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뇌리에 뒤엉켜 있었다.
샤샤샤샤샤샥!
곧 이어 스탐의 손에서 총알 같은 주먹세례가 아이슬로너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이슬로너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똑같은 주먹으로 스탐에게 응수했다.
투파파파팍! 파바바박!
서로가 방어하기를 포기한 채 , 오로지 공격에만 혼신의 힘을 퍼붓는 난타전! 하지만 이번 싸움이 찬탈전이고 둘이 배틀 마스터임을 감안했을 때는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뭐하는 거지? 흑마기로 안 끌어올린 채 주먹질만 하고 있잖아?”
“이거 볼려고 미친 듯이 달려왔더니만 겨우 이 정도냐!”
벌써부터 야유가 빗발쳤다. 뱀파이어 로드의 눈 밖에 나면 좋지 않을 텐데도 관중들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겐 이 세기의 혈전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관중들은 방금 전의 난타전이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퍼억!
“크으!”
제일 먼저 물러선 것은 아이슬로너였다. 아이슬로너는 스탐에게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부드러웠다.
“제법이구나.”
“운이 좋은 거지요.”
스탐이 웃으며 대꾸했다.
난타전은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서로 순수한 육체로 손을 섞으면서 누가 먼저 흑마기를 투입할 지를 가늠했던 것이다.
“뭐, 좋아. 몸 풀기는 이 정도로 하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볼까? 번거로운 짓은 거절하지.”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마치자 아이슬로너는 곧장 체내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스탐도 그에 뒤지지 않고 아이슬로너를 따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은 황금 빛이 감도는 어둠의 기운을 몸 전체에 활성화시킨 채 서로를 응시했다.
아이슬로너가 말한 번거로운 짓이란, 바로 흑마기, 다크 오러를 조금씩 끌어올리면서 단계적으로 싸우는 것을 뜻했던 것이다.
파방!
선공은 아이슬로너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서 골든 다크 오러가 깃든 흑마탄이 스탐을 향했다. 스탐은 날쌔게 그것을 피했다.
퍼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경기장 한구석이 날아갔다.
“휘유~! 과연 절대군주의 솜씨답군요.”
“그래. 후후후. 너 따위는 맞추면 한방에 날릴 수 있지.”
아이슬로너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스탐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일까요?”
스탐은 옆으로 몸을 던지면서 흑마탄을 쏘았다. 분명히 손은 아이슬로너가 뻗고 있었는데도 먼저 쏘아진 쪽은 스탐이었다.
펑!
“크으.”
아이슬로너가 흑마탄에 맞은 옆구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회심의 일격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스탐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경기장을 돌면서 아이슬로너에게 흑마탄만 쏘아대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이 웬만한 배틀러도 한방에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기에,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흑마탄을 활용한 유격전이라, 기꺼이 받아주지.”
결국 아이슬로너도 스탐을 따라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흑마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팡! 파방!
두서넛의 흑마탄이 일직선을 그리며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터지기를 반복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뱀파이어도 할 수 있는 흑마탄 놀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결은 그것과 차원이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다크 매지션이라면 모를까, 보통 뱀파이어는 흑마탄을 정확히 쏘지 못한다. 흑마탄은 화살보다 더 정교한 손조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주공을 근접전으로 삼는 뱀파이어들이 당연히 이것에 탁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슬로너와 스탐 이 두 배틀 마스터들은 다크 매지션이 무색할 정도로 정교하며, 파괴력 자체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막강한 한발을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흑마탄이 어느 부위로 날아가느냐에 따라 피격자의 체력과 흑마기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말은 이 유격전에서 이기는 자가 머지않아 벌어질 전면전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젠장.”
갑자기 허벅지 깊숙이 느껴지는 고통에 스탐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지금까지의 유격전은 날아오는 흑마탄의 대다수가 자신이나 아이슬로너의 손으로 소멸시키거나 흘려냈기 때문에 큰 타격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것은 그야말로 직방이었다.
‘최대한 빨리 수를 써야겠군.’
이대로라면 곧 이어질 힘싸움에서 밀릴 공산이 컸다. 처음에 아이슬로너의 옆구리에 명중시켰다고 해도, 자신이 허벅지에 맞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배틀 마스터라도 아이슬로너는 100여년을 군림해온 노련한 배틀 마스터였다. 자신이 힘으로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회를 노려 그것을 써야겠군.’
스탐은 마음을 굳게 잡았다.
유리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불리하면 승산이 없다.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슬로너에게 큰 타격을 입힐 카드를 써야만 했다.
------------------
추석 한방입니다...-ㅅ-
과연 누가 이길까요? 흐흐흐
하지만 중요한건, 누가 이기든간에 주요 전투가 하나 남았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