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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드러나는 음모
“이런, 플레임 실드!”
카앙!
하지만 듀리케르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사내는 화염의 막을 만들어 스탐의 비광살을 막아내었다.
“제길,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자 이를 악무는 스탐에게 카스턴이 조언했다.
[지금 상황에서 저 둘을 죽이는 건 무리다. 차라리 블러드 오우거를 죽이고 퇴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탐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선된 정예 히든 브레이커들을 대동하고 이 곳에 온 목적을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붉은 몸뚱이를 가진 거구의 오우거였다.
“모두 블러드 오우거를 노려!”
스탐은 죽이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오우거들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한 그들로서는 블러드 오우거나 두 드래곤의 시선만 끌어도 충분했다.
놈을 죽이는 것은, 배틀 마스터인 자신의 몫이었다.
‘좋아, 그럼 가보실까?’
스탐은 카스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단호한 결의를 내비쳤다.
수백의 오우거들이 난동을 부리고, 거기다 대마법사를 초월하는 두 명의 에인션트급 드래곤들이 마법까지 퍼붓고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히든 브레이커들이라 해도 빠른 시간 내에 끝장을 보지 못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스탐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려는 것이다.
“잔챙이 놈들!”
히든 브레이커들이 오우거와 자신들은 무시한 채 블러드 오우거에만 공세를 집중하자 화가 난 듀리케르가 더욱 더 강력한 마법을 퍼부었다.
손에서 나오는 마법 마다 불 속성이었기 때문에, 정작 히든 브레이커들 보다 오우거들이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듀리케르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드래곤인 그에겐 오우거도 한낱 미라미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캉! 카강!
“큭, 아주 작정을 했군!”
포위망을 뚫고 산발적으로 날아드는 예리한 공격에 블러드 오우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끄어어억!”
몇 분 동안 공세를 펼쳤을까? 결국 에인션트급 드래곤의 마법을 피해내지 못한 히든 브레이커 하나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사실, 여태껏 피한 게 용한 일이었다.
“받아라, 캄에덴의 원수!”
수하가 죽은 것에 분개한 카라프가 역정을 내며 블러드 오우거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려 왔다. 놈이 같잖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크하하! 자세히 보니, 네놈이 바로 이 조무래기들의 우두머리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어서 죽여주마!”
이 수백 년을 살아온 붉은 오우거는 100년 전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인물의 인상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블러드 오우거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조무래기인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는 눈앞의 카라프가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에, 당시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또 다른 인물이었다.
촤자작!
다크 오러를 동반한 날카로운 수도가 목을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거의 스친 것과 다름없는 깊이였다. 블러드 오우거가 광소를 터뜨리며 손을 뻗어 그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처억!
바닥에서 뛰어 오르더니 히든 브레이커들을 잡기 위해 난동을 부리는 오우거들의 머리통을 밟으며 빠르게 다가가는 인물이 있었다.
“놈을 조심해라!”
듀리케르가 블러드 오우거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까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그의 기습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경고는 늦어도 한참은 늦은 것이었다. 듀리케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빨간 홍염의 불꽃이 그를 덮쳤으니 말이다.
화아아아악!
무시무시한 폭염이 블러드 오우거의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지옥의 업화 아포칼립스!”
듀리케르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는 스탐이 펼친 저 불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흑마전쟁 때 죽은 자신의 아버지, 듀레모스가 만든 염속성의 절대 반지, 염령의 반지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놈, 어디서 저걸 얻은 거지?”
듀리케르가 의아해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스탐이 일으킨 아포칼립스의 폭염은 블러드 오우거의 상체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그가 쓰고 있던 미스릴 투구가 녹여져 나갔고 ·얼굴 전면이 불꽃에 뒤집어 씌워졌다.
“크아아아악!”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괴성이 스탐의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탐은 이를 악물고 최후의 일검을 선사했다.
푸슉!
날카로운 무언가가 묵직한 물체를 썰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소리는 몬스터들에게 있어선 재앙이요, 뱀파이어들에겐 축복으로 다가왔다.
쿵!
굉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진 붉고 둥근 물체. 그것은 바로 셀리온 평원을 호령하는 몬스터들의 군주, 블러드 오우거의 머리였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던 그가 스탐의 일검에 목이 떨어진 것이다! 그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아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경악했다. 그는 진작부터 이곳에 침입해 들어온 뱀파이어들이 블러드 오우거를 노릴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자존심 상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블러드 오우거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마법으로 목숨을 구할 생각이었다. 아직 놈은 이용가치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 자존심 때문에 블러드 오우거는 죽음의 문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쿠어어어!!
우두머리의 죽음에 분개한 오우거들이 미친 듯이 히든 브레이커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주인을 잃고, 이성을 잃은 그들의 손은 세살 배기 아이의 손과도 같았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면, 더 이상 100년 전과 같은 셀리온의 대규모 침략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쏟아 부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군.”
“아무래도.”
부들부들 거리는 듀리케르의 한 마디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난 수백여 년 간 셀리온에서 몬스터들의 강화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왔다. 100년 전 벌어진 뱀파이어와 몬스터들의 전쟁에서 블러드 오우거가 이끄는 몬스터 대군이 패퇴했다곤 하나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공성무기의 공급은 물론이고,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갑옷과 무기로 무장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 한 달 후에 캄에덴을 재침공할 예정이었다.
“이 가증스러운 뱀파이어 놈들!”
분노한 듀리케르가 마치 한 떼의 활화산처럼 마법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블러드 오우거가 없는 몬스터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준비해온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두 도망쳐!”
블러드 오우거의 주검을 재차 확인한 스탐이 히든 브레이커에게 소리쳤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금은 최대한 빨리 캄에덴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자신들이라도 강력한 두 마리의 에인션트 드래곤들을 이기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화아악
“으으윽!”
한 명의 히든 브레이커가 불길에 휩싸인 채 죽어갔다. 이로서 2명 째였다.
스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 정도의 피해는 이미 예상했던 바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캄에덴으로 귀환해서 뱀파이어 로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쳇,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 버렸군.”
드래곤의 광범위한 원소마법으로도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한 거리까지 도망친 히든 브레이커를 바라보던 듀리케르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아스테리온. 이제 어떡하지?”
머리를 잃은 몸뚱이 꼴이 된 셀리온의 몬스터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참 이마를 짚던 아스테리온이 대답했다.
“놔둬. 이 놈들은 더 이상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아까 블러드 오우거의 목을 베었던 뱀파이어 놈. 아무래도 스탐이라는 놈인 것 같군.”
아스테리온은 수천 년 동안 타 종족으로 폴리모프하여 정보를 모아왔다. 그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쪽이 뱀파이어였는데, 그는 이미 스탐이라는 뱀파이어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배틀 마스터의 자리에 올라 아이슬로너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요주의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 들었을 뿐, 정작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블러드 오우거를 암살하러 온 20여명에 달하는 뱀파이어들 중 그가 끼여 있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럼 이제부터 무엇으로 뱀파이어 놈들을 위협하지? 언데드 놈들은 보나마나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게 뻔한데… 이 배은망덕한 놈들."
듀리케르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부정의 숲의 언데드들이 무시무시한 수의 데스 나이트들을 확보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들이었다. 자신들이 제공해준 어마어마한 마력과 강력한 기사의 시체로 인해 언데드들은 지금의 캄에덴조차도 무시 못 할 전력으로 커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력으로 협박할 수도 없었다. 부정의 숲에 뿌리내린 수많은 리치들은 강력한 가디언들을 보유한 자신들도 우습게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언데드 놈들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후방에 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거니까.”
“그렇다면 설마…?”
아스테리온의 말에서 낌새를 차린 듀리케르가 물었다. 잠시 후, 입을 여는 골드 드래곤의 눈빛에는 강렬한 적개심이 서려 있었다.
“우리의 힘으로 캄에덴을 멸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