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83화 (18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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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운명의 캄에덴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으음……."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스탐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블러드 오우거를 암살한 뒤 휘하의 히든 브레이커들과 함께 캄에덴으로 귀환한 스탐은, 도착하자마자 곧장 로드에게 가서 보고했다.

놈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서문에서부터, 당시 만난 드래곤들에 대한 얘기까지 말이다. 굳이 몬스터들의 무장상태를 얘기하지 않더라도 블러드 오우거와 드래곤들이 같이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깊은 음모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스탐.”

“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스탐이 반문했다.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짧은 한 마디. 물론 그는 로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우리 힘으로 드래곤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이 질문만큼은 대답하기가 까다로웠다. 수천 년 동안 마주쳐본 적이 없는 두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뱀파이어였다면 대번에 이긴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탐은 왠지 누가 이긴다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로드! 급한 소식입니다.”

“무슨 소식이기에 이렇게 호들갑이냐?”

아이슬로너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눈빛은 의아함을 띄고 있었는데, 지난 수백 년을 뱀파이어 로드로 살아오면서 한번도 급보를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신이 혈왕성을 찾아왔습니다.”

“어느 곳에서 온 사신이냐?”

“드래곤 필드에서 왔다고 합니다.”

“!”

순간 아이슬로너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스탐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었다.

드래곤 필드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드래곤 한 마리가 몸소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어떡하긴, 만나봐야지.”

아이슬로너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스탐은 느꼈다. 그의 목소리 속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아이슬로너의 명령에 따라 서열 20위 안에 드는 고위급 뱀파이어들이 모두 어전에 모였다.

뱀파이어 족의 성격상 회의를 나누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 어전이라는 곳도 거의 형식적인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좌우 일렬로 도열 한 채 왕좌에 앉아 있는 뱀파이어 로드를 바라보는 고위급 뱀파이어들의 눈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뱀파이어들 사이로 걸어오더니 뱀파이어 로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단 한명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풍기는 기운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대가 바로 드래곤 필드에서 왔다는 사신이오?”

“그렇소.”

냉랭한 어조로 대답하는 사신의 목소리에는 오만함이 감돌았다. 아이슬로너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이유나 알아봅시다.”

그의 말에는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 목이 떨어질 거라는 뜻이 내포되 있었다.

솔직히 드래곤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이곳은 캄에덴의 최강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이다. 그리고 놈은 삼면이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혈왕성은 최상위 흑마법의 결계가 펼쳐져 있어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에 로드가 하는 한 마디에 저 사신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이다.

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도발적인 말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 묵묵히 한 장의 서신을 꺼내 펼치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둠을 숭상하는 더러운 무리들, 뱀파이어들의 우두머리는 들어라. 내 이름은 아스테리온. 골드 드래곤의 수장이다. 나는 드래곤 필드의 모든 동포들을 대표에 그대에게 경고를 보내겠노라.”

“이 놈이…….”

제일 다혈질적인 라윈이 사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말은 안했을 뿐, 모두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아이슬로너조차도 듣기 거북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신은 어디까지나 대리자였기 때문에, 모두들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인간과 드워프의 땅을 침략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것은 이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인하고 파렴치한 짓이더구나.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그대들을 주시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당장 점령지의 군대를 모두 귀환시켜라. 그리 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서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이 점 잊지 않도록 하라.”

“서, 설마?”

뱀파이어들의 두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소린가.”

아이슬로너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한 달 후에 다시 찾아올 테니 대답은 그때 듣도록 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사신은 성큼 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 죽이고 싶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살심은 아이슬로너의 한 마디로 인해 차츰 내려앉았다.

“저 놈을 죽인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

한 마디로 의논을 해보란 소리였다. 드래곤의 요구 아니, 협박을 들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흠흠, 일단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결사항전을 택할 것이오.”

잠시나마 정적이 흘러가던 중, 헛기침을 하던 바크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일컬어지는 자들입니다. 거기다 그들 하나하나에 딸린 가디언만 해도 몇 만이라고 하던데…….”

한 뱀파이어가 슬며시 찬성의견을 꺼내었다. 하지만 금세 라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큭,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우리는 긍지 높은 캄 크리스토퍼의 후손들이다. 놈들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든 말든 상관 없다. 덤비면 박살내면 그만이야!”

“저도 동감입니다, 로드. 어차피 저들과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 요구를 들어주면 오히려 힘이 쇠약해진 틈을 타 침공해올 지도 모릅니다.”

카라프가 흑마대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탐, 그대 의견은 어떤가?”

어느새 로드의 시선이 스탐에게로 갔다. 그러자 모두들의 눈빛이 그를 뒤따랐다. 스탐은 약간 난처해졌다.

지금 그의 서열은 1위. 뱀파이어 로드 바로 밑의 이인자다. 따라서 아래 서열의 뱀파이어들이 아무리 반대쪽으로 만장일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찬성하면 곧바로 역전되는 것이다.

‘휴우.’

한숨이 나왔다. 사실 스탐은 드래곤들의 요구를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어서 이 지겨운 캄에덴 땅에서 벗어나 세리아와 만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딱히 선택하고 싶은 쪽이 없었다. 그가 보기엔 두 쪽 다 완벽한 해결책이 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 다 마음에 안 드는군요. 기권하겠습니다.”

“하아, 기권이라!”

“잘 선택했군.”

반대쪽을 선택한 뱀파이어들이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지금 상황에서 기권은 사실상 반대를 찍은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로드시여, 저희들은 거의 다 드래곤들의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어서 전쟁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놈들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 말입니다.”

“그래? 흠…, 바크.”

“예!”

바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한때 드래곤과 싸워보는 게 소원이 아니었던가? 싸우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갖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는 벌써부터 드래곤들과 싸우기 위한 전술을 머릿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금세 깨져버리고 말았다.

“일단 인간 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그대의 1전단부터 캄에덴으로 귀환시키도록.”

“무, 무슨 소리십니까?”

“드래곤들의 요구를 받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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