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84화 (18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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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운명의 캄에덴

“!”

순간 어전에 있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몇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방금 한 말이 얼마나 엄청난 소리였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 뱀파이어 로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자신들은 무적의 군단. 불패의 신화 캄에덴의 뱀파이어들이다.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저항은 있을지언정 굴복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는 굴복을 말하고 있었다!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충격이 가장 큰 바크가 무릎을 꿇은 채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흥분한 어조를 숨기진 못했다.

“이유? 아주 잘 물었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아이슬로너가 단호하게 한 마디 했다.

“우리는 놈들을 이길 수 없다.”

쿵!

모두들 뒤통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일말의 반론도 없는 무자비한 한 마디. 이 한 마디가 뱀파이어들에게 주는 뜻은 한결같았다.

사형선고!

“어째서 부딪혀 보지도 않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로드 답지 않으십니다!”

바크에 이어 스탐이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모두들 존경 어린 시선으로 스탐을 바라보았다.

현재 로드에게 이렇듯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인물은 저 젊은 뱀파이어뿐이었다. 유일하게 그와 대등하게 싸웠던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스탐마저도 로드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우리가 싸워왔던 적들은 하나 같이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상대해왔다. 하지만 드래곤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놈들이 부린다는 가디언에 대한 것조차도!”

“!”

로드의 대답에 스탐은 할말을 잃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였다.

“내 말이 틀렸나, 스탐 베르크?”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더 이상의 반론은 없었다. 어전의 뱀파이어들은 캄에덴을 좌지우지하는 최강자들임에도 하나 같이 쥐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인간 세계를 정복하면서 승승장구하던 무적의 군대, 대륙을 호령하던 자신들이 이런 난관에 부딪힐 줄이야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기회를 주겠다.”

아이슬로너의 뜬금없는 한 마디에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몰렸다. 잠시나마 희망의 불이 켜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찰나였다.

“지금부터 그대들에게 무한찬탈을 허락하겠다. 내 의견에 반대하고자 하는 놈은 찬탈전을 신청해라.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

“하아!”

그의 입장에서야 최후의 안배겠지만, 그것은 조롱이 섞인 조소나 다름없었다. 이견이 있으면 절대군주인 자신을 꺾어보라는 소리였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스탐을 향했다. 유일하게 로드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단 한명의 뱀파이어!

그 스탐마저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싸워봐야 질 거라는 생각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스탐에게는 남모를 속사정이 있었다.

‘만약 로드를 이겨 뱀파이어 로드가 된다고 한들, 정말 드래곤을 이길 수 있을까?’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의구심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고 있었다. 예상컨대 드래곤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전을 벌인다면 캄에덴이 멸망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빛의 숲에 홀로 남겨둔 세리아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

세리아를 만나면서부터 뱀파이어로서의 불타는 야망보다는 행복한 현실에 안주하기로 한 스탐이었다.

“아무도 없나 보군.”

스탐을 지긋이 바라보던 아이슬로너가 결론을 내렸다. 나머지 뱀파이어들로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인자인 스탐도 나서지 않는데, 그보다 못한 자신들이 선택할 길은 없었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 보도록 하지…….”

“잠깐!”

그때 붉은 카펫에 발을 디디며 로드의 앞에 서는 이가 있었다.

왜소한 체구를 가진 뱀파이어. 하지만 그는 스탐이 아니었다. 바로 게르모네츠에게 다크 웨폰이라는 비기를 전수받은 오대패자의 일원, 카이사르였다!

“제가…, 제가 찬탈전을 치르겠습니다!”

“무, 무슨 소린가!”

깜짝 놀란 뱀파이어들이 카이사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이 배틀러에 불과한 그가 스탐도 패퇴시킨 이 절대군주를 상대한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미친 소리였다.

아이슬로너도 스탐이 나서지 않는데 설마 하니 누가 도전하겠느냐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순간 당황한 빛이 서렸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아이슬로너였기에, 당황스러움은 미소로 변모되어 번져갔다.

“후후후. 그대의 젊은 혈기가 마음에 드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카이사르는 겸손한 어조로 아이슬로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그의 찬탈전 신청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충동적인 것이 아닌, 진심인 것이다!

“카이사르!”

회의가 끝난 뒤, 스탐은 곧장 카이사르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무슨 생각이냐니?”

오히려 반문하는 카이사르였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마치 태풍이 친 뒤에 솟아 오른 맑은 하늘같았다.

“네가 찬탈전에 나서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사실 스탐이 이렇게 말리고 들 이유는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가 제시한 무제한 찬탈전. 모두가 나서기만 한다면 하루에 한 차례씩 20명의 뱀파이어들이 로드 한 사람에게 덤비는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배틀 마스터 아이슬로너라고 해도, 상위 20위 안에 드는 강자들과 20일 동안 싸우면 모두 이길 수는 없었다. 서열 20위부터 시작하면서 로드의 힘을 뺀 뒤, 스탐이 나서기만 하면 거의 필승이었다.

하지만 그런 짓거리를 할 뱀파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최후의 스트라이커인 스탐은 그렇게 해서 로드의 자리를 뺏을 생각이 없었다.

“훗. 뭔가 오해하고 있는가본데, 나는 단순히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찬탈전을 신청한 게 아니야. 캄에덴 최강의 사나이와 일대일로 싸우는 영예를 누리고 싶다는 호승심 때문에 그러는 거지.”

“뭐,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카이사르의 목적을 확인한 스탐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세리아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이 잊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싸움 자체를 생애의 대부분이라고 여기는 투사들이라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그를 윽박질렀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아무튼, 열심히 싸워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스탐은 왠지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겪은 찬탈전이란 결코 좋은 경험은 아니었건만…….

“그럼 내일 보자.”

그렇게 스탐은, 결전을 앞둔 친구를 두고 헤어졌다. 자신이 내신 나서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고 생각하는 스탐이었지만, 세리아가 떠오르자 그마저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카이사르에게 중요한 경험이 될 거라고 단정하며 스탐은 스스로를 자위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헤어지면서 입가에 걸려 있던 카이사르의 미소가 가진 뜻을.

“후, 드디어 내일인가.”

걸음을 멈춘 카이사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세상을 휘어잡을 듯한 어둠이 도사렸다. 눈을 뜨자 혈왕성 밖의 아름다운 노을이 보였다.

평범한 뱀파이어와 뱀파이어 로드가 보는 눈도 이렇게 다를 것이다.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야, 그래서 보란 듯이 웃으며 모든 뱀파이어들이 나를 우러러보게 만들 거라고.”

그것은 한때 유약하기만 하던 어린 뱀파이어의 순수한 눈빛이 아니었다. 강렬한 의지가 격정을 가진 폭염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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