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88화 (18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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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쟁 발발

“캄에덴의 새로운 뱀파이어 로드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와아아아!”

한 하프 뱀파이어의 엄숙한 한 마디가 떨어짐과 동시에 우레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물론 개중에는 불안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히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0여년이 넘도록 최강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캄에덴의 55대 군주 아이슬로너 바리스칸의 패배. 그리고 그를 꺾고 56대 뱀파이어 로드가 된 카이사르 레발트.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던 찬탈의 법칙에 반박할 수 있는 뱀파이어는 없었다.

“하아, 녀석이 뱀파이어 로드가 되었다니…….”

즉위식을 지켜보고 있던 스탐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때 저 자리에 근접해보았기에, 축하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크크큭, 믿기지가 않는 일이군.”

“지온.”

머지않아 스탐은 옆에 서 있는 거구의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온 스트라이드. 자신과 같은 배틀 마스터로 똑같이 뱀파이어 로드에게 도전을 해보았던 뱀파이어.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들었다.

“한때 코나 찔찔대던 멍청이가 우리를 제치고 저 흑빛 왕좌에 오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크큭.”

겉으론 비웃음을 내뱉고 있었지만 스탐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선 억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때는 말 그대로 한때일 뿐이야.”

그렇게 운을 뗀 스탐은 방관자적인 어투로 말했다.

“어쩌면 이것도 우리의 신, 벨리우드의 뜻일지도 모르지. 찬탈전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카이사르야말로 아이슬로너의 뒤를 이을 최고의 군주 감일지도 모르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랬다. 자신들은 오로지 이성만을 앞세우는 무법자와, 엘프 하나에게 발이 묶여 대소사를 못 가리는 가련한 동물들이다.

최고의 군주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니다. 모든 이들을 이끌 수 있는 리더쉽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자이다. 비록 카이사르가 얼마나 그 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자신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스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로드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모두 경청해 주십시오!”

즉위식을 주관하는 하프 뱀파이어들의 말에 모든 뱀파이어들이 잡담을 그쳤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대부분 한 가지를 띄고 있었다.

불신! 너의 힘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널 믿고 이 나라를 이끌 수 있겠는가?

뱀파이어들은 모두 단상 위의 한 인물을 주시한 채, 그가 지레 내뱉을 형식적인 연설이 끝나고 조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캄에덴의 새로운 주인이 된 저 젊은 뱀파이어에게서 나오는 강렬한 기백을!

“모두들 들어라, 난 뱀파이어 로드다! 대륙의 어둠을 지배하는 절대신 벨리우드가 선택한 그분의 아들이요, 이 나라의 군주다!”

“…!”

뱀파이어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으레 있는 비아냥조차 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만큼 저 젊은 군주가 내뿜는 패기는 대단했다.

“모두들 불안, 불만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우리 캄에덴의 즉위 방식은 항상 이러했으니까. 하지만 발전이 없다면 퇴보가 있을 뿐! 나는 지난 수백 년간 전대 뱀파이어 로드의 업적을 깊게 생각해 왔다.”

말을 끊은 카이사르는 끓어오르는 격정에 잠시 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점이 보고, 듣고 있는 뱀파이어들의 호기심을 더욱 더 가주시켰다.

“그는 확실히 캄에덴이 만들어낸 역대 최고의 군주다. 나조차도 감히 그가 일구어낸 희대의 업적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도 불완전한 생명체였기에 실수를 했다. 단 한번이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뱀파이어들 중 아이슬로너가 저질렀다는 그 실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굴복. 그것은 아이슬로너가 가진 유일한 옥의 티였지만, 여태껏 이룬 업적의 탑을 한 순간에 허물어버릴 정도로 치욕적인 결단이었다.

“현재의 안일함에 굴복을 한다면 그 다음은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전대 뱀파이어 로드가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겠다!”

“아!”

모든 뱀파이어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금 카이사르가 한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이 시간부터 선언하겠다. 감히, 인간 세계를 포기하라는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드래곤들의 도전에 정식으로 받아주겠노라고. 캄에덴은 도전자의 도발을 피할 정도로 약해빠지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어느덧 즉위식장 안은 함성의 도가니로 가득 찼다. 개중에는 감동에 사로잡혀 말조차 잇지 못하는 뱀파이어들까지 있었다.

드래곤 필드에 대한 정식적인 선전포고! 캄 크리스토퍼를 제외하면 수십 명이나 되는 역대 뱀파이어 로드들 중 한명도 하지 않았던 결단을 저 젊은 군주는 내린 것이다! 모두들 그의 불타는 용기와 과감한 결단력에 찬사를 감출 수 없었다.

“하아, 대단하군.”

스탐조차 처음 보는 카이사르의 진면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년단 시절 유약하게만 보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뱀파이어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카이사르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자신이 움츠려들 정도였다.

“후후후. 이제야 걱정이 가시는군.”

그때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스탐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흑빛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뱀파이어가 있었다. 얼굴마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누군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이슬로너,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부턴 저 용기와 패기를 가진 젊은 뱀파이어가 이끌어나갈 캄에덴을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야겠지.”

흑빛 로브의 사내는 마치 스탐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수많은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즉위식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뱀파이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가 지나가는 길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순식간에 즉위식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새하얀 초승달을 바라보던 그는 후드를 벗어던졌다.

스탐의 예상대로였다. 그는 바로 전대 뱀파이어 로드 아이슬로너였다.

“벨리우드의 뜻이라.”

아까 스탐과 지온이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보던 아이슬로너는 어제의 찬탈전을 떠올렸다.

“크흐흐흐. 아직도 상처가 가시지 않았군.”

그는 마치 가시더미를 뒹굴 듯, 극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몸을 매만지며 웃었다.

사실 카이사르와 일전을 벌일 때, 아이슬로너는 스탐과의 찬탈전에서 입은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평상시의 6할? 아마 그 정도였을 것이다. 스탐이 자신에게 입힌 피해는 한달의 휴식 기간으로도 복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상태로 그는 젊음의 혈기에 사로잡혀 있는 한 뱀파이어와 또 다시 찬탈전을 벌였다. 광오함의 대가였지만 배틀 마스터가 된 지 100년도 넘은 자신이었기에 3할의 힘으로도 하이 배틀러인 카이사르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만의 대가는 컸지.”

카이사르가 기적적으로 배틀 마스터, 그것도 실버 다크 오러의 소유자로 화했을 때, 아이슬로너는 깨달았다. 벨리우드가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후계자를 정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탐의 말 대로다. 이 모든 것은 벨리우드의 뜻. 드래곤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이야.”

순간 아이슬로너는 드래곤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자신의 한심함에 얼굴을 붉혔다. 오랫동안 로드의 왕좌에 앉아 배부르게 지내며 늙어왔다. 자만심은 증폭되었고 겁은 많아진 것이다. 어쩌면 찬탈전에서 진 것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디 지켜볼까, 캄에덴의 젊은 군주가 여는 새로운 시대를.”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슬로너는 다시 후드를 입은 채 쓸쓸하게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아이슬로너를 봤다는 뱀파이어는 단 한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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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이슬로너 옹께서 물러나시는군요-_-ㅋ

사실 이 부분을 구상하면서 정말 고민했습니다.

스탐이 아닌, 카이사르가 찬탈전에서 승리하여 뱀파이어 로드가 되다.

나름대로 띄워주긴 했지만 워낙 카이사르를 비중 없게 그려서인지 반발이 심하더군요;;

ps.그래도 주인공은 스탐입니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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