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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광기의 혈안
"이 안대 말인가? 크큭. 내 영생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거머쥐게 된 원흉이지."
"서, 설마 그것이란 말인가?"
카리오스는 충격을 먹은 듯 노안을 휘둥그레 뜬 채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를 안다는 듯한 눈동자에는 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카시안은 안대를 왼손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원한다면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얻는 것은 너의 죽음. 어때, 보고 싶나?"
차가운 미소로 물어보는 카시안에게 카리오스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보고 싶지 않다. 늙으니 겁이 많아져서 말이지."
"크크크. 한때 빛의숲을 대표하는 정점이던 놈이 쓸데없는 늙은이가 되어버렸다니……."
그렇게 비웃을 듯 카리오스를 바라보던 카시안은 자조 섞인 한 마디만 내뱉을 뿐이었다.
"부럽다."
"후. 아마 나에게 영생의 저주가 걸렸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죽어버렸을 거야."
카리오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사의 영생! 그것은 인간을 위시한 수많은 인간들이 꿈꾸며 갈망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른 자는 서서히 미쳐만 간다. 시간이라는 저주에 의해 친인들이 하나 둘씩 죽고 홀로 남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은 ‘제발 죽여 달라’는 한 마디일 뿐이다.
“그 얘기는 관두지. 내게는 평생을 짊어져야 할 일이니까.”
“알겠네.”
“여기 온 이유는 에레인 때문이다.”
“후후. 그 외에 달리 올 이유가 있겠는가.”
피식 웃은 카리오스는 노구를 천천히 움직였다. 카시안은 그런 카리오스의 뒤를 따르며 과거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날 듯 말 듯한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부터 하프 뱀파이어가 되기까지의 기억들을.
좋은 기억도 있었고 나쁜 기억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기억들이 한데 어우러져 가장 기억나는 존재가 바로 에레인이었다.
“다 왔다.”
늙은 엘프의 힘없는 한마디와 함께 카시안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곳은 전사자의 묘지로 전쟁에서 죽은 엘프들의 시신을 안치시키는 곳이다.
엘프들은 인간들처럼 시신을 불태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땅에 묻지도 않는다. 수명이 다해 죽으면 조용히 앉아 자연의 일부로 조금씩 사라져갈 뿐이다. 물론 죽은 자는 천천히 생기를 잃고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이 전사자의 묘지는 전쟁에서 죽은 엘프들의 시신을 온전히 보전하면서 아르티시앙의 품에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참 평화롭게 자는군.”
카시안이 피식 웃으며 평온히 누워있는 에레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복수심에 폭주하는 자신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엘프. 오랜 세월이 지나 그녀의 육신은 부분적으로 많이 사라져 있었다.
“앞으로 50년만 지나면 그녀의 육신은 완전히 자연으로 회귀하겠지.”
“그렇겠지.”
한참동안 에레인의 시신을 바라보던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겠지.”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거지?”
“죽었으나 죽지 않고 나돌아 다니는 자들의 땅으로 간다.”
우뚝 멈춰 선 카시안이 슬쩍 뒤로 돌아보며 흰 이를 드러냈다.
“뱀파이어 놈들은 무한전선이라고 부르는 곳이지.”
***
퍼퍼펑! 촤아아아
“이 끈질긴 놈들.”
“죽어라!”
파괴적인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곳곳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비산하며 검은 구체가 쉴 새 없이 날아갔다.
“흐아압!”
한 뱀파이어의 호기 어린 외침과 함께 흑마기가 마지막 구울의 뱃전을 갈랐다. 기괴한 비명성과 함께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윽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뱀파이어가 병사들에게 물어왔다.
“피해상황은?”
“예. 6전단 제3천귀대의 피해현황입니다. 968명 중 3명이 전사했으며 23명이 중상, 그리고 78명이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휴. 점점 피해가 누적되는군. 본국에서의 지원은?”
“아직 요원합니다.”
“제기랄.”
천귀장 타바스코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벌써 지원을 못 받은 지 1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뇌부에서는 아직까지 신병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그깟 밥그릇 싸움이 도대체 뭐기에……!”
이유는 내전이었다. 흑성왕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친인정책. 그것은 수천년 동안 쇄국정치만을 고수하고 있던 캄에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인간과의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뱀파이어 국민들이 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폐쇄적인 뱀파이어들에게 인간의 사고방식을 이입하여, 보다 발전되고 창의적인 뱀파이어로 발전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뱀파이어는 자신들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인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좋은 것만 배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 단면에 자리 잡은 미지의 영역 중 또 하나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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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짧은 외전이지만 참마대공을 쓰느라 계속 지연되는군요...ㅎㅎㅎ
가끔씩 다슬을 다시 써볼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한번씩 보면 재밌더군요.
설정도 5년이 지난 지금 봐도 괜찮아보이고 캐릭터도 괜찮았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제목...참 이것보다 근사한 제목을 만들지도 못하겠네요 지금은. 하하
쓸데없는 넋두리였습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