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2화 (2/200)

# 2

최후의 발악

아론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

그러면서 달려들던 괴물의 아가리에 대검을 쳐 넣었다.

퍼억!

두툼한 검이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었다. 녹색 피가 선연하게 번지지만 괴물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등 뒤에 뻗은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러 아론의 목을 노렸다.

가볍게 회피, 이어 왼손의 총을 겨누어 연발로 갈겼다.

투타타타!

지구 전역에서 악명 높은 대구경 권총, 처형자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에 괴물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뿌려지는 체액. 아론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걸 다 뒤집어썼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본다.

'장갑(裝甲)이라도 갖췄어야 했는데.'

아론의 자랑거리이자 저항군의 상징이며 외계종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장갑, 멸망왕.

장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외계종들은 그런 단점을 기가 막히게 치고 들어왔다. 아론이 모종의 일로 밀실에 들어가 있어서 보고를 늦게 받았다는 점도 한몫을 했고.

그나마 성혼 억제장을 작동시켜서 다행. 그게 아니었으면 대규모 성혼 발현에 모두 쓸려나갔겠지.

[아직 멀었나?]

[못해도 24시간은 더 필요합니다!]

[빌어먹을......]

텔레파시를 보내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답변 뿐.

신음을 삼키던 그때, 멀찍이 어릿한 빛이 반짝였다.

쭈앙!

짓쳐드는 적색 광선.

평소라면 레이저 방패로 반사시켜 역공했겠으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아쉬운 대로 대검을 휘둘러 광선을 쳐냈다.

"쉬시시식!"

그 틈을 노려 거대한 사마귀가 달려든다. 휘둘렀던 대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허공으로 찔렀다. 그 바람에 사마귀가 대검에 꼬치처럼 꿰여 버렸다. 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외골격이 터지며 피떡이 되었다.

"퉤! 벌레 같은 놈이!"

혐오스러운 모습에 침을 뱉는 아론.

장비가 없다고 얕보지 마라. 아론이야말로 충왕(蟲王)의 지식이 결집된, 장수풍뎅이의 힘과 사마귀의 잔혹함을 모두 갖춘 강화 인간 중의 강화 인간일지니.

워낙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일까,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방금 전의 사마귀는 충왕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존재라 서로 눈치를 보게 되었던 것.

조금은 입 안이 씁쓸했다.

'개 같은 외계종 놈들......'

방금 전 사마귀도 원래는 평범한 지구인이었다. 그런 자를 곤충들이 데려다 생체 개조를 통해 사마귀 전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 아론에게 그러했듯이.

"허억, 허억."

"훅, 훅."

주위의 저항군 병사들이 숨을 헐떡인다. 모두 강화인간이고 강력한 장갑을 갖추었으나 벌써 72시간째 이어진 혈전에 지치고야 만 것.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1시간? 2시간?

다가오는 최후가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후의 계획만큼은 성공시킬 작정이었다.

저벅저벅.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질적인 소음이 기지 광장을 달구었다. 자연히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세 명.

인간은 인간인데 괴이한 용모를 한 작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사족 보행을 하는 로봇, 온갖 곤충을 합쳐놓은 곤충인간,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는 부정형의 괴물.

아론의 입이 일그러졌다.

허탈함과 분노가 버무려져 뚝뚝 떨어졌다.

"세 총독 나으리들께서 힘을 합칠 줄은 몰랐군."

거짓말.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도록 유도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론이었으니까.

사족 보행 로봇, 기갑 총독이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복수의 검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동의한다는 듯 충왕 총독과 혼돈 총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을 벗어났고, 누구보다도 성혼 수확에 앞장섰으면서 인간을 흉내 내는 꼬락서니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 총독을 노려보며 일갈을 터뜨렸다.

"더 말이 필요한가? 덤벼라! 모조리 죽여주마!"

눈을 번뜩이는 아론.

장갑은 없다.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지쳤다. 탄약도 거의 떨어졌고, 전신에 넘쳐흐르던 성혼의 힘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백만은 발군. 폭풍처럼 사위를 압도했다. 정면에 우글거리는 적들이 잠깐 움찔할 정도. 오직 세 총독만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론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세 총독들은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적 아닌가. 괜히 티끌만큼이라도 부상을 입으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직이냐?'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세 총독도, 아론도 마찬가지.

지금쯤 때가 됐는데......

과연, 저항군에 숨어 있던 비수가 아론의 등을 찔렀다.

푸욱.

"큭!"

마지막 순간 몸을 뒤틀어 왼팔로 막았다. 그 순간 숨겨두었던 문양이 빛을 발하여 타오르는 빛의 검을 막아낸다.

배신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무잡잡한 피부, 강인한 갈색 눈동자......

이미 눈치 챘던,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훌쩍 다가왔다.

"부사령관?"

부사령관 다나카.

하긴 이 정도 인물이 배신해야 최근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시도하는 작전마다 조기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나카의 눈에 잠깐 음울한 빛이 스쳤다. 그것도 잠깐, 두 팔을 날개 펼치듯 활짝 벌렸다.

쾅! 콰콰쾅!

푸른 천상의 화염이 장내를 휩쓸었다. 피아를 식별하고 오로지 적에게만 심판을 내리는 성혼. 본래 인류의 적에게 쏟아졌던 그 불꽃이 오늘은 저항군 병사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크아악!"

"부사령관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가해진 일격에 누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나마 성혼을 끌어 모아 버티고는 있으나 풍전등화. 여기에 적들의 공격까지 쏟아졌다.

괴물들이 달려든다. 곤충들이 덮쳐온다. 기계들의 포격이 이어진다. 더구나 다나카가 발악하듯 공격을 날려대는 바에야.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내렸다.

"퇴각! 퇴각하라!"

이곳 광장이야말로 마지막 방어선. 돌파 당하면 더는 방어할 곳이 없다. 파멸을 직감하면서도 몸을 뺐다.

들리느니 인간의 비명이요, 터지느니 인간의 피. 순식간에 저항군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저항군이 멸절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성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다나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놈을 잡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총독들이 몸을 날린다.

가장 앞에 서서 쫓아온다. 뒤쳐진 저항군 병사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오로지 아론만을 노려보며 일직선으로 추격한다. 그들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듯하여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든다. 간헐적으로 처형자를 쏘아 반격하는 아론.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탄환이 똑 떨어지고 만다.

옆에서 달리던 저항군 병사가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인류여!"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폭사.

폭주한 성혼이 파멸을 터뜨린다. 폭발이 세상을 휩쓸었다. 뜻밖의 자폭에 총독들이 순간 돈좌된다.

"하찮은 수를......"

그러나 그 뿐. 채 몇 초 지나지도 않아 털끝 하나 다치지도 않은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다시 추격해 오기 시작.

몇몇의 저항군 병사들이 몸을 돌렸다.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본 후, 염원을 담아 아론에게 소리친다.

"사령관님! 뒤를 부탁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쇼!"

이어지는 폭발, 자폭, 죽음......

아론은 피눈물을 삼켰다. 무능력한 자신이 밉고, 그들을 속인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정말로 이 수밖에 없었을까.

몇 번을 생각해도 이 방법뿐이었다. 이미 여섯 세계의 수중에 들어간 지구를 탈환하기란 불가능했으니.

병사들이 스러져 갔다. 그래도 수백은 되었던 병사들이 이제는 거의 남지 않았다. 마지막 통로를 지나서 기지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했을 때는 오직 아론 하나만이 남았다.

막 충왕 총독의 칼날손이 아론의 등을 잡아채려 할 때였다. 정면의 문이 열리며 포화가 쏟아졌다.

투투투투투.

둔중한 소음. 대구경 기관포였다. 충왕 총독의 손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아니?"

어지간한 화력은 웃으면서 무시하는 충왕 총독이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포격이 정밀하게 충왕 총독을 쫓아갔다. 거의 수십 걸음은 물러서고 양 팔을 방패로 변형시킨 다음에야 포격을 막을 수 있었다.

충왕 총독이 곤충의 겹눈으로 문 안을 주시했다. 은폐 장막을 꿰뚫어 본 다음, 신음처럼 한 마디를 내뱉는다.

"멸망왕?"

어떤 연구실 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한 장갑.

흑색으로 도색된 채 불길한 적색 문양을 새겨놓았다. 어깨에 비죽 나온 포구가 섬뜩하다. 총독들조차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장갑, 멸망왕이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기갑 총독이었다.

"무시해라. 원격 조종이다."

"성혼이 실려 있었는데?"

"미리 충전만 시켜 놓으면 포탄에 성혼을 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이런, 속았구나!"

충왕 총독이 노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아론은 이미 문 안으로 들어선 뒤, 기계 장치가 웅웅거리며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 충왕 총독이 두툼한 강철문을 찢어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다른 두 총독과 다나카, 변이된 인간들이 따랐다.

"사, 사령관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의 눈이 아론과 적들, 그리고 연구실 중앙의 푸른 차원문을 몇 번이나 왕복했다.

자연히 적들의 시선도 푸른 차원문으로 향한다. 이제는 일반화된 차원문과 비슷하지만, 어쩐지 다른 느낌을 풍겼다.

기갑 총독이 감명 깊다는 듯 손뼉을 쳤다.

"놀랍군. 정말로 구현했을 줄이야."

"저거, 정말로 시공의 문이 맞나?"

"맞아. 확실해. 열등한 지구인이라 무시할 게 아니군. 하긴, 하찮은 종족에게 성혼이 피어날 턱이 없지."

시공의 문.

아론이 최후의 한 수로 준비했던 물건.

혼돈 총독이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성혼이 개화하던 시기로 시공 이동하여 역사를 바꾼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너희 종자의 작은 머리에서 나온 생각치고는 제법이다."

이어, 짧은 비웃음이 터졌다.

"그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푸하하하! 우습구나. 그 어떤 종족도 성공하지 못한 게 시공 이동이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 불멸의 경지에 이른 자들도 잠깐 멈추거나 조작하는 게 한계다. 오늘 너희가 멸종하는 것은 모두 네놈의 오판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령관님......"

연구원들이 또다시 아론을 부른다.

그걸 무시하고, 아론은 냉정한 눈으로 총독들을 노려보았다.

그랬다.

아론이 준비한 최후의 한 수.

그것은 시공 이동이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시작되기 이전, 외계종들이 본격적인 마각을 드러내기 전의 시대로 기지 전체를 시공 이동한 후 지구 전체의 각성을 촉구하여 인류의 자강(自强)과 독립을 이루자는 것.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저항군에게는 10% 정도라고 공표했으나 실은 만분지일, 아니 억분지일도 못 되었다. 이래서야 도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차라리 자살 행위라고 해야겠지.

총독들이 거만한 태도로 아론을 주시한다.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한 모양.

아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것이야말로 아론이 의도했던 것. 별안간 대검의 손잡이를 비틀어 잡아당긴다. 두툼한 손잡이가 힘없이 딸려 나왔다.

그대로 투척!

"헛!"

"이놈이, 어디서?"

총독들이 부산을 떤다.

치명적인 폭발물이라고 생각을 한 걸까.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방어막을 전개시키기도 하고 전신을 갑옷 형태로 변형도 시켰다.

죄다 광대놀음이었다.

아론이 던진 손잡이는 성혼의 결정체도 아니고 폭탄도 아닌, 그냥 평범한 손잡이에 불과했으니까. 손잡이가 금속 바닥에 떨어지면서 땡그랑 소리만 낸 게 전부.

총독들의 시선이 손잡이에 가 맺혔다. 성질 급한 충왕 총독이 분노를 터뜨리려는 찰나, 아론은 대검 손잡이 안에 숨어 있던 붉은 단추를 놈들에게 보여주었다.

연구원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 그건!"

"사령관님! 안 됩니다!"

여기까지 와서 뭘?

주저하지 않고 단추를 꾹 눌렀다. 연구실의 흰 조명이 붉게 변하며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경고! 시공의 문이 곧 폭주합니다. 기지 내의 모든 인원은 신속히 퇴거하십시오.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120, 119, 118......]

"무슨?"

"이게 뭐냐?"

총독들은 당혹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태 파악이 얼른 안 되는지 붉게 물들어가는 시공의 문과 아론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미친 사령관 새끼!"

"튀어!"

가장 먼저 연구원들이 벌떼처럼 달아났다. 어설프게 괴물들 사이를 헤쳐 나가려다 목이 잘리고, 방해 역장이 펼쳐져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간 이동 기기를 사용했다. 폭주하는 시공의 문에 휘말리느니 죽음을 감수하는 것.

아론의 입가에 맺힌 냉소가 짙어졌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시공의 문을 보던 다나카가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사, 사령관!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겁니까?"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지만 더욱 차가워지는 미소가 무언의 긍정을 웅변하고 있었다.

시공 이동?

불가능하다는 건 아론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무리 저항군이 궤멸 직전이라고는 하나 100%에 수렴하는 확률로 실패할 작전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꾸었다.

함정으로, 동반 자살로.

마지막 가는 김에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계획을 했다. 배신자가 분명 고위층에 있을 거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정보도 적당하게 흘렸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계획의 진체를 알지 못하게 했다.

"미친 놈!"

기갑 총독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어 네 개의 다리를 펼치고 추진 장치를 가동한다. 아까 추격을 할 때도 볼 수 없었던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머지라고 다를까. 곧 아우성을 치며 달아난다. 어쩌면 그리도 빠른지 몰랐다. 서로를 밟고 밟아가며 한 치라도 멀어지려고 악을 썼다.

아론은 멀거니 서서 그들을 보내주었다. 딱 하나만 빼고.

"커억!"

다나카를 예의주시하던 아론. 등을 돌린 순간 화력을 쏟아 부었다. 멸망왕이 충전된 성혼을 폭발시키며 공격하자 다나카의 전신이 짓이겨졌다.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지."

죽음을 목전에 둔 와중에도 다나카의 목을 베어냈다.

그 와중에도 다나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린다. 가장 질기다는 천상 성향의 성혼을 가진지라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고통스럽게 죽겠지. 혹시 모를 재생에 대비하여 몸만 완전히 불태웠다. 축구공처럼 홀로 남은 머리만 멀찍이 던져두었다.

경고음이 실시간으로 귀청을 때린다.

[60, 59, 58......]

이제 1분도 안 남았다.

멸망왕의 강철발 위에 고된 몸을 앉혔다.

"다 끝났구나......"

약 40년. 길고도 길지 않았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저항군 마을에서의 출생, 생이별, 곤충 인간으로의 개조, 참전, 낙오, 기갑계의 생포, 생체 실험, 장갑 기사, 학살, 저항군 귀순, 고문, 전투, 승진, 저항군 사령관 취임까지......

그 결과가 현재. 여섯 세계에 무수한 타격을 입힌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은 저항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크크크."

아론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어떤 힘이 느껴졌다.

강대한 세 종류의 성혼. 총독들이 자신의 힘을 발현해 시공의 문에 간섭하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자기들의 목숨만은 건져 보려고.

'백날 해봐라. 그게 되나.'

시공의 문이 폭주하면 이 근방은 지옥이 된다. 이론상으로는 지구 전역을 덮을 수도 있었다. 뭐, 힘이 부족하니 기지 근처까지만 뻗고 말겠으나 총독들이 도주하기란 불가능.

눈을 감았다.

다가올 죽음을, 아니 죽음보다 더 비참할 미래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물과 기름 같은, 그래서 섞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세 총독들이 서로의 정신까지 공유해가며 시공의 문을 안정시킨 것. 거기에 자기 부하들을 갈아넣어 연료로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붉게 폭주하던 시공의 문이 푸른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작동했다.

불완전하게나마, 애초 설정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나마.

시공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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