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3화 (3/200)

# 3

2018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전신을 칼로 난자하는 것 같다. 혹은 불사르는 듯했다. 말로는 형언하기 힘든, 생체 실험을 당할 때보다도 극렬한 통증이 아론을 괴롭혔다.

손을 허우적거리지만 잡히는 게 없다. 아니, 감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둠에 휩싸인 채, 영혼을 박탈당한 듯한 공허함에 젖어 세상을 부유했다.

정신조차 흐릿해진다. 물에 녹는 설탕처럼 존재 자체가 스러진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저 머나먼 혼돈의 바다에 빠져가던 때였다.

우우웅......

기이한 진동이 아론을 일깨웠다.

영혼 전체를 울리는 어떠한 울음. 더구나 저 어딘가에서 흐릿한 빛이 비쳐오는 게 아닌가.

'빛!'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실제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흐릿하던 의식이 점차 부상하게 된다.

빛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그러다가 자꾸 흔들린다. 또다시 몸 전체에 통증이 엄습해오지만 참았다. 어느 순간부터 얼굴의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하여 눈을 크게 뜨자, 마침내 눈꺼풀이 들리면서 눈부신 흰 광선이 대뇌를 찔렀다.

"으으으......"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

와락, 하고 벼락 같은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X아! YY이 ZZ?"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의 조합.

모르는 언어.

아주 처음 듣는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실패. 목을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목이 못 견디게 아파왔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아론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덕택에 빛이 가려져서 아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선명해진다. 망막 가득히 어떤 동양인 여성의 얼굴이 맺혔다.

여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현아!"

역시 의미모를 단어.

하지만 아론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 조용히 좀 해 봐.]

응? 뭐라고?

아론은 자신이 직접 말을 하고도 스스로 자기 입을 의심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언어야?

중남미에서 태어난 덕에 포르투갈 어와 스페인 어, 영어에 고루 능통했다. 그러나 지금 내뱉은 언어만큼은 생전 처음 들어 본 종류였다.

아니지.

저항군 사령관 직을 수행하면서 몇 번인가 들어본 적이 있다.

한국어라고 했던가?

지금은 혼돈계에 완전히 먹혀 버린, 극동아시아에 위치했던 나라의 언어라고.

아론의 눈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또 가상현실이냐......'

기갑계의 장기가 뭐냐.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인간을 세뇌하고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것 아닌가. 다만 잠시 생각한 후 이 추측에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주한 시공의 문을 뚫고 자신을 수습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

그렇다면 뭐지?

단순한 백일몽? 혹은 착각? 그도 아니면 현실 도피?

머리를 스치는 오만가지 상념에 아론의 얼굴이 쉬지 않고 꿈틀거렸다. 그걸 보던 여성이 별안간 주먹을 들어 꿀밤을 먹인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아, 진짜. 아프잖아!"

이제는 자연스럽다.

가장 익숙하게 쓰는 스페인 어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아론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혼이나 당하지."

"너......"

여성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다.

역린을 건드린 모양.

아론은 자연스럽게 사과를 했다.

"미안. 내가 조금 심했지?"

"후우, 환자라서 참는다. 나중에 퇴원하고 보자. 각오해!"

여성이 꽉 쥔 주먹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순간 아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몸짓, 이 눈빛, 이 얼굴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어디서 봤지?

'그래......'

생각났다.

지금은 불살라진 저항군 기지 사령관실,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뒤에 아홉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역대 인류 저항군 사령관, 혹은 뭇 영웅 중 가장 유명했고 큰 공을 세웠던 인물들의 사진이.

그 중 첫 번째.

애경 장군.

대한민국 출신, 1986년 출생, 여성, 거신 성향.

인류 저항군의 초대 총사령관이자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저항 조직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한 장본인. 2030년에 암살당하지만 않았다면 역사를 바꿨을 거라 전해지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진보다 확연히 젊은 얼굴로 아론의 앞에 서 있었다.

'맙소사......'

사실 아론이 가장 존경하기도 했던 인물. 그런 위인을 직접 눈으로 보니 얼떨떨한 한편 감격스러웠다.

이건 꿈인가, 현실인가?

옆에서 조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많이 아파?"

누군지 모르겠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하지만 역시나 아론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촌은 괜찮아. 몇 밤만 자면 괜찮아질 거야!"

"몇 밤? 다섯 밤?"

애경 장군, 즉 김애경이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겨우 무릎께나 올까 싶은 꼬맹이. 노란 원피스와 머리의 노란 리본이 잘 어울린다. 아이를 보자마자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하은.

김애경의 딸이자 이혼한 주태일의 피붙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자 저절로 주태일에 대한 혐오감과 주하은에 대한 애정이 솟구쳤다.

'누나와 조카라니......'

아론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생이별했던 아론이다. 그 후로는 모두 생체 실험을 받아 곤충인간이 되었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런 아론에게 누나와 조카라는 존재는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심장을 간질거리는 충만감, 편안함, 따스함......

맹세코 처음 느껴본다.

복잡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몸을 묻었다. 혼란이, 기묘한 감정이 아론을 잡아끌고 있었다.

김애경이 호들갑을 떤다.

"야! 야! 괜찮아? 많이 아파?"

"아니,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앉혀줄까?"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김애경이 침대 아래에 설치된 손잡이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대 매트리스의 머리 부위가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앉는 자세가 된다.

세상이 빙글 돌면서 끔찍한 고통이 재차 몰려온다.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지식대로, 내면 깊은 곳에 의식을 침잠시키자 통증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은 현실인가, 꿈인가 하고.

아픔이 느껴진다고 해서 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구를 점령한 여섯 세계 중에는 현실과 꿈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환상을 구축하는 자들이 많고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시공의 문과 자신이 최후를 맞이했던 상황의 앞뒤를 잘 따져보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크크크크......"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작은 웃음. 조금씩 커졌다. 나중에는 아예 몸을 들썩이며 웃게 된다. 전신이 결리며 아픔이 커졌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성공했다!

최후의 최후에 그저 미끼로 내걸었던 작전이 성공했다!

시공 회귀.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통쾌한 기분이 작은 가슴을 꽉 채웠다.

"야, 괜찮아? 왜 또 그래?"

"삼촌?"

김애경과 주하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특히 김애경은 침대 옆에 설치된 간호사 호출 단추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아론은 가볍게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니, 김현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육체의 이름이었다. 기이하게도 아론의 영혼만 시공의 문을 넘어 김현의 육체에 깃든 것이다.

'김현, 애경 장군의 동생......'

애경 장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김현이다. 따라서 원판 김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출신, 1990년 출생, 남성, 일반인.

2018년 초에 성혼 폭주 사건에 휘말렸고 이후 쭉 병원 신세를 졌다. 그리고 2018년 5월에 병원에서 발생한 성혼 침식 사태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병문안을 왔던 주하은도 사망했고, 남동생과 딸의 죽음으로 김애경이 각성하여 영웅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잠깐만.

김현의 눈이 꿈틀거렸다.

죽는다고? 2018년 5월에?

눈을 굴린다. 언뜻 병실 한쪽에 달려 있는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2018년 5월.

날짜는 알 수 없었다. 일력도 아니고 전자시계도 아니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누나, 오늘이 며칠이지?"

"날짜는 왜?"

"그냥, 궁금해서."

"5월 4일이잖아. 내일 어린이날이라서 대공원 가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하은이가 화낸다."

"삼촌 나빠!"

주하은이 입을 삐죽거렸다. 병아리처럼 귀여운 모습이지만 그걸 보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2018년 5월 4일, 그 날짜가 갖는 의미가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으니까.

22세기에서 흔히 일컫는 피의 금요일.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대침식이 벌어져 백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했다.

다시 말해 오늘 김현이 죽는다는 뜻.

'죽는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그런 감정은 진즉에 없애 버렸다. 문제는 기껏 최후의 도전을 성공시켜놓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는 것.

'왜 하필 오늘이냐?'

계획대로 1월 1일이었으면 좋았겠지. 막 성혼이 출현했으면서 열여덟 세계가 도래하지 않은 시점이니까. 4개월 간 준비하면서 피의 금요일을 대비할 수도 있고.

하다못해 일주일 전, 아니 하루 전이기라도 했으면......

어쩔 수 없다.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대처를 해야지. 김현이야말로 온갖 악조건 속에서 인류 저항군을 꾸려나갔던 인물 아닌가. 이까짓 시련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다.

현재 시각, 저녁 7시 55분.

"빌어먹을."

정말로 빌어먹을이다.

김현이 아는 바에 의하면 피의 금요일은 한국 시간 기준 저녁 8시에 시작된다. 고작 5분 남짓 남은 셈.

이 와중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자시계가 07:56을 출력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 순간적으로 계산을 끝냈다.

"누나."

"왜?"

"나 믿어?"

"응? 어...... 뭐, 그렇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데 없는 말에 김애경이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김애경을 마주 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 말 잘 들어. 곧 이 병원이 지옥으로 변할 거야."

"어......"

김애경의 눈에 불신이 떠오른다.

"너 꿈 꿨니?"

하기야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있을 일을 열거했다.

"다시 말 할게. 내 말 잘 들어. 8시가 되면 병원이 지옥으로 변하고 귀곡성이 울려. 5분쯤 지나면 배에 구멍 뚫린 귀신이 우리 병실로 들어올 건데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지나가거든."

"그게 무슨......"

"내 말 들으라니까. 어쨌든 그때부터는 행동해야 돼. 20분이 더 지날 때까지 병실에 가만히 있으면 미친 의사가 찾아와서 나도 죽고 하은이도 죽어."

"뭐? 야,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듣고 있던 김애경이 버럭 화를 낸다. 그 바람에 주하은이 놀라 딸꾹질을 했다.

"엄마. 무서워."

울먹이는 주하은을 김애경이 감싸 안는다. 화가 났는지 호랑이처럼 두 눈을 부릅뜨지만 김현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시작 됐어."

쿠구궁!

때마침 천둥이 쳤다.

기이할 정도로 창백한 벼락이 세상을 가로질렀다. 그로부터 세계가 개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색을 잃는 세상.

윤곽이 흐릿해지면서 빛과 그림자가 모호해진다.

희미한 이명과 두통이 대뇌를 자극했다.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어어?"

"엄마!"

당황하는 김애경과 부들부들 떠는 주하은.

오로지 김현의 두 눈만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 와중에, 예고했던 징조가 제 존재를 설파했다.

"끼아아악!"

귀곡성.

피의 금요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세계가 고정되었다.

차원의 저 편, 혹은 성혼의 힘이 구축한 이면 차원으로.

유명계(幽冥界).

이 무채색 세상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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