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유명계 –1-
유명, 곧 저승.
귀신들의 세상이다. 실제 저승과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생명력을 빼앗기고, 종래에는 유령에게 빙의 당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이게 뭐야?"
김애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본다.
1년만 지나도 영웅 중 영웅으로 성장하고, 원체 담대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저 일반인.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누나, 나 휠체어."
"응? 아, 알았어."
손을 내밀자 김애경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김현을 껴안아 침대 옆의 휠체어에 앉힌다.
그래, 휠체어.
김현의 눈이 순간적으로 병실 한쪽 이름표를 훑었다.
[김현]
[M/27]
[2018.1.19]
[척수 손상]
엎친 데 덮친 격.
김현은 하지마비 장애인이었다. 몇 달 간 재활 치료를 하기는 했으나 혼자서는 일어서는 것마저 버거웠다. 오늘의 지옥을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끼이익.
그대로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에서 과도를 꺼냈다. 겨우 몇 시간 전 김애경이 사과를 깎았던 물건이었다.
"삼촌, 무서워."
음영 없는 얼굴로 칼을 꺼내는 게 무서웠는지 주하은이 울먹거린다.
대답할 여유도 다독일 시간도 없다. 대신 김애경을 보며 말했다.
"5분 지났어."
[으흐흐흐......]
거의 동시에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주하은이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김애경이 주하은을 와락 끌어안을 때, 그것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이 예고했던 배에 구멍이 뚫린 귀신.
나이 든 남자 귀신이다. 음침한 회백색 그림자 같은 형체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한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것이 울음을 흘리며 작은 병실 안을 곧장 가로질렀다.
김애경과 주하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김애경이 주하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주하은이 꺽꺽대다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 버린다.
귀신이 병실 안을 지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초. 그러나 그 10초 사이에 김애경이 10년은 더 넘게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귀신이지. 뭐긴 뭐겠어."
여상(如常)스럽기만 한 말투. 김애경이 눈가를 찌푸렸다.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내가 5분 전에 했던 말 기억해?"
"5분 전에? 설마!"
김애경의 눈이 커졌다. 5분 전 김현이 자신과 주하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
반사적으로 딸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게 된다.
"움직여야 돼."
"어디로?"
"나만 믿어."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전생의 아론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애경 장군이다. 당연히 애경 장군이 생전에 남겼던 모든 기록물을 탐독했고, 다른 이들이 애경 장군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몽땅 찾아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애경 장군의 비망록.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토씨 하나까지 다 생각이 났다.
[우리는 겁에 질려 병실에 숨어 있었다.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이 무서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실수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병실을 벗어났어야 했는데...... 5년 전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당시의 나에게 한 마디의 충고라도 남길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도망치라고.]
"꺄아아악!"
바깥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벌써 8시 7분.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 8시 25분까지 병실에 남아 있다간 미친 의사에게 습격을 받는다.
"밖으로 나가자."
"밖으로?"
"응. 여기 있으면 나도 하은이도 죽어."
김애경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기절해서 안겨 있는 주하은을 한 번 내려다보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김현은 그런 김애경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하은이는 나한테 맡겨."
"알았어."
셋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김애경이 탄식을 했다.
"이건 대체......"
평소 보던 단조로운 광경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복도가 곡선으로 뒤틀어져 달팽이 껍질 보듯 변형되었다. 왼쪽은 끝없이 낙하하여 무저갱으로 통하고, 오른쪽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나마 오른쪽에는 희미한 빛이 있어 끄트무리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김애경이 오른쪽으로 발길을 튼다.
원래 환자 휴게실이 있고 병원 출구로 향하는 방향.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김현은 오른손을 들어 제지했다.
"누나, 반대야."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응."
"끼아아악!"
김현이 말을 하기 무섭게 또 절규가 터졌다.
복도로 나와서 들으니 확실하다. 왼쪽, 지금은 무저갱으로 연결된 곳처럼 보이는 간호사 스테이션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김애경이 몸서리를 쳤다.
"저길 가자고?"
"응. 살 길은 저곳 밖에 없어. 저기로 가야 돼."
"알았어."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어쨌든 김현의 의견에 따른다. 김애경도 바보는 아니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길게 입씨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경사가 가팔라진다. 처음에는 조금 가파른 정도였던 게 거의 수직까지 떨어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시각적으로는 절벽을 내려가는 것처럼 보여도 꼭 평지를 걷는 것처럼 전진한다는 점이다.
유명계가 가진 특성 중 하나. 감각과 실제 공간과의 괴리. 특히 시각을 믿어선 안 될 때가 너무나 많다.
"이거 이상하네......"
주변에 빼곡해야 할 병실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기괴하게 일그러진 무저갱 복도만 펼쳐질 뿐. 그나마 시커먼 어둠에 휩싸여서 근방 수 미터 너머 물체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누나."
"왜?"
"호신술 할 줄 알지?"
"당연하지. 나 유도랑 권투 오래 배웠잖아."
"잘 알지. 아주 잘 알지. 그걸 곧 써먹을 때가 올 거야."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쨌든, 알았어."
원 역사에서 김애경이 끝끝내 살아남았던 이유 중 하나.
김애경은 똑똑하기도 똑똑하고 신체적 능력도 발군이었다. 아무 성혼 없이도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 둘쯤은 찜 쪄 먹을 정도였으니까.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덕택에 주위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허황한 바람 소리까지......
꿀꺽.
김애경이 별안간 침을 삼켰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소음이 뚝 끊어져 버린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
김애경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 뭐야?"
"조심해! 누나, 앞!"
"어어?"
무언가 나타났다.
바람에 펄럭이는 희끄무레한 어떤 것.
화악 펼쳐진다.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며 단번에 김현을, 아니 김현이 안은 주하은을 덮쳐 왔다.
어둠에 잠긴 가운데, 유리알 같은 외눈과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서늘하게 뇌리에 박혔다.
"안 돼!"
김애경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놀란 와중에도 손을 내민다. 십 년 넘게 수련한 그대로, 덮쳐오는 인영의 멱살을 붙잡고 크게 회전시켰다.
뻐억!
"커헉!"
짧은 신음이 토해졌다.
바닥에 쳐 박힌 남자가 버둥거렸다. 타격이 컸는지 입에서 게거품을 줄줄 흘린다. 김애경이 남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머, 선생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떡진 머리에 여드름 투성이 얼굴, 그리고 의사 가운. 다름이 아니라 김현의 병동 주치의였다. 당장 7시쯤에 와서 지친 얼굴로 어디 안 좋은 곳 없냐고 회진을 하고 가지 않았나.
"이걸 어째!"
생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김애경이 부산을 떤다. 급히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할 때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걸 보고 김애경이 흠칫 놀랐다.
남자의 눈이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으니까. 검은자위는 사라진 가운데 흰자위 가득 까만 핏줄이 서 있었다. 더구나 김애경의 손이 허리에 닿는 즉시 입을 크게 벌리고는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다.
"크아악!"
"뭐......"
김애경이 뻣뻣이 굳는다. 연속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궁지에 몰리고야 만 것.
그걸 놓칠 리가 없다. 남자가 용수철 튀어오르듯 일어난다. 두 손으로 김애경의 양 어깨를 꽉 붙잡고 허연 목 줄기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 순간 김현이 움직였다.
푸욱.
아까 챙겼던 과도를 정확히 남자의 목에 박아 넣은 것이다. 근력은 부족하고 자세도 좋지 못했지만 그걸 상쇄하는 경험이 김현에게 있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몸이 파르르 떨린다.
입에서 피 섞인 침을 뚝, 뚝, 흘리더니 비로소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김애경과 여전히 과도 손잡이를 쥐고 있는 김현을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는 무슨 짓을......"
그리고 침묵.
앙상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거의 김애경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김애경이 무심코 남자를 안았다가 비명을 지르며 저리 밀어냈다.
"꺄아아아악!"
"왜 그래?"
"왜, 왜냐니, 너, 사, 사람을 죽였잖아!"
김애경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평소에는 호랑이처럼 자신감 넘치던 눈동자는 이미 없다. 있다면 겁먹은 사슴 한 마리 뿐.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너, 내 동생 맞아?"
방금 전 경험이 섬뜩하긴 했나 보다.
김현은 어스름하게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가만히 손을 들어본다. 과도를 찔렀던 바로 그 손이다. 어느새 피에 젖었고, 김애경이 그러하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영혼은 아론의 것이지만, 육체는 김현의 것이니 생전 처음 겪는 살인에 반응했나 보다.
비로소 김애경의 눈빛이 진정된다. 조금은 안도하면서, 대신 설명을 요구하는 기색으로 김현을 주시했다.
그럴 시간은 없다. 대신 널브러진 남자를 가리켰다.
"저거 봐.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응? 어?"
남자를 돌아본 김애경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저기 넘어진 시체를 보라. 냄비 안에서 끓는 죽처럼 부글부글 거품을 쏟아내지 않는가. 그 거품이 시체를 뒤덮더니 멀건 액체처럼 변해 사라졌다. 종래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의사 가운과 면 셔츠, 바지 등등 옷가지 종류만 남겨놓고서.
심지어 김현의 손에 묻었던 피도 마찬가지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놀랄 노자.
김애경이 두 눈을 비볐다.
"내가 헛것을 봤나?"
"헛것 아냐. 현실이야. 사람이 아니긴 해도."
실은 거짓말이다.
남자는 인간이며 김현의 병동 주치의가 맞았다. 단, 10여 분 전 유령에게 빙의당하기 전까지만.
유명계가 이래서 무섭다. 이 침식된 세계에서는 유명계의 유령들이 호시탐탐 산 자의 육신을 노린다. 그리하여 정신력이 낮아지고 한계 이하로 떨어지면 빙의하여 괴물로 태어난다.
'하은이한테 별 일이 없어야 하는데......'
김애경 모르게 슬쩍 하은이를 내려다보았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다.
지금 시점에서 기절한 하은이는 미친 의사의 습격에 치명상을 입고 얼마쯤 후에 빙의 당하여 소악마로 변모한다. 김애경은 어떻게든 하은이를 구하려 했으나 역부족.
일단 치명상은 피했지만 어린아이는 원체 유명계의 빙의에 저항력이 낮다. 최대한 빠르게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누나, 저거 좀 뒤져 봐."
"저걸? 왜?"
"나 믿는다고 했잖아."
"끙...... 나중에 다 얘기해 줘야 된다."
"그건 걱정 말고."
생각 같아선 직접하고 싶지만 하지마비 신세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확인하긴 어렵다.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사 가운과 옷가지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거 이상하네."
"왜?"
"이거 봐."
김애경이 물건 하나를 들어올렸다.
안경.
병동 주치의가 쓰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1시간 전만 해도 평범한 물건이었는데 지금은 기이하게 변화했다.
희한하게 한쪽 안경알이 흐릿한 은빛을 뿜어내는 것. 자연히 이 무채색의 세상에서 안경알 홀로 돋으라진다.
"무슨 느낌 없어?"
"무슨 느낌?"
"아무 것도 아냐."
은빛으로 물든 물건, 저게 바로 성혼이다.
성혼은 각자 어떤 성향을 띄고 있었다. 이 성향이 접촉하는 자의 성향과 맞으면 특별한 느낌을 선사한다. 손가락에 전기가 통하거나, 속이 메스꺼워지거나,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식으로.
안경알의 성혼은 김애경과는 성향이 안 맞는 듯하다. 비망록에서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쳐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것.
"나한테 줘 봐."
"여기."
김애경이 손을 뻗어 안경알을 건넨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는 찰나 찌릿한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적합 성혼!
손만 대도 흡수될 정도로 합치되는 성향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강력했다.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채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흡수해도 될 정도로.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안경알을 입으로 가져가서는 힘껏 깨물었다.
까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