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유명계 –2-
이게 무슨 짓이냐고?
간단하다.
성혼을 흡수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
먹으면 된다.
무엇이든 좋다. 생물이든 돌멩이든 안경알이든 씹어 먹기만 하면 소화되어 자연스럽게 흡수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입이나 식도, 위장에 상처가 나는 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문제. 위장으로 넘어가는 즉시 성혼을 담은 물체가 승화하면서 순수한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김현은 안경알을 아주 꼭꼭 씹었다. 거의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다. 덕택에 입 안이 넝마처럼 변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야! 너 미쳤어?"
김애경이 놀라 펄쩍 뛰었다.
예상했던 반응. 플라스틱 조각을 꿀꺽 삼키며 밀어 달라 손짓 하자 김애경이 투덜거린다.
"아 진짜. 나중에 설명 제대로 안 해주기만 해 봐."
끼기기긱.
휠체어 바퀴가 돌아가며 거친 신음을 토했다. 마찰음을 자장가 삼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뱃속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정신이 혼몽해진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불쑥 어떤 개념들이 떠올랐다.
아직은 모호한, 태초의 알과 같은 상태.
다만 이때 김현의 눈이 빠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저절로 눈물이 나면서 세상이 시커먼 어둠으로 물든다. 이 현상에서, 김현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투시 종류구나.'
나쁘지 않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건 병법의 기본이니까. 이계 기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통증이 점차 심해진다.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통증이지만 견딘다. 아니, 내부를 또렷이 관조한다. 자연히 혼돈의 얼룩처럼 구겨져 있던 성혼이 차츰 제 모습을 드러냈다.
네모난 창이요, 글자이면서 하나의 틀.
익숙했다. 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틀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따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품에 안은 하은이를 내려다보니 그제야 흐릿한 글자 같은 게 틀 안에 맺힌다.
<진단>
[이름] 주하은 [성별] 여성 [나이] 4
[건강] 양호 [상태] 기절
[순환] 정상 [호흡] 정상 [소화] 정상 [배설] 정상
[근육] 정상 [골격] 정상 [혈액] 정상 [분비] 정상
[정신] 미약 [중추] 정상 [신경] 정상 [생식] 정상
[양안] 정상 [피부] 정상 [이비인후] 정상
진단 성혼......
김현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습격했던 미친 의사의 속사정이 추측이 됐기 때문이다.
분명 최근에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남몰래 눈물도 흘렸겠지. 그 진한 감정이 안경알에 깃들었고 성혼 침식 사태를 맞아 새로운 성혼을 잉태했다.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훌륭한 의사가 됐을 수도 있는 인물. 하지만 하필 정신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유명계에 접어들었으니 살아남기란 처음부터 그른 일이었다.
'이건 필요 없어.'
의사들에겐 보물과도 같은 성혼이지만 전투에는 쓸모가 없다. 차라리 전생에 쓰던 성혼으로 변형시키는 게 낫겠다.
정신을 재차 집중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완전히 끊었다.
약한 육체와 삐걱거리는 소음이 방해했으나 사뿐히 무시. 전생에서는 하반신이 실시간으로 갈리면서도 새로운 성혼을 각성시켰던 김현이다. 이것쯤은 웃으며 치워버릴 수 있었다.
틀이 변형된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뚜렷하게......
아울러 틀 안의 개념과 운명까지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변형을 마친 다음 틀 안에 자신의 손을 비춰보았다.
<능력>
[이름] 김현 [성별] 남성 [나이] 2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하지마비
[근력] 6 [체력] 6 [민첩] 7 [감각] 9
[혼력] 8 [의지] 8 [통찰] 8 [위엄] 7
[성향] 요정, 환수
[성혼] 별의 관찰(요정, 3★)
별의 관찰!
성공적인 재현이다. 3성 등급이면 첫 성혼치고 등급도 높았고. 다만 전생에 각성했던 [기계신의 주시] 성혼과는 조금 다른 성 싶었다. 아마 육체의 성향 차이 때문이겠지.
본래대로라면 몇 가지 촉매와 장치를 동원해야 이 정도 결과를 얻을 수 있으나, 김현의 정신력이 워낙에 단단한 까닭에 이런 성과를 낸 것. 김현 외에 누가 있어 1성짜리 성혼을 재조립하여 3성 등급 성혼을 각성할 수 있을까?
'요정 성향이구나.'
전생에서는 충왕, 기갑 성향이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 다르다. 뭐, 어쨌든 좋은 일이다. 김현이 아는 지식을 이용하면 성향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나저나 능력치가 아주 처참하다. 근력과 체력은 6이고, 제일 높은 능력치가 9에 불과하다니? 평범한 성인 남자가 10 정도 판정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약하기 짝이 없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휠체어를 미는 김애경의 팔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히 틀 안의 글자들이 뭉개졌다가 다시 맺혔다.
<능력>
[이름] 김애경 [성별] 여성 [나이] 32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11 [체력] 12 [민첩] 12 [감각] 9
[혼력] 13 [의지] 15 [통찰] 12 [위엄] 11
[성향] 거신, 시원
[성혼] 없음
대단하다.
의지가 15...... 그것도 일반인인 지금 이 정도면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성향도 그렇지. 늙은 세계인 거신계(巨神界)와 어린 세계인 시원계(始原界)를 동시에 담지 않았나. 서로 떨어져 있으면 그냥 강하기만 한 힘이지만 같이 휘두르면 처음과 끝, 시작과 종말을 함께 갖는 어떤 것이 된다.
"저, 저기요!"
누군가 둘을 소리쳐 불렀다. 뭔가 해서 보니 간호사. 귀신 석상처럼 일그러진 간호사 데스크 뒤에 숨어서 김현과 김애경을 보고 있었다.
"어?"
그제야 김애경이 탄성을 지른다. 시야가 워낙 좁은 탓에 간호사 스테이션에 도착한 것을 지금 깨달은 것.
"정신 차려."
살짝 핀잔을 주고 간호사를 확인했다.
음영 없는 얼굴. 두 눈이 불안하게 떨린다. 그리고 발밑에 옅은 그림자가 끼어 있었다.
유령도 아니고 빙의되지도 않았다는 뜻.
"안녕하세요, 이세희 선생님."
아는 사람이라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몸서리치도록 평온한 말투에 이세희가 겁먹은 기색을 흘린다.
"어...... 김현 님 맞으세요?"
"맞습니다."
빠르게 주위를 확인.
아니나 다를까.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다.
본래 간호사 셋이서 근무하던 곳이다. 그 셋 중 하나만 살아남았고 둘은 시체가 되었다. 그것들을 확인한 다음에야 날카로운 피비린내가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우욱!"
김애경이 한쪽 벽에 손을 짚고 구역질을 했다. 아까 남자의 경우엔 피도 함께 증발하면서 피비린내가 옅어졌으나,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아 비위를 자극했던 것.
반면 김현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여기로 올 때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했으니까.
'미친 의사가 여기서 나왔지......'
병실에서 들었던, 그리고 막 복도로 나왔을 때 들었던 비명이 바로 간호사들의 것이었다. 이세희는 운 좋게 액운을 피했으나 원 역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미친 의사에게 살해당하여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연히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꽤나 인재였다.
<능력>
[이름] 이세희 [성별] 여성 [나이] 26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7 [체력] 9 [민첩] 10 [감각] 11
[혼력] 12 [의지] 12 [통찰] 11 [위엄] 10
[성향] 천상
[성혼] 없음
천상 계열 성향!
그것만으로도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 흔하디흔한 성스러운 빛 성혼만 하나 얻어도 유령들을 간단히 퇴치할 수 있으니까.
자연히 질 좋은 보급품 보듯이 이세희를 보게 되었다. 그게 무서웠는지 이세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러세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그게......"
"별 일 없으면 저희랑 같이 가시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는데,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름 사교적으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세희가 오히려 더 겁을 집어 먹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니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슬그머니 물러서는 이세희. 곁눈질을 하여 복도 저 편을 살핀다. 여차하면 도망치려는 생각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벽을 뚫고 목과 팔 다리가 꺾인 귀신 하나가 튀어나온 것. 공교롭게도 이세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꺄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귀신이 히죽 웃는다. 눈을 굴리며 이세희 앞으로 날아오더니 위협하듯 입을 쩍 벌렸다.
다 썩은 치아 사이로 시커먼 목구멍이 드러난다. 하필이면 목젖 너머에 훤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세희가 비틀거리더니 입에 거품을 물었다.
"으으으......"
가지가지 한다.
김애경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현은 나직이 혀를 찼다. 아무리 귀신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이런 하급 유령에게 겁을 먹으면 어쩌자는 건가.
끼리릭.
의도적으로 휠체어 바퀴를 힘껏 굴린다. 거친 소음이 일그러진 세계를 때렸다. 유령이 김현을 돌아본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90도로 고개를 꺾은 채 끄어억 하고 웃는다. 괴이한 미소, 번뜩이는 눈이 어우러져 음습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주 보며 비웃어 주었다.
물리력도 못 쓰고, 빙의도 못하는 최하급 따위가 무슨? 이것들은 일종의 배경 같은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마음만 제대로 지키면 아무 짓도 못하고 물러난다.
[으흐흐흐......]
같잖게 보는 마음을 느꼈나 보다. 유령이 한 번 흐느껴 울고는 휙 사라졌다. 오로지 희미한 메아리만 흔적처럼 남았다.
"으으으......"
이세희가 간호사 데스크에 몸을 기댔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용했다.
하지만 마냥 그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휠체어 바퀴를 굴려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옆까지 접근했는데 반응이 없어서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어 주었다.
"아야! 왜 그래요?"
"정신 좀 차려요. 누나도 이리 와."
"알았어."
김애경이 파리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할 말이 많다는 눈으로 김현을 보더니 입술을 짓씹는다.
"이것도 네가 알던 거였어?"
"당연하지."
"후, 좋아. 나중에 들을 게 또 늘었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비망록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나가는 방법은 단 하나, 병원의 중심에 위치하는 성혼의 핵을 제거하는 거였다. 특수한 성혼이나 장비가 있다면 외곽에 구멍을 뚫어 탈출도 가능하나 지금으로선 선택이 불가능했고.
길은 안다. 비망록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이 상태로 성혼의 핵에 접근해 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 21세기의 여러 매체에서 다루듯, 그런 중요한 물건에는 지킴이가 딸려오기 때문이다.
"선생님. 기계실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기, 기계실은 왜요?"
"필요해서요."
원 역사에서 김애경은 첫 성혼을 병원의 기계실에서 얻었다. 아쉬운 점은 당시에 이미 김현과 주하은을 잃은 뒤라 반쯤 미친 상태에서 병원을 헤매다 기계실에 도달했다는 점. 그래서 비망록에 상세한 정보를 남기지 못했다.
간호사인 이세희라면 알겠지. 비록 이 세계가 괴이하게 변형되긴 했어도 갈림길은 근본이 되는 병원 건물을 따르니 더듬어 찾아가면 도달할 수 있다.
이세희가 새하얀 얼굴로 김현을 본다. 파리한 기색의 김애경을 보았다가, 다시 무덤덤한 김현을 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김현 님은...... 김현 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그렇잖아요. 지금, 지금......"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물음.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그럼 울까요?"
"네?"
"선생님. 주위를 둘러보세요. 지금 상황이 정상적으로 보입니까?"
손가락을 한 바퀴 크게 돌린다. 이세희의 두 눈이 손가락을 따라 왔다.
두 말 할 것도 없다. 세상 전체가 무채색으로 변해 있지 않은가. 이걸 보고도 큰일이라고 느끼지 못하면 그건 바보 천치다.
"하지만, 하지만......"
이세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났을 때 흔히 보이는 반응, 현실 부정.
입씨름할 시간이 없다. 김현은 오른손 검지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만. 양자택일 하세요. 저희랑 같이 가실 겁니까, 따로 행동하실 겁니까?"
"저는, 저는......"
"따로 행동하신다고요? 알겠습......"
"같이 갈게요!"
이세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기 목소리에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는다.
김애경이 김현에게 눈빛을 보낸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남매라 그런지 눈빛만 봐도 상대 마음을 아는 모양이다. 내심 신기해하면서도 품에 안은 하은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하은이가 걱정이야."
"하은이는 또 왜?"
"아까 봤던 그 의사 말이야. 왜 그렇게 됐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유령은 심신이 미약한 상태의 사람에게 빙의해서 괴물로 변하거든. 지금 하은이가 그 상태잖아."
김애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 보았던 미친 의사의 모습이 하은이의 여린 몸 위에 겹쳐진다. 칼에 찔리고 멀건 액체로 변해 사라지던 마지막 장면까지도.
"안 돼!"
발작하듯 소리쳤다.
"가자, 얼른!"
급히 김현의 휠체어를 잡아끈다. 마음만 급해서 휠체어 바퀴가 잘 안 움직일 정도.
손을 뻗어 김애경의 팔을 콱 움켜쥐었다. 제법 아플 텐데 미동조차 없다. 휠체어를 들다시피 하여 잡아당기는 걸 한 마디로 제압했다.
"조용."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
"뭔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