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유명계 –3-
긴장감이 부풀어 오른다.
김애경도 이세희도 말이 없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정면을 주시할 뿐.
그러나 유명계의 제한된 시야에서 뭘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2미터만 벗어나도 깜깜이가 되니까.
김현이 뭔가 있다는 알아챈 건 순전히 별의 관찰 성혼 덕분이었다.
[□▲◎]
방금 전 어둠 속을 본 순간 네모난 틀이 꿈틀거리며 글자를 만들려고 했다. 비록 어둠 탓에 바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람이든 귀신이든 뭔가 있다는 뜻.
품에 숨겨둔 과도에 손을 가져갈 때 어릿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 있수?"
다소 걸쭉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
"하아."
"휴우."
김애경과 이세희가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잠시 후 어둠을 뚫고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짜리몽땅한 몸. 김현도 아는 사람이었다. 저번 주엔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었지. 붙임성 좋게 병원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이세희가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박경자 님!"
"이 선생님? 살아 계셨네요! 전 저 혼자 남은 줄 알고......"
박경자의 얼굴에도 또렷하게 안도한 기색이 떠오른다. 반면 김현은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 같아도 별의 관찰 성혼이 그게 아니라고 속삭였으니까.
[빙의귀]
네모난 틀을 통해 보이는 괴물의 이름. 얼마 전 조우했던 미친 의사와 동류였다. 박경자라는 저 여자도 유령에 씌어 괴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흑백의 세상이라 김애경과 이세희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박경자가 입은 환자복을 잘 보면 소매 끝과 정면에 치덕치덕 얼룩이 묻어 있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검은색이 아닌 적색이었을 얼룩이.
그러나 여기서 감정을 내비치는 건 하수. 이성을 유지하는 빙의귀라면 명백히 상위의 개체 아닌가.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필패다.
김현도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 김씨 총각! 그러게. 그 애가 조카야?"
박경자가 김현이 안고 있는 하은이를 보았다. 이내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어쩌다 이런 어린애까지 휘말렸대. 아이는 괜찮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박경자. 얼굴에 안쓰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인지 엄마인 김애경도 별로 경계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뻗어오는 두 팔.
고개를 숙인다. 셋의 시야에서 얼굴이 빗겨나자 비로소 본색이 나타난다. 시야의 사각에서 입을 한껏 벌린다. 인간의 것이 아닌, 상어의 것과 같은 치아를 드러내며 그대로 하은이를 물어뜯는다.
"크아아악!"
그러나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목덜미를 엄습한 것. 척추를 관통하는 충격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난다.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가져가니 작은 과도의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박경자가 타는 듯한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어떤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눈.
"너, 너!"
이를 갈지만 빙의귀의 특성 상 육체가 손실되면 버틸 도리가 없다.
무릎을 꿇는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차츰 무너져 내렸다.
잠시 침묵.
"당신!"
이세희가 불을 토하듯 소리 질렀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 미쳤어?"
반면 김애경은 조용하다. 짚이는 게 있는지 입을 닫고 박경자의 시신만 노려본다.
이세희가 발작하듯 이를 갈았다. 손을 뻗어 어깨를 잡는데 원체 앙상한 몸이라 꽤나 아팠다.
"경찰에 신고할 줄 알아! 이 미친 새끼야! 어떻게 사람을 죽여? 미친 새끼! 개새끼! 씨발 새끼!"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아예 자기 머리까지 쥐어뜯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 김애경이 이세희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 새끼 보호자라고 지금 저 새끼 편드시는 거예요?"
"편드는 게 아니라요, 저길 보세요."
"뭘요?"
"저게 인간 같아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세희가 움찔했다. 이어 김애경이 가리키는 대로 박경자의 시신을 주시했다.
역시나 시체가 부글부글 끓는 게 보인다. 금세 멀건 액체가 되어 사라지는 장면도 함께. 남은 것이라곤 역시 옷가지와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이세희의 눈이 흔들렸다. 김애경이 이세희를 부득불 끌고 가서는 잔해를 뒤졌다. 잠시 후, 환자복 속에서 작은 은빛 가죽 지갑을 하나 발견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간단해요. 사람이 아닌 건 죽으면 물로 변해요."
"물로 변한다고요? 말도 안 돼!"
"눈으로 봤잖아요? 현실에서 눈 돌리지 마세요."
역시 애경 장군은 애경 장군. 상황 적응이 빠르다.
이세희가 입을 닫았다. 머리를 휙휙 돌려 김현과 김애경을 번갈아 보는 게 아직도 혼란스러운 모양.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 볼래?"
"응, 여기."
가죽 지갑을 받아들고 차분히 관찰했다. 네모난 틀 안에서 몇 개의 글자가 꾸물거리며 일어난다.
[대지의 인내(거신, 1★)]
대지의 인내......
김현도 아는, 상당히 좋은 성혼이다. 1성 등급에서는 체력과 지구력이 조금 증가하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행성을 부술 일격도 버틸 정도가 되니까.
다만 지금 상황에서 쓰기는 아쉽다. 유명계의 괴물들은 물리적 공격에 강점을 가진 경우가 드무니까. 차라리 원 역사대로 공격력을 확보하는 게 낫지.
계획대로 가자, 계획대로.
"가자."
"응."
김애경이 다시 휠체어를 끈다. 그러면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김현을 보는 게 가죽 지갑을 만졌을 때 기이한 감촉을 느꼈나 보다.
다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설명해주리라 기대한 것. 하지만 여기 그럴 인내심이 없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예요?"
이미 기가 죽어 기어들어가는 말투.
무시할까 하다가 온정을 베풀어 주기로 했다.
"냄새요."
"냄새?"
"네. 그 괴물이 가까이 올 때부터 피 냄새가 확 났어요."
"아......"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알려주지, 하고 꿍얼거리지만 사실 불가능했던 일이다. 빙의귀가 당장 눈치를 채고 본색을 드러냈을 테니.
구불거리던 복도가 길게 앞쪽으로 뻗었다. 한쪽에는 태산처럼 솟은 탑이, 또 한쪽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세희가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 타야 되는데 이상하네요."
"엘리베이터 타는 건 자살행윕니다. 원형 통로 있죠? 거기로 가죠."
원형 통로는 바로 정면이다. 쭉 뻗은 복도. 이세희가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길이 이상한데요......"
"괜찮습니다. 원래 세계가 침식되면 공간 왜곡은 당연히 일어나요. 갈림길만 제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침식이요? 공간 왜곡?"
당연히 설명해주질 않았다. 밀어달라고 손짓만 하자 이세희가 한숨을 쉬고는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 위를 휠체어가 쭉쭉 나아간다.
다행히 빙의귀를 더 만나는 일은 없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귀신들만 몇 번 마주쳤을 뿐이다. 처음에는 이세희가 찢어져라 비명을 올렸으나 김애경이 담담하게 반응하는 걸 보고는 결국 적응했다. 세 번째쯤 마주쳤을 때에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여유까지 부렸다.
"여기서 오른쪽이요."
"이번에는 올라가네요."
"네. 왼쪽 문은 1층으로 나가는 문이고 오른쪽 문이 내려가는 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가는 거 맞죠?"
이세희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김현은 이 길이 맞다고 대답해주고는 서두르자고 손짓을 했다. 머릿속으로는 비망록의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긴 복도에 있었다. 비통함을 안고서, 쓰라림을 뼈에 새긴 채 달리고 또 달렸다. 기이하게도 그곳에서는 괴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긴 복도와 올라가는 길, 낭떠러지, 평원을 지나자 거대한 맥동이 나를 불렀다......]
기계실은 지하 4층에 있다. 김애경은 그곳에서 첫 성혼을 얻었다. 10년 뒤에는 7성 등급으로 성장하는 거신 성향 성혼, 황혼의 일격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제 여유를 찾았는지 이세희가 묻는다. 김현이 입을 다물고 있자 김애경도 슬쩍 거들었다.
"나도 궁금하다. 왜 다른 사람들은 볼 수가 없지?"
"갈렸으니까."
"응?"
"차원이 분할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자세한 건 나중에 가르쳐 줄게."
김현이 입원한 병원은 나름 300병상을 넘는 상당한 규모의 종합병원이다. 당연히 입원한 환자도 많고 방문한 보호자, 그리고 근무 중인 간호사와 의사, 직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람을 보기 힘든 건 간단하다. 말 그대로 차원이 나뉘면서 조각조각 난 것. 같은 차원에 있는 자들만이 서로 만날 수 있다.
예외가 있다면 괴물들. 유명계의 주민이 되면 분할된 차원을 자유롭게 오고 가게 된다. 산 자의 기척을 느끼면 순식간에 추적하여 쫓아오는 것.
단호한 어투에 더는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왜곡된 공간을 걷는다. 그리하여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꾸아앙......
멀리서 거대한 울림이 벽을 타고 다가왔다.
"어......"
김애경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오르가즘을 느끼기 직전처럼 강렬한 자극을 느낄 테니까. 심장은 두근거리고 열이 달아오르면서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릴 터. 지금부터는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왜 이러지?"
김애경이 혼란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앞을 한 번 보더니 스스로의 뺨을 찰싹 때린다. 이어 김현이 안고 있는 딸, 하은이를 내려다보고 눈을 부릅떴다.
살짝 검어졌던 얼굴이 도로 회백색으로 변한다. 성혼의 유혹을 스스로 떨쳐 버렸다는 뜻. 김현은 솔직히 말해서 감탄했다. 합치 성혼의 매혹을 거부한다는 건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누나, 참을 필요 없어."
"뭐? 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 말에 김애경의 얼굴이 설핏 풀린다. 그것도 잠깐, 단호하게 쳐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어떤 것에게 휘둘려서가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해."
한 발 물러섰다. 김애경의 말이 맞으니까.
그저 성혼에게 매혹되어 흡수하는 것과 자신의 중심을 단단히 지키면서 흡수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조금은 흐뭇한 기분이 되어 김애경을 보았다.
아이돌을 보는 듯한 눈빛에 김애경이 미쳤냐는 눈치를 준다. 그 놀랍도록 친누나다운 반응에 그저 웃고 말았다.
기계실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세계 전체가 울렸다. 어둠으로 가득 찬 복도를 지나치자 웅혼한 은빛이 온통 쏟아진다.
"앗!"
이세희가 탄성을 질렀다.
정면.
그것이 있었다.
거대한 심장.
무채색의 세상에서 홀로 밝게 빛나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그것.
원래 병원 건물보다 더 큰 것 같다. 사람의 심장을 확대한 모양새로 세차게 박동했다. 한 차례 뛸 때마다 세계 전체가 밝아지면서 기이한 힘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이건 대체......"
김애경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별 거 아니다. 성혼의 침식이 일어나기 전까지 저 심장은 일개 발전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이 발전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 묻고 눈물도 서렸다. 그 한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3성급 성혼으로 변모한 것이다.
김애경의 눈이 심장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 지하 4층에 들어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매혹을 느끼고 있겠지.
"후우."
짧은 한숨.
그것으로 매혹을 훌훌 털어 버렸다.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진 하은이를 한 번 보고는 김현에게 묻는다.
"내가 뭘 하면 돼?"
"그냥 가서 저거 만져. 그러면 돼."
"그게 전부야?"
"응. 손대고 나면 몸이 뜨거워질 텐데 한 가지를 강하게 소망해야 돼."
"뭘?"
"글쎄. 누나가 가장 바라는 걸 원해야지."
일부러 구체적인 개념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상상력과 간절함을 제약시켜 독으로 작용할 테니.
"후웁."
긴장되는지 심호흡을 한다.
"다녀올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김애경.
이세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까요?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저희 둘이라면 몰라도 누나는 괜찮아요."
과연 어떤 성혼을 얻을까.
심장으로 형상화된 성혼은 3성 등급, 황혼의 일격이다. 원 역사에서 김애경은 황홀경에 빠진 상태로 심장에 접촉하여 그 성혼을 얻었다. 하지만 김현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강력한 정신력으로 성혼을 재구축하여 강화 및 변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김애경은 원 역사와 달리 딸 주하은을 뒤에 둔 채 심장에 접촉한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두고 봐야 알 일.
김현은 아릿한 기대감을 품고서 김애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미숙한 영웅이자 마음속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등을.
이윽고 김애경이 심장에 손을 댔다.
빛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