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7화 (7/200)

# 7

그들의 각성 –1-

그것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시신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상에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빛. 그래서 무채색이 아닌 본연의 색채를 뿌려댄다.

용광로와 같다.

어쩌면 황혼을 보는 듯하다. 긴 후광을 드리운 채 스스로의 존재를 사방에 우짖고 있었다.

거대한 화염이 김애경의 주변을 불태웠다. 강렬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이세희가 급히 자기 얼굴을 가렸지만 김현은 뜨거움을 감수하고 김애경을 지켜보았다.

'힘내십쇼, 애경 장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배 사령관인 아론이 되어 김애경을 응원했다.

보여달라고.

황혼의 일격도 훌륭한 성혼이지만 한층 강화시켰으면, 혹은 변형시켜 더 대단한 성혼을 얻었으면 했다. 그래서 스스로의 클라스를 증명했으면 싶었다. 그래야 간신히 헤쳐 나갈 정도로 앞으로 놓인 길은 험하고도 험하니까.

김현의 염원이 닿은 걸까. 붉기만 하던 색채가 점차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이어 은은한 하늘색으로 물든다.

성공이구나.

저절로 달뜬 미소가 떠오른다.

보아하니 강화까지는 안 된 모양이다. 대신 성혼의 계열이 180도 반전 된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번 성혼의 변형에 성공한 이상, 앞으로 성혼을 흡수할 때 더욱 쉽게 재구축하여 각성할 테니.

무엇보다 기쁜 것은 김애경 스스로 자신의 정신력을 증명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쾌거였다.

"하아아......"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푸르게 일렁이던 빛이 소용돌이치면서 김애경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김애경이 비틀거린다. 숫제 한쪽으로 쓰러지기까지.

털썩!

"보, 보호자분!"

이세희가 화들짝 놀라 김애경에게 달려간다. 반대로 김현은 느긋하기만 했다. 천천히 휠체어 바퀴를 굴려 다가가며 김애경의 상태를 확인했다.

딱 한 항목이 바뀌었다.

[성혼] 서리거인(거신, 3★)

응?

하늘방패나 얼음 성벽도 아니고, 서리거인?

대박, 그냥 대박도 아니고 초대박이다.

서리거인은 전천후 능력의 성혼이었다. 공격과 방어 어디든 쓸 수 있었다. 여러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쓰기도 좋았다. 더구나 나중에 가면 거신계 성혼의 특징, 거인화도 가능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를 거둔 것. 김현은 속으로 김애경에게 응원을 보냈다.

'역시 장군님이십니다.'

"누나, 괜찮아?"

김애경을 흔들어 깨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난다.

"으으, 머리야......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진짜? 아니, 그런데 내가 뭘 한 거야?"

하긴 김애경은 자신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김현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 내밀었다.

"주먹 쥐어 봐."

"이렇게?"

"응. 그리고 주먹에 정신을 집중해."

"정신을?"

"지금 몸 안에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 그걸 주먹으로 밀어 봐. 그냥 혈관 따라 이동한다고 생각해도 돼."

하급의 기법이지만 아주 원초적이고 간단한 방법이니 초보자에게 적합했다. 첫 성혼을 변형시킬 정도로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무난히 실행하겠지.

시키는 대로 김애경이 주먹을 내민다. 꽉 쥔 채 두 눈으로 주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온이 내려가는지 으슬으슬했다.

쉬이익.

기이한 음색이 김애경의 주먹에서 새어나왔다. 동시에 싸늘한 빛 같은 게 뿜어진다. 현실에서라면 파란색일, 유명계여서 차가운 흰색으로 보이는 그것.

이세희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엄마야!"

마지막으로 새하얀 냉기가 흘러나와 김애경의 주먹을 감쌌다. 혼력이 부족하고 기술이 미숙해 제대로 된 발현이라 하기는 힘들어도 이거 한 방이면 어지간한 악귀쯤은 한 방이다.

김애경도 놀란 얼굴로 자기 주먹을 보았다. 그러더니 다른 손을 퍼런 주먹에다가 갖다 대고 몸을 턴다.

"앗, 차거!"

"우와, 이거 뭐에요? 설마 초능력?"

이세희가 눈을 빛냈다. 급기야 자기 손을 가져가려고 해서 급히 제지했다. 무방비 상태로 김애경의 서리 주먹에 노출되면 동상 입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대신 환자복을 짧게 잘라 김애경의 주먹에 가볍게 접촉시킨다. 그 즉시 환자복이 꽁꽁 얼어붙었다. 심지어 두 손으로 가볍게 비비자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까지.

김애경도 이세희도 입을 쩍 벌린다. 김애경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게 초능력......"

2018년 5월 4일 현재, 지구에서 초능력은 더 이상 생경한 힘이 아니다. 1월 1일부터 성혼이 출현하였고 간혹 성혼을 흡수하여 각성한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장 김현만 해도 성혼 폭주 사태에 휘말려 이 지경이 된 거 아닌가.

물론 대부분 1성 등급인 만큼 초능력은 전반적으로 평가절하 당하고 있다. 각성자의 수가 적어서 더 그렇고.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움직이자."

"어디로?"

"방사선실. 지하 1층이었죠? 선생님, 안내해 주세요."

"알았어요."

이세희가 김현을 힐끔거리면서 휠체어를 밀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방사선실로 향한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김현.

방사선실에는 성스러운 축복 성혼이 잠들어 있다. 2성 등급 성혼이며, 이걸 김애경이 받을 경우 이 성혼 세계의 지킴이조차 맞상대가 가능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세희가 이걸 흡수해서 각성할 수가 있느냐는 것.

'강제로라도 시키는 수밖에.'

김현은 착잡한 눈으로 하은이를 내려다보았다. 김애경이 걱정할까 봐 굳이 말하진 않았으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머리카락 사이 드러난 이마에 언젠가부터 힘줄이 돋아났으니.

이제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하은이가 유명계의 귀신에게 빙의되어 괴물로 변한다.

'그럴 수는 없지.'

전생의 아론은 냉정했다. 아니,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린아이 몇쯤은 가볍게 희생시키곤 했다.

하은이마저 그럴 수는 없다. 친조카 아닌가. 하은이의 싸늘해지는 체온을 느낄 때마다, 상태를 확인하러 눈을 내리깔 때마다 염려와 조바심을 느꼈다.

물론......

아론의 빙심(氷心)은 언제든 김현의 감정을 뒤덮을 수 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러지 않을 뿐이다.

"빨리 가죠. 누나도 더 밀어줘."

"왜?"

"묻지 말고, 빨리."

김현의 말에 담긴 다급함을 읽은 것일까. 휠체어 전진하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 않게 방사선실에 도착.

이곳도 특이했다. 그리 넓지 않은 내부에 비석들이 빼곡했다. 모두 음영 없는 회색인데, 딱 하나 한쪽 구석에 은빛으로 물든 것이 하나 있었다.

크기가 커서 안경알 때처럼 먹어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선생님."

"네?"

"저거 한 번 만져 보실래요?"

"제가 왜요?"

뜬금없는 제안에 이세희가 경계심을 보인다.

딱 봐도 수상한 비석이니 이세희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아까 저희 누나가 심장에서 초능력 얻는 건 보셨지요?"

"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상당히 강력한 초능력이 깃들어 있어요. 선생님이 그 초능력을 얻으시고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초능력을 가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나 보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김현을 마주 본다.

"초능력을 가지라고요? 진짜요?"

"예."

"왜 직접 가지지 않고요?"

김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겠지.

물론 저걸 흡수해서 요정계나 환수계의 성혼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은 있다. 문제는 김현의 능력치 중 혼력이 8에 불과하다는 점. 3성 성혼인 별의 관찰을 얻은 것만으로도 포화 상태였다. 여기서 영혼을 쥐어짜다시피 해야 성혼 하나를 더 각성할 것이다.

그러느니 성스러운 축복을 온전히 각성할 천상 성향 각성자를 하나 더 영입하는 게 낫다. 온갖 삿된 것과 악한 것의 천적이 바로 천상계 성혼이니.

"제가 가질 수 없는 종류여서요. 아까 심장이 저희 누나한테만 반응하는 거 보셨죠?"

"그랬나요?"

"네. 초능력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특질 같은 게 있어요. 그 특질이 맞는 사람만 흡수할 수 있고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그걸 알아보는 게 제 초능력입니다."

"아......"

이세희가 납득한 기색을 흘렸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까지 김현과 김애경이 보인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니까.

잠시 입을 오물거린다. 김현과 은색 비석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잘 안 되더라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 초능력을 얻는 건 문제가 없어요."

확신에 찬 말투에 이세희도 용기를 얻었다.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머리를 끄덕인다.

"해볼게요."

이어서 비석으로 다가가는 이세희.

김현도 휠체어 바퀴를 굴려 옆에 가서 섰다. 이세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품 속에 손을 넣는다.

차가운 물체가 잡혔다.

과도.

사람의 피를 두 번이나 묻힌 녀석이 또다시 섬뜩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뭘 하려고?

김애경이 눈으로 그렇게 묻는다. 김현은 그냥 보고 있으라며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이세희가 비석에 손을 가져갔다.

"앗!"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재빨리 떼어낸다.

"왜 그러시죠?"

"어, 느낌이 이상해요."

"어떤 식으로요? 전기가 찌릿하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속이 메스꺼우세요?"

자세히 묻자 이세희가 묘하게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부끄러워하는 태도. 거기서 짚이는 게 있었다.

"오르가즘을 느끼셨나 봅니다."

"무, 무슨 소리에요!"

이세희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김현 입장에서는 좋다. 합치 성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극도로 적합하다는 뜻이니.

'신필종은 보통 적합이었지......'

원 역사에서 성스러운 축복을 가져갔던 자의 이름이다. 김애경은 우연히 신필종과 만나 동행했고, 어떤 빙의귀와 싸우다가 수세에 몰려 여기까지 도망쳤다. 그 후 신필종도 부상을 입어 피를 쏟았는데, 그 피가 하필 성혼 비석으로 쏟아져 성혼을 흡수하게 되었다.

그렇다, 피.

입으로 삼킬 수 없는 큰 물체는 피를 매개로 하여 성혼을 흡수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피의 양과 상처의 크기는 적합 정도에 따라 달랐다.

김현은 가만히 이세희의 손을 붙잡았다.

"왜, 왜 그러세요?"

"선생님. 조금 아플 겁니다."

이어 과도를 들어 인정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꺄아악!"

길게 울리는 비명.

김현의 얼굴은 냉정했다. 사실 크게 휘두른 것 같지만 피륙을 살짝 벤 게 전부. 이만하면 성혼을 각성하는 도중에 자연 치유될 것이다.

이세희가 반사적으로 팔을 크게 휘저었다. 힘을 역으로 이용해 비석에다가 몰아붙인다. 상처 난 손바닥이 정확하게 비석에 가 닿았다.

우우웅.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이세희가 길게 달뜬 신음을 흘린다. 얼굴이 거뭇거뭇한 게 홍조가 어린 게 분명했다. 비석에 달라붙어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런 이세희를 버려두고 뒤로 물러났다.

세상이 무채색이라 그렇지, 안 그랬으면 꽤나 선정적인 장면이 됐겠다.

김애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저랬어?"

"아니. 누나는 합치 성혼이라 저렇지 않았지."

"합치 성혼은 또 뭐야?"

"나중에, 나중에."

"그 놈의 나중에는 진짜......"

어느새 이세희의 각성도 끝나가고 있었다.

비석에 어려 있던 은색은 심상 속에서 황금색으로 변화했다. 흐릿한 황금빛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이세희의 양 손에 스며든다. 그리하여 손등에 선명한 날개 문양을 새긴 다음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방금 전 손바닥에 낸 상처가 회복된 것은 불문가지. 별의 관찰 항목에도 새로운 글자들이 떠올랐다.

[성혼] 성스러운 축복(천상, 2★)

"아......"

각성의 열락이 지나가고 이세희가 아쉬움 가득 찬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그 여운이 남았나 보다. 신기한 듯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이어 손을 살짝 구부리며 정신을 집중.

연한 백금빛이 뿜어졌다. 아까 김애경이 성혼을 발현하는 걸 봐서 그런지 바로 따라한 것. 단능(單能) 성혼이 전천후 성혼보다 발현하기 쉽기도 하고.

"우와."

이세희가 나지막이 감탄을 토했다. 자기 손을 폈다 쥐었다 돌렸다를 반복하며 신기한 물체 보듯 구경을 한다.

톡톡 두드리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김현과 눈을 맞췄다.

"아, 김현 님. 감사합니다. 제가 초능력자가 될 줄은 몰랐어요."

이세희가 방긋 웃었다.

"뭘요. 저도 필요해서 그렇게 한 건데요. 먼저 우리 하은이한테 초능력 좀 써주세요."

"알았어요."

하은이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서툴게, 그러나 분명하게 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김애경이 가슴을 졸이며 하은이를 보았다. 김현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파도가 몰려오지만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한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하은이의 상태를 주시했다.

심신미약 상태로 유명계의 기운에 노출된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은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

몇 시간 만에 낸 목소리.

"하은아!"

김애경이 울음기 섞인 외침을 토해낸다. 이어 격렬하게 껴안자 하은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간지러워."

옆에 있던 이세희도 살포시 웃음을 짓는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천진한 어린아이의 웃음이 이 기괴한 상황에서 한 가닥 활력소가 된 것.

그러나 김현은 웃을 수 없었다. 별의 관찰을 통해 보이는 어떤 글자 때문이다.

[상태] 빙의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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