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그들의 각성 –2-
빙의!
혹시, 빙의귀가 되었냐고?
그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비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유령이 이미 하은이의 육체에 깃들었고, 차츰 점령해나가고 있다고 할까.
지금 축복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5분만 늦었어도 빙의귀가 됐을 터. 한 번 빙의귀가 되면 고위 각성자가 오지 않는 한 돌이키기 불가능하다.
'서둘러야 돼.'
시간은 벌었지만 유명계에 오래 있으면 결국 축복의 힘도 반감된다. 어서 탈출해야 했다.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어째서 방사선실에 먼저 와서 축복부터 챙기지 않았는가 하고.
이유는 간단했다.
속으로 시간을 헤아린 후 둘을 불렀다.
"누나, 선생님."
"왜?"
"네?"
"5초 뒤 작은 지진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기, 방사선실에서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뚱딴지같은 소리.
이세희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김현의 예언이 현실화되었다.
그그그그긍.
방사선실 전체가 진동했다. 말 그대로 작은 지진. 황급히 자세를 잡는 이세희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
"그리고 3초 뒤 비석이 빛나기 시작하지요. 5초가 더 지나면 비석에서 유령들이 솟구칠 거고요."
이 또한 실현 된다. 이세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김현의 초능력에 대해 점차 실감하는 것.
휠체어에 앉은 왜소한 체구의 김현이 기이하게도 커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 탓에 슬슬 의지하게 되었다고 할까. 김현이 은연중에 의도하기도 했고.
김현은 이세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초능력, 준비하세요."
"네, 넵!"
수간호사에게 명령을 받은 것처럼 빠릿하게 외친다. 자신도 모르게 힘을 끌어올리는 이세희. 무채색 음울한 세계에 백색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유령들이 떠오른다. 휘청휘청 넘어갈 듯 춤을 춘다. 귀곡성이 아스라이 메아리친다. 짧은 군무를 마치고 바다거품처럼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 거대한 사마귀 알 군집 같은 것을 형성. 동시에 별의 관찰 성혼이 놈의 정체를 잡아냈다.
[운무귀]
상당히 강력한 유령이다. 원 역사에서도 애경 장군은 일행 하나를 잃고 신필종이 성스러운 축복을 각성한 다음에야 잡아내는데 성공했지.
그러나 22세기를 살았던 아론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운무귀의 정석 공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선생님, 지금!"
"네!"
이세희가 힘껏 두 팔을 떨쳤다. 황금색 광선이 일직선으로 뿜어진다. 밧줄처럼 길게 늘어져서는 운무귀를 단단히 결박했다.
아직 완벽히 결합하지 못한 상태. 운무귀의 육체가 구름처럼 뿌옇게 변했다. 동시에 운무귀 중심에 검은 보석 같은 것이 언뜻 드러났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이쪽을 보던 김애경과 눈이 마주친다.
이심전심. 눈빛만으로 마음이 통했다.
김애경이 어깨를 길게 잡아당긴다. 허리가 유연하게 돌아간다. 뒤로 힘껏 당긴 팔이 전생에서 그렇게나 돌려봤던 어떤 영상을 연상시켰다.
무수히 많은 외계종을 때려잡았던 그 기술, 멸망포를.
언뜻 감격의 기색이 눈가를 스칠 때 김애경이 마침내 일권을 때려 넣었다.
꾸르르릉.
맑은 잿빛 광선이 튀어나간다. 날아가며 공기를 얼린다. 수증기가 응결한다. 그 끝에서 송곳처럼 변하여 운무귀의 핵에 박혔다.
콰직.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
서리 송곳이 지닌 힘이 일거에 쏟아졌다. 연약한 운무귀의 핵으로는 그걸 버틸 수가 없다. 잠깐 흔들리나 싶더니 유리창처럼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종료.
운무귀의 몸이 흩어졌다. 사마귀 알 같던 게 드라이아이스 연기로 변한 듯한 모양새다. 김애경이 짧은 한숨을 토하고, 그때까지 김애경에게 달라붙어 있던 하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이거 뭐야?"
"응? 아, 엄마 초능력이야."
"진짜?"
"그럼."
하은이가 또 초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른다. 김애경이 난처한 얼굴로 김현을 보았다. 김현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야 웃으며 마술사 장난치듯 빛과 얼음을 하은이에게 보여주었다.
살며시 휠체어 바퀴를 끌었다. 운무귀가 남긴 잔해로 다가서면서,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태연해.'
아무리 축복을 받았어도 하은이가 잘 웃고 쾌활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 세상이 무채색이고 괴상한 괴물까지 나타났으니 울고 무서워해야 정상인데도.
일단 유명계를 벗어나고 생각하도록 하자. 이세희에게 부탁해 잔해를 뒤지게 했다. 모래 더미 같은 잔해에서 작은 은빛 돌이 하나 나왔다. 별의 관찰이 재빨리 돌에 숨어 있는 성혼을 파악한다.
[유령탄(유명, 2★)]
원 역사에서는 박준이 얻었던 성혼.
파멸권 김애경, 신의 신필종, 유령 사냥꾼 박준.
이 3명이 피의 금요일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나머지, 거의 1천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 그래서 더 충격이었고, 이 세 명은 향후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의 각성자를 대표하게 된다.
김현은 은색 돌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성향이 전혀 다르니 당연한 일.
'서리거인이랑 성스러운 축복만으로는 부족해.'
황혼의 일격이 서리거인으로 바뀌었다는 게 크다.
두 성혼을 비교하면 서리거인이 조금은 우위. 다만 유령 대상 한정으로 황혼의 일격이 더 효과적이다. 황혼의 일격은 불과 용암의 속성을 지녔으니까. 유령들을 얼음으로 때리는 것보단 불로 지지는 게 낫지 않겠나.
그렇다면 보조적으로 공격할 수단이 필요하다. 아니, 원 역사에서 유령탄이 그랬던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찔끔찔끔 주의나 끄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뜻.
돌을 매만졌다. 앞으로 있을 일을 그려본다.
서리의 힘을 휘어 감고 돌진하는 김애경. 흐드러지게 빛나는 성스러운 힘. 그리고 그 앞에서 일렁이는 잔혹한 어떤 그림자......
김현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
'희생은 불가피해.'
하긴 원 역사에서도 각성자 여섯이 덤벼서 셋이 죽었다. 아무리 공략을 알고 있어도, 인류 저항군 총사령관의 영혼을 담고 있어도 한계는 명확했다.
힘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다른 각성자들을 모집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만큼 시간이 더 소요되고 설령 영입한다 한들 나중에 문제가 되니 꺼려졌다. 김현은 신필종과 박준이 끝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고심 끝에 마음을 결정. 자신을 보고 있는 김애경과 이세희에게 한 번씩 눈길을 준 다음 그대로 입에다가 돌을 털어 넣었다.
이어서 이해 못할 짓을 저지른다. 과도를 들어 입에다 쑤셔 넣고 마구 휘저은 것. 간신히 아물어가던 입 안이 또 만신창이가 되었다.
"야! 또 왜 그래?"
"기, 김현 님!"
두 여자가 비명을 터뜨린다.
침착한 것은 하은이 하나가 전부. 무슨 일 있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김현을 주시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문은 뒤로 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한다.
입에 넣은 돌이 점차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여타의 성혼이 그러하듯 김현의 피에 반응하는 것.
인간의 피, 그것도 당사자의 피야말로 성혼을 흡수할 때 쓰기 가장 좋은 매질.
충분히 입 안에서 굴리면서 각성할 성혼을 고른다.
'내 성향은 요정과 환수, 이 둘이었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환수다. 요정의 불꽃보다는 환수의 화염이 유령들에게 더 효과적이니까.
자연히 한 환수를 연상하게 된다.
붉은 깃털, 창천을 노니는 날개, 고고한 울음.
주작(朱雀).
남방의 수호신이자 불새인 주작이라면 황혼의 일격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작의 성혼을 얻는다 해도 문제. 휠체어 신세를 지는 상태에서 뭘 어쩐단 말인가. 휠체어 타고 다가가서 과도를 휘둘러? 돌멩이를 주워서 던져?
방법은 하나 뿐.
'미끼가 되자.'
옛 사냥꾼들은 사냥을 할 때 함정을 주로 썼다고 한다. 그만큼 자주 쓴 게 독이 든 미끼였다. 활이나 창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품을 뒤적였다. 아까 박경자 빙의귀를 잡고 나온 가죽 지갑을 꺼낸다. 왼손을 지갑 위에 포갠 후 과도로 단번에 내리찍는다.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이세희가 울음 섞인 투로 외친다. 얼른 달려들어 말리려는 것을 김애경이 막았다.
"그냥 보고 계세요."
"하지만......"
"뭔진 몰라도 생각이 있을 거예요."
김애경은 김현을 믿었다.
어제까지의 김현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나서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김현이라면, 자신만만하게 길을 인도하던 김현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 그럴까요?"
이세희가 멈칫했다. 김애경이 고개를 힘껏 끄덕인다.
"그럼요."
그 사이 김현은 지난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번 각성은 힘겹고도 어려웠다. 이미 포화 상태인 상황에서 억지로 새로운 성혼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바탕이 되는 성혼도 성향이 전혀 맞지 않았으니.
특별한 촉매나 기기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아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100% 실패했겠지.
"후우."
몇 분간의 혈투 끝에 짧은 한숨을 토했다.
부상이 채 회복되지 않았다. 벌린 입 옆으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현 님! 괜찮으세요?"
이세희가 급히 달려왔다. 붕대도 뭣도 없지만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아주고 상처 입은 손도 잘근 싸매주었다.
"감사합니다."
김현은 자신의 손을 보고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성혼] 기린의 생명(환수, 3★)
유령탄을 기본으로 하여 대지의 인내로 방향을 틀어 새롭게 성혼을 고정시켜 각성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
[혼력] 12
새로운 성혼도 성혼이거니와 기존에는 8에 불과하던 혼력이 12까지 상승했다. 이만하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모두 김현이 의도한 대로.
슬슬 이 괴상한 세계를 탈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
"말씀하세요."
"지금부터 이 세계의 지킴이를 잡으러 갈 겁니다."
"지킴이?"
생소한 단어에 둘이 의문을 표했다. 김애경의 손을 잡고 있던 하은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지킴이가 뭐야?"
"글쎄. 삼촌이 알 것 같은데?"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야.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축이기도 하고. 지킴이를 잡으면 모든 게 끝나. 세계가 붕괴하면서 지구로 돌아가는 거지."
"뭐? 진짜?"
"정말이에요?"
김애경과 이세희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반면 하은이는 여전히 아리송한 낯빛이었다.
"엄마, 뭐가 끝나?"
"응, 곧 집에 갈 거야. 하은이도 좋지?"
"대공원은?"
"어...... 그럼, 그럼. 대공원도 가야지."
"신난다!"
하은이가 좋다고 방방 뛰었다. 김애경이 흐뭇하게 그걸 지켜본다. 이세희도 옅게 미소를 지었지만 김현만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잡을 지킴이는 혈귀라는 놈입니다. 좀 괴상하게 생긴 놈이라서 보면 놀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알았어. 어떻게 하면 돼?"
"누나는 그냥 초능력 쓰면서 혈귀랑 싸워. 그러면 돼. 대신 센 놈이니까 절대 방심하지 말고. 한국 챔피언이랑 스파링한다 생각하고 싸우란 말이야."
"한국 챔피언? 장난 아니네. 알았어."
"그리고 선생님은 저랑 누나, 하은이한테 초능력 쓰시고 뒤에 물러나 계세요. 그러다 제가 신호하면 아까처럼 초능력 날리는 겁니다."
"네! 맡겨만 주세요!"
이세희가 주먹을 꼭 쥐고 의지를 다졌다. 하은이가 옆에 다가와 매달린다.
"삼촌. 나는, 나는?"
잠깐 고민하다 임무를 주었다.
"하은이는 여기 간호사 선생님 지켜드려. 알았지?"
"엄마 지키면 안 돼?"
"엄마가 하은이보다 세잖아."
"우웅...... 그럼 간호사 선생님 지킬래!"
하은이가 이세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세희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김애경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 출발하죠."
목적지는 병원장실.
두어 시간 안으로 세계의 지킴이 혈귀와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유명계의 사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