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상실 –1-
병원장실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왜곡된 공간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고 중간에 귀신들도 여러 번 마주쳤다.
가장 큰 문제는 유령들. 이젠 시간이 꽤 흘러서 그런지 빙의귀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유령도 출현했다. 방금도 칼날 귀신과 얼음 귀신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것.
김애경의 서리거인, 이세희의 성스러운 축복이 없었다면 골치 아팠겠지.
"으, 따가워."
김애경이 왼쪽 팔뚝을 어루만졌다. 칼날 귀신의 공격을 막느라 꽤나 아픈 모양. 하은이가 부리나케 달려와 김애경의 팔뚝을 어루만지는 시늉을 했다.
"엄마, 쎄~ 쎄~"
"어휴, 그래. 엄마는 우리 하은이밖에 없어."
"언니. 초능력 다시 걸어드릴까요?"
"아냐. 아직 괜찮아. 조금 쉬면 좋아질 거야."
어느새 둘은 말을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고생하다 보니 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김애경이 기운차게 팔을 흔들었다. 공격을 막을 때 서리거인을 발동한 까닭에 그저 약간 따끔한 정도였으니까.
하은이가 익숙하게 유령 잔해를 헤집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젤리 같은 걸 찾아내서 김현에게 가져오더니 개구지게 웃는다.
"삼촌! 나 잘했지?"
"그럼, 그럼. 우리 하은이가 최고다."
이로써 새로 얻은 성혼은 다섯 개.
빛의 화살(광명, 1★), 섬뜩한 손길(유명, 1★), 초혼(유명, 1★), 영혼 탐색(유명, 1★), 혼의 벽(유명, 1★)
빙의귀들은 다양한 성향의 성혼을 떨어뜨리지만 일반 유령들은 대개 유명계 성혼을 남긴다. 그래서 5개 중 4개가 유명 성향 성혼이었다.
김현에게도 김애경에게도 쓸모가 없지만 나중에 재료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대지의 인내가 그러했듯이.
"저기 뒤가 병원장실이에요."
지금 일행은 어떤 개울 앞에 서 있었다.
개울이 성벽이라도 된 걸까. 그 너머가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심지어 가까이 가려고 하면 무형의 힘 같은 게 살며시 밀어냈다.
힘이 강하진 않으니 뚫으려면 뚫을 수 있으나, 힘에 접촉하기만 하면 정체불명의 혐오감과 두려움이 몰려온다.
죽음에 대한 생명체의 본능적인 공포라고 해야겠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김애경과 이세희를 보며 물었다.
"갈까요?"
"가자. 난 준비됐어."
"저도요."
진입에 앞서 다시 축복을 돌리는 이세희.
후끈한 열기가 심장에서 피어오른다. 그것을 붙잡고 개울을 넘었다. 끈적끈적한 기운이 전신을 옥죄더니, 거뭇한 어둠이 시야를 온통 장악했다.
또 내딛는 한 걸음.
시야가 확 트이며 괴상하게 급변한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하늘에 빗살무늬 회색 구름이 마구 떠 있다. 흰 태양은 하늘을 다 집어삼킬 듯하다. 비석 같은 바위산이 세계를 우르르 감쌌다. 그 와중에, 저 멀리 보이는 작은 호수가 비릿한 내음을 뿌려대고 있었다.
이세희가 생경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본다.
"이게, 이게 대체......"
평범할 뿐인 원장실이 이리 바뀌었으니 괴상하겠지.
검은 하늘은 벽지요, 회색 구름은 벽지의 무늬다. 흰 태양은 원장실 한쪽에 놓인 프리젠테이션 스크린이었다. 바위산은 탁자 주위 의자였고 호수는 탁자 중앙의 어항이었다.
어항.
침식 사태가 벌어지기 전 병원장이 구해온 물건.
유독 찬란한 은빛을 뿜는 게 마음에 들어 장식을 했는데, 어항의 성혼이 하필 병원 내의 다른 성혼과 공명하면서 이번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어쨌든 좋다.
김현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하세요. 곧 나옵니다."
구그그긍.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운무귀 때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보다 더 요란스럽다는 점.
바위산이 우르르 무너진다. 태양은 조각난다. 구름이 깨지며 흩어진다. 그 와중에 오롯이 고요한 곳이 있었다.
호수.
기이하게도 물방울 하나 찰랑이지 않는다. 수면에 이는 파동조차 없다. 낮게 침묵하며 섬뜩한 비린내만 사방에 풍겨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동이 멎었을 때.
그것이 출현했다.
푸화학!
호수 전체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제멋대로 찰랑거렸다. 그러더니 조금씩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저것은 사람인가, 아니면 물고기인가.
물고기와 사람을 합쳐 놓은 듯한 괴물. 전신이 부정형이라 쉬지 않고 출렁인다. 가끔은 몸에서 물방울이 빠져나와 주변을 부유했다가 제 본체로 돌아간다. 밟힌 지렁이 꿈틀대는 듯한 그 기괴한 모습에 절로 욕지기가 쏠린다.
[음흣흣흣......]
흐물거리는 웃음소리.
김현은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전생의 아론에게는 흔하디흔한 잡몹이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다르다.
처음으로 만나는 3성 괴물, 본격적인 유명계의 주민.
놈이 눈을 떴다. 아니, 얼굴 부분에 잠깐 눈 같은 것을 만들었다가 없애 버렸다. 눈이 배에 생겼다가 손에 생겼다가 하면서 이쪽을 쳐다본다.
[음흣흣, 고깃덩이들!]
외마디 괴성과 함께 포탄처럼 날아온다.
"어딜?"
김애경이 몸을 날렸다. 꽤 익숙해진 서리거인을 발현한다. 주먹만이 아니라 전신에서 창백한 광채가 쏟아졌다. 팔을 X자로 교차하여 혈귀의 앞을 가로막았다.
찰싹!
혈귀가 김애경을 들이받자 기이한 소리가 터졌다. 김애경이 공중에서 쭉 물러난다. 혈귀가 그런 김애경을 보고는 음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음훗훗훗......]
이미 일이 끝났다는 듯 음흉한 태도. 자연히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혈귀를 노려본다.
"어, 언니!"
별안간 이세희가 비명을 질렀다.
"응? 왜?"
김애경이 이세희를 돌아볼 때 이변이 일어났다. 김애경의 몸 전체에서 검은색 액체 같은 게 뿜어진 것이다.
혈귀가 가진 힘 중 하나.
체액 폭발.
돌진 시 남긴 자신의 몸을 이용해 상대를 터뜨려 죽이는 악랄한 수법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바로 이것 때문에 각성자 둘이 연달아 죽었다.
하지만 이때, 김현은 냉랭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액체를 따라 백색 빛이 흘러나왔으니까.
성스러운 축복이 지닌 빛.
빛은 혈귀가 남긴 사악한 힘을 남김없이 분쇄했다. 덕택에 김애경의 몸이 잠깐 흔들리다 말고 안정을 찾는다. 괜히 천상 성향 성혼이 유명계의 천적이 아닌 것이다.
[고깃덩이가!]
혈귀가 상황을 깨닫는다. 그리고 재차 허공에서 몸을 꿈틀거린다.
이어지는 변형.
거대한 송곳이 완성된다. 그 상태에서 김애경을 꿰뚫었다.
"언니!"
애타게 부르짖는 이세희. 거대한 송곳 앞에서 김애경은 너무나 가녀리고 연약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김애경은 이세희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날아오는 송곳을 힐끗 한 번 보더니 슬쩍 몸을 기울인다. 이어 옆으로 비껴 뛰어오르며 송곳의 정면이 아닌 측면을 콱 발로 차 버렸다.
푸콱!
혈귀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김애경도 타격이 없지는 않았는지 얼굴을 찌푸린다. 힐끗 보니 구두가 벗겨지고 하얀 양말이 다소 검게 물들어 있었다.
'치유 계열 성혼이 없으니 문제네.'
본래 지금 시점에서 3성 괴물은 치료를 받아가며 장기전을 치러야 한다. 혈귀를 단숨에 잡을 정도로 일행의 공격력이 강하지가 않으니까.
방법은 하나. 미리 생각해 두었던 걸 실행해야겠지.
과도를 꺼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아무도 김현이 뭘 하는지 몰랐다. 이세희의 옆에 서서, 호기심어린 눈빛을 반짝이는 하은이를 제외하면.
[음훗훗!]
혈귀가 또다시 공중으로 비약한다. 이번에는 X자형 칼날로 변형한다. 송곳은 옆을 칠 수 있으나 X자형 칼날은 힘들 거라는 계산 때문에.
쌔애액!
피의 질주를 시작할 때 김현의 노림수가 작렬했다. 자신의 왼손에다가 과도를 박아 버린 것이다. 기린의 생명을 각성하면서 꿰뚫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후욱, 하고 피비린내가 풍겼다.
보통 피가 아니다.
일부러 기린의 생명을 집중시켰다. 그 풍요로운 힘이 몽땅 담겨 있었다.
유명계 주민에게는 최고의 진미이자 영혼을 뒤흔드는 유혹.
혈귀가 덜커덕 정지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더니 눈을 뜬다. 머리, 몸, 팔, 다리, 꼬리, 아가미 할 것 없이 눈알이 만들어져 김현을 돌아본다.
자연히 김애경과 이세희도 혈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 김현이 있는 걸 보고 김애경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어느새 김현은 이세희와 하은이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혈귀의 공격을 유도하기에 최적의 위치. 휠체어에 앉은 앙상한 몸이 곧 닥칠 혈귀 앞에서 너무나 무방비해 보였다.
김현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다만 이세희를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들어 자기를 가리킨다.
원래 같았으면 의미를 몰랐을 손짓. 하지만 미리 언질을 준 탓에 이세희도 김현의 의도를 깨닫는다. 혈귀가 날아드는 그 순간 이세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쌔액!
혈귀가 공간을 가로지른다. 약해 보여서 그랬는지 변형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형, 혹은 물고기 형태 그대로 달려들어 김현의 왼팔을 와작 깨물었다.
"크윽!"
저절로 신음이 터진다.
상어 이빨 같은 치아로 김현의 왼손을 곱씹는다. 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일부러 통각을 자극하는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김현의 대뇌를 침습했다.
[움흣흣흣.]
동시에 뇌리를 관통하는 음울한 웃음소리.
보통 사람 같으면 이 통증 때문에 쇼크사 했을 터. 그러나 단련된 사령관의 정신은 이때에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되레 더욱 혼력을 끌어올려서 맛좋은 피를, 기린의 생명을 혈귀에게 부어준다.
혈귀가 반색을 했다.
어디 가서 이런 최상급의 피를 맛보겠나? 3성 괴물 주제에?
눈이 노곤하게 풀린다. 하나둘 사라진다. 종래에는 머리에 남겨둔 눈만 졸린 듯 껌뻑거리고 있었다.
김현이 노렸던 시간.
크게 소리친다.
"지금!"
"이이익!"
이세희가 악을 쓰며 성혼을 발휘했다. 강력한 축복이 강물처럼 쏟아진다.
전신에서 충만히 피어오르는 온기, 희열, 백광......
몽땅 퍼붓는다.
남의 힘이지만 내 힘처럼 이용한다. 기린의 생명에 더해 성스러운 빛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전신의 혼력을 몽땅 쥐어짜서 왼손으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혈귀가 그걸 온통 섭취하게 된다.
[으헉?]
처음으로, 당황한 감정이 흘러나온다.
머리를 흔들러 왼손을 뱉어내려 했으나 김현이 한 발짝 더 빨랐다. 미리 오른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힘껏 찔렀다. 충격과 공포로 뜨여 있던 눈을 과도가 제대로 관통했다.
"크아아아!"
세차게 터지는 비명.
그냥 물리적 공격이면 무시하면 된다. 문제는 과도에도 축복이 어려 있었다는 점. 이세희의 축복을 자기 것처럼 쓴 공격이 여기에도 작렬했다.
혈귀가 길길이 날뛰었다. 몸을 세차게 돌리자 김현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훨훨 날아간다. 그 뒤로 검은 액체가 길게 뿌려졌다.
"현아!"
김애경이 고함을 지르며 쫓아온다.
그 순간 김현이 머리를 들었다. 얼음장 같은 눈이 김애경을 주시한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김애경이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김현이 눈으로 외치고 있었다.
'가! 싸우라고!'
"씨발!"
욕설을 뱉으며 몸을 돌리는 김애경.
혈귀가 보인다.
발광하고 있다. 몸이 마구 변형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몇 개로 쪼개졌다가 합쳐지는 것을 반복한다. 그 와중에 언뜻, 혈귀의 머릿속에서 핏빛 구슬 같은 게 엿보였다.
이 흑백의 세상에서 홀로 빨갛게 빛나는 구슬?
여기까지 왔으면 김애경도 이게 보통 물건은 아니라는 것쯤 눈치 채게 된다.
몸을 날려 혈귀에게 연타를 먹였다.
"크아악!"
폭풍 같은 연격이 쏟아졌다. 주먹이 머리를 쪼개고 발차기가 몸을 부수었다. 혈귀가 간간히 반격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김애경이 터프하게 몸으로 받아냈으니까.
여기에 축복까지 쏟아지면 더 그렇다. 이세희의 두 손에서 빛의 멍울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결국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머리의 핵이 뽑히는 신세가 되었다.
[원통하다......]
그 말만 남기고 사라진 혈귀.
김애경과 이세희가 날 듯이 김현에게 달려왔다.
"야! 괜찮아?"
"맙소사, 이걸 어떻게 해요?"
둘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김현을 본다.
김현의 왼쪽 팔......
팔꿈치 조금 아래부터 송두리째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