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상실 –2-
졸지에 외팔이가 된 것.
하반신 마비로도 모자라서 외팔이라니?
하지만 김현은 웃었다.
아무도 안 죽고 혈귀를 잡았으면 됐다. 잘린 팔 정도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다. 의수를 만들어 달든, 충왕계의 지식을 응용해 재생시키든 간에.
"난 괜찮아. 곧 좋아질 거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정말 어쩌려고 그래."
김애경이 토해내는 말에 울음이 어려 있었다. 하은이가 징그럽지도 않은지 김현의 상처 근처를 어루만지는 시늉을 한다.
"삼촌, 쎄~ 쎄~"
"그래, 그래. 고맙다."
"김현 님. 지혈이라도 해드릴게요."
부우욱!
이세희가 자기 간호복 밑단을 찢어 김현의 상처를 지혈해주었다. 축복도 다시 써주면서 살짝 더듬어보더니 당황한 눈으로 김현을 본다.
"골절도 있는 것 같은데요?"
어디 왼팔뿐이겠나. 몸 구석구석이 아프다.
왼쪽 어깨, 옆구리, 장딴지......
최소한 서너 군데는 더 부러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뜻.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세요."
덩달아 고개를 드는 둘.
"세계가 복구되고 있습니다."
검기만 하던, 먹물 색깔을 연상시키던 하늘이다.
거기에 금이 갔다.
어스름한 쪽빛 하늘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파도가 밀려오듯 슬금슬금 세상을 장악해 나간다. 그에 따라 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색이 돌아온다. 차갑던 대기가 달구어진다. 지금도 사방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던 귀곡성이 뚝 끊어진다.
하은이가 펄쩍펄쩍 뛰었다.
"대공원 간다, 대공원!"
아울러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멀찍이 펼쳐져 있던 바위산들이 급격히 거리를 좁혀오는 것. 더구나 크기가 작아져 의자로 바뀌니 공간 감각에 혼동이 온다.
김애경과 이세희가 어지러운지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들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과도와 혈귀의 핵을 수습했다.
지금은 벌건 빛깔이지만 곧 은색으로 변할 물건.
[영혼 포식(유명, 3★)]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다. 원 역사에서는 박준이 얻어 유령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는데 한몫을 했지만 성향 자체가 다르지 않나.
어느새 어스름한 빛이 대지 전체를 물들였다. 잠시 후, 일행은 난장판이 된 병원장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껏해야 10평 남짓한 병원장실. 이 작은 곳이 방금 전에는 그렇게 커다란 대지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기 봐요!"
이세희가 탄성을 질렀다.
병원장실 탁자 중앙에 깨진 어항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어항이 담고 있는 물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몸통이 이어져 커다란 생선 같은 게 탁자 위로 길게 누워 있었다.
사람보다는 확연히 작은, 10살 어린이 정도 크기에 팔과 다리가 달렸으나 머리는 물고기를 닮은 괴물.
"혈귀입니다."
"저게요?"
"네. 현실로 돌아오면서 정체가 드러난 거죠."
김애경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휠체어는 아까 박살이 나서 더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적당히 상태 좋은 의자에 앉는데, 이세희가 휠체어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가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세희야, 왜 그래?"
당장 밖으로 이동.
이세희가 겸연쩍게 웃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저것 때문에......"
그러면서 문 옆을 가리켰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 두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유명계에서 마주쳤던 칼날 귀신과 얼음 귀신. 다만 그때보단 덩치도 작고 생김새도 덜 흉측했다.
김애경이 그것들을 발로 툭툭 건드려 본다.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김현을 보았다.
"야, 혹시 빙의귀들도 이렇게 되는 건 아니지?"
유령들이야 원래부터 괴물이니 상관없지만 빙의귀는 사람이었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
"비슷해. 빙의귀 만났던 쪽으로는 안 가는 게 좋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니까."
"그렇구나......"
삐뽀삐뽀삐뽀.
말하기 무섭게 경보음이 울린다.
세상이 점차 밝아오는 것을 보면 새벽 5시쯤 된 듯 싶다. 경찰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인원을 급파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병원 앞을 계속 지키고 있었을 수도 있고.
이세희가 구해온 휠체어에 탔다. 지혈도 깨끗한 붕대로 새로 했다. 그 다음 병원 로비로 가기 시작한다.
원형 통로를 지나 2층쯤 내려가자 파리한 안색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 나왔다.
"끝난 건가?"
"귀신들 없어졌어?"
"살았다, 살았어!"
운이 좋은 자들이다. 빙의귀에게 당하지 않고 숨어 있었을 정도면. 그나마 9시간 남짓 갇혀 있어서 그랬던 거지 원 역사에서처럼 48시간을 넘었으면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여어, 살아 있었어?"
휠체어를 탄 털복숭이 아저씨가 김현에게 말을 걸었다.
낯이 익다. 재활 치료 시간이 겹쳐서 몇 번 대화를 나누곤 했으니까.
"운이 좋았죠."
김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느라 피에 젖은 왼팔 옷자락이 드러난다.
아저씨가 그걸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 자네. 어떻게 된 거야?"
"귀신한테 먹혔어요."
"뭐?"
"운이 좋았죠, 뭐. 팔 하나로 때웠으니까."
"자네......"
아저씨가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원형 통로를 다 지나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어느새 무장 경찰들이 들어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질서를 지키십쇼!"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줄을 서세요!"
"다치신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경찰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느꼈는지 부상자들부터 한쪽에 모으고 있었다.
당연한 일. 병원에 들어오는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을 테니.
"엄마, 저기."
하은이가 로비 어느 곳을 가리켰다.
원무과 복장을 한 무엇이 벽에 박혀 있었다. 액체 같기도 하고 젤리 같기도 한데 그 안에 살점과 혈액, 뼛조각이 둥둥 떠다녔다. 특히 머리 중간에 박힌 두 눈알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보지 마, 지지야. 지지."
"응, 지지야."
빙의귀의 흔적.
유전자 검사를 하면 신원을 알 수 있겠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느냐고?
이제 곧 터질 경찰의 호들갑을 들으면 알게 된다.
"팀장님! 팀장님! 여기 좀 와보십쇼!"
"뭔데 그래?"
"그게......"
"우웨웩!"
누군가 구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직감했는지 그제야 달려가는 경찰들. 김애경이 눈으로 질문을 던진다.
시체가 남은 거냐고.
살짝 머리를 끄덕이는 김현.
주위를 돌아보니 절반 정도는 유명계에서 생사를 달리한 듯 하다. 그 수만 해도 5백 명. 아무리 병원이 크다고 해도 5백 명의 시체는 장난이 아니다. 당분간은 이 문제로 떠들썩하겠지.
조금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상자를 분류하던 경찰에게 다가갔다.
경찰이 김현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거기 환자분! 잠깐만요!"
거의 구르다시피 달려와서는 김현의 상태를 확인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지, 이봐! 응급이야! 응급!"
이미 응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응급대원들이 달려오더니 김현을 당장 응급차에 싣는다. 자연히 김애경과 이세희, 하은이도 따라가게 되었다.
응급대원이 피에 물든 붕대를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파리하기만 한 김현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환자분,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괜찮아요."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아시겠습니까?"
"5월 5일이죠."
"여기가 무슨 병원이죠?"
"신촌 병원이잖아요."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100에서 7을 빼면 얼마죠?"
"93, 86, 79, 72, 65요. 다 외우고 있어요."
"아하하."
응급대원이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약간은 안심한 기색이 눈가에 감돌았다.
"상처가 크신대 의연하시네요. 혹시 출혈이 많으셨을까 봐 여쭤본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있는데, 그랬으면 당장 난리를 쳤겠죠."
여전히 간호사복을 입고 있는 이세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응급대원이 웃으며 긍정을 표했다.
"하긴 그렇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천천히 가겠습니다. 혹시 진통제 필요하십니까?"
"괜찮습니다. 견딜 만 해요."
"그러시다면야......"
이세희가 이미 진통제를 투약했다고 생각했는지 응급대원이 무던히 물러간다. 아울러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응급대원이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르릉.
응급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이세희가 응급대원들을 보더니 걱정 어린 투로 묻는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김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왼팔이 잘린 통증?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고통을 참는 것에는 이골이 났으니까.
기린의 생명 때문에도 그렇다. 기린의 생명은 흔히 말하는 재생 계열의 성혼이었다. 신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덕분에 고통을 참기가 더 쉬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벌써 5월 5일. 석 달이 조금 지나 8월 말이 되면 열여덟 세계가 도래한다. 22세기에서 세운 계획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
급선무는 몸을 회복시키는 거다. 최소한 걷고 뛰어야 능력치를 올려도 올리지 않겠나. 그러려면 당분간은 외팔이 신세로 지내야겠다.
'왼팔은 의수 쓰고 척수를 재생시키자.'
사라진 왼팔을 몽땅 재생시키는 것보다야 척수만 재생시켜 운동 능력을 되찾는 게 쉽다.
여기까지 결정을 하고 허리를 폈다.
어느새 인근 병원에 도착한 참이다. 응급대원들이 부산을 떨며 응급실로 김현을 데리고 들어갔다.
"좌상지 절단 환자입니다! 응급 처리해주세요!"
"환자 멘탈은?"
"얼럿해요!"
"확인하겠습니다!"
응급실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의사들이 김현에게 다가와 의식 상태를 확인한다, 동공에 빛을 비춘다, 수혈팩을 단다, 난리를 부렸다. 오로지 김현 혼자만 느긋했다.
"누나, 누나도 검사 받아. 선생님도요."
"응? 난 다친 데 없는데."
"아까 오른발 다친 거 다 봤어."
"어...... 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집에 가셔서 따뜻한 죽 같은 거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남자친구 있으면 남친 만나시고."
"아하하."
"밤에 혼자 주무시지 마세요. 가실 데 없으면 우리 누나랑 같이 자요. 절대 혼자 주무시면 안 됩니다. 혹시 밤에 뭐가 찾아오면 능력 써서 쫓아 버리고요. 대화 자체를 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얼굴을 붉히던 이세희다. 하지만 거듭 경고를 발하자 심각한 얼굴이 된다. 김현의 말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는 침식된 병원에서 수도 없이 체험했으니까.
김애경이 이세희를 툭 건드렸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자. 한 며칠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있었던 일, 말해봤자 누가 얼마나 믿어주겠어."
"그야 그렇지만...... 좋아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이세희는 집이 멀어 원룸에서 혼자 산다고 했다. 그래서 김현이 이리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혼자 밤을 보내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사실은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기왕이면 하은이한테 축복 계속 걸어주세요. 조금 걱정 되서요."
"그럴게요."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유명계에서 벗어난 이상 하은이가 빙의귀가 될 위험은 사라졌으니까. 축복을 건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안 거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 점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X-ray를 찍었다. 잘린 팔이 선명히 드러나자 담당 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응급 수술 들어가야겠는데요?"
기이하게도 절단 부위 외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
김현이 여기까지 오면서 몽땅 치료해 놓았으니까. 3성 성혼이 가진 힘이면 그 정도는 간단했다.
바로 수술 시작.
수술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끝이 났다. 절단 부위를 적당히 다듬기만 하면 되는 수술이었으니.
마취에서 깨어난 것은 밤 10시.
삐익, 삐익, 삐익.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올 초에 처음 입원했을 때 지긋지긋하도록 들은 소리.
주위를 둘러본다. 별별 의료 기기들이 작은 병실을 점령하고 있다. 손목에 부착된 관들 때문에 답답했다.
중환자실.
그 안을 살피던 시선이 한 곳에 가서 멈춘다.
뭔가 있었다.
희끄무레한 그림자 같은, 해골바가지의 형상을 한 무엇.
그것이 말을 건다.
[안녕하신가.]
김현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혈귀를 쓰러뜨렸을 때부터 기다렸던 존재. 유명계의 사자가 방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