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유명계의 사자
"누구냐?"
날카로운 물음.
해골바가지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내 유쾌하다는 감정을 전달해 온다.
[놀랍군. 경천지경의 성혼이 두 개라니...... 가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대영웅이야.]
경천지경.
유명계에서 분류하는 성혼의 등급 체계.
유효, 절정, 경천, 멸성, 구세.
각기 1성부터 5성까지에 대응한다.
새빨간 거짓말.
인류의 한계를 5성으로 규정짓기 위한 프레임에 불과했다. 사실 인류는 여러 기법과 개조를 통해 8성 성혼까지 각성이 가능했다. 전생의 아론도 8성 등급 각성자였으니.
일단은 티를 내지 말자. 김현은 살짝 혹한 표정을 지었다.
"경천지경이라니?"
[말 그대로일세. 극에 이르면 능히 하늘을 놀라게 할 성혼을 일컫는 말이라네.]
"어쨌든, 넌 뭐지?"
[이런, 이런. 소개가 늦었군. 워낙 감명을 받아서 말이야. 나는 유명계에서 백존님을 모시는 골귀(骨鬼)라고 하네.]
또 거짓말.
이 유령 또한 김애경의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당연히 어떤 존재인지 잘 안다.
골귀가 아니라 백흔귀(白痕鬼). 박준과 후원 계약을 맺지 못했다면 십 년 내로 사멸했을 존재.
김현은 백흔귀를 주시했다.
단순히 후원 얘기나 하고 계약이나 맺는 건 재미없다. 백흔귀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줘야 제 맛.
처음에는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골귀라...... 그래서 무슨 볼 일이지?"
[후후후. 날 봐도 놀라지 않는군.]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우선 감사 인사를 하겠네. 그대가 오늘 사악한 괴물 놈을 쓰러뜨려서 백존님께서 크게 흡족해 하셨다네.]
"네가 모신다는 그 백존이랑 그 괴물은 무슨 관곈데?"
[그대가 쓰러뜨린 괴물은 혈귀라 부른다네. 혈귀는 사악한 혈존의 부하이지. 우리 백존님과 혈존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거든. 그래서 그대를 치하하는 의미로 날 보내셨다네.]
내부 사정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백존과 혈존은 동일한 존재로, 흔히 백혈존이라 불렸으니까.
애초에 혈귀의 죽음을 바로 눈치 챈 게 당사자도 아니고 경쟁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전말은 이렇다.
성혼이 폭주하고 공명하면서 침식 사태가 벌어진다. 그 와중에 지킴이가 살해당하면 그 힘의 근원이 되는 존재들이 지구에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된다. 따라서 자기 사자들을 보내는 것.
어째서?
성혼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적인 어떤 것이 뭉쳐 빚어내는 힘이자 가능성, 그 자체니까.
2018년의 열여덟 세계 도래는 이리하여 벌어졌다. 그들이 노린 것은 성혼이고, 이를 위해 향후 수십 년 간 인류에게 공작을 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는 그들에게 휘둘린 까닭에 지구 전체가 성혼 채굴 기지이자 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흠, 그래?"
[그렇다네. 그래서 그대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
"뭐지?"
[우리 백존님은 그대 같은 대영웅을 숭앙하신다. 우리와 계약을 맺고 향후 그대가 획득하는 성혼을 우리에게 파는 것이 어떠한가? 단언하건대 우주의 보물들을 모두 안겨주겠네.]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
비망록에 수록된 내용과 토씨 하나까지 판박이었다.
김현은 생각에 잠긴 척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흔귀가 김현의 육체를 살피고는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지금 당장 그대의 하체를 치료해주겠다.]
"뭐라고?"
[다시 말하겠네. 제안을 수락할시, 그 즉시 그대의 하체를 치료해주겠네. 그대여, 대영웅이여, 다시 걷고 싶지 않은가? 딱 한 마디만 하게. 그럼 걸을 수 있어.]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
[저런, 손도 하나 없군. 답답하지 않나? 염왕귀수라도 하나 지원 받으면 그 답답함이 싹 사라질 걸세.]
염왕귀수!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되묻는다.
"그게 뭔데?"
[이것이라네.]
백흔귀가 허공에서 손 하나를 꺼낸다.
푸르스름한 귀화에 감싸인 손. 피부에 붉은 기가 돌아서 그렇지 완전한 사람의 손이었다. 손톱이 까맣게 물들어 있어서 조금 기괴해 보였다.
가짜를 들이밀 줄 알았더니 진짜 염왕귀수.
그 자체로 3성 등급 성혼을 내장하고 있으며, 마주치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고 망가뜨리는 힘을 가진 보물.
'배팅 좀 하는데?'
하지마비에 외팔이여도 3성 성혼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서 마음을 크게 먹은 모양.
[대영웅이여, 사라진 왼팔이 아리지 않은가? 염왕귀수는 당장 그대의 왼팔을 대체할 수 있다. 단련하기에 따라 경천급, 아니 멸성급 성혼의 힘을 내는 것도 가능하지. 이 손만 있어도 그대가 원하는 무엇이든 손에 넣게 될 걸세.]
이후로도 백흔귀는 김현을 끈덕지게 유혹했다.
노예가 필요하면 영혼의 낙인을, 재물이 필요하면 저승의 보석을, 권력이 필요하면 권력자에게 줄 선물을 가져다주겠다고.
어째 비망록에서보다 더 적극적인데?
금방 그 이유를 깨닫는다.
김현이 성혼 6개를 보관하고 있잖은가. 그것 때문에 더 유망해 보이겠지. 지금 시점에서 성혼의 가치를 아는 자는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백흔귀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도 더 그렇다.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몰랐지만, 백흔귀는 거둔 실적이 별로 없어 귀(鬼)급에서 령(靈)급으로 떨어질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까.
슬슬 시작해볼까.
"이봐."
[말해 보게.]
"백흔귀. 맞지?"
그대로 정지.
백흔귀가 얼어붙은 채 김현을 주시한다.
눈 부위에서 청색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난 골귀일세.]
"백흔귀. 거래를 할 거면 본인 소개부터 똑바로 해야지. 거래할 생각 없으면 관둬. 명월천이나 상산인과 대화를 하면 되니까."
공기가 차가워졌다.
단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기온이 내려갔다. 그만큼 백흔귀가 김현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
백흔귀는 한참 동안이나 김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흐릿한 턱을 덜그럭거리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알고 있잖아?"
[아니. 모른다. 어떻게 이제 겨우 첫 주기를 맞이한 행성의 원주민이 내 이름을 알 수 있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그렇겠지.
아무리 별의 관찰이 있다 해도 백흔귀를 둘러싼 보호막을 간파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4성 등급, 혼력과 통찰 능력치가 성장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김현의 입이 비틀어졌다. 한쪽 입 꼬리만 쭈욱 올리며, 마찬가지로 지금 시점의 지구인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를 늘어놓았다.
"백혈존 휘하 백혈군의 말예, 독립 현혼(現魂) 탐사대 소속, 카일린 행성 출신 백흔귀, 맞나?"
둘의 눈이 마주친다.
백흔귀의 시선이 아찔해졌다. 파랗던 안광이 까맣다 못해 심연의 것으로 변하여, 그 안으로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가 죽을 김현이 아니다.
되레 찬 눈으로 마주보며 또박또박 다음 말을 꺼낸다.
"아니면 카일린의 배신자, 디만 카이토 글레이스라고 불러줄까?"
[노옴!]
백흔귀가 노호성을 지른다.
기세가 좋았으나 그 뿐. 곧 다 타다 버린 잿불처럼 수그러들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것이냐......]
육체를 버리면서 함께 버린 이름.
모든 것을 버렸다.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옛 이름을 이깟 차원계 변방의 작은 행성에서 다시 들을 줄이야?
김현은 선언하듯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백흔귀, 나는 선지자다."
[뭐라고!]
대경실색하는 백흔귀.
선지자.
그 위대한 이름.
성혼이 꽃 피는 행성에 가끔 출현하는 자를 말한다. 단순한 예지 능력자나 투시 능력자가 아니다. 차원의 벽을 넘어, 허락되지 않는 진실을 훔쳐 보아야 비로소 선지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백흔귀가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던졌다.
[선지자라고, 네가?]
"믿기 싫으면 믿지 말고."
[이상하군.]
"뭐가?"
[내가 아는 선지자들은 자신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그게 유리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너는 네가 선지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지? 내가 존주께 네 존재를 보고하면 어찌하려고?]
그 말이 맞다.
모든 세계는 선지자의 존재를 경계한다.
성혼 개화 후 도래하는 세계의 의도를 아는 것은 선지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방해하면 성혼 채굴에 그만큼 애로사항이 꽃필 테고. 잘못 존재가 알려지면 암살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김현의 얼굴에 맺힌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백흔귀, 하나 묻지."
[말해라.]
"살고 싶지 않나?"
질문을 협박으로 받아들였는지 백흔귀의 안광이 더욱 퍼렇게 변했다.
[무슨 뜻이지?]
"생각해 봐라. 네가 내 존재를 백혈존, 아니 네 상관인 백마혼에게 알렸다고 치자. 그 공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 같아?"
[그것은......]
"선지자의 유무를 알아낸 것만 해도 큰 공이다. 그걸 넘어서 선지자의 정체를 알아낸 큰 공을 너 같은 귀급 유령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위의 혼급은? 천만에! 백마혼은커녕 백명신까지도 올라간다. 너한테는 성혼 부스러기 몇 개 떨어지는 게 전부야. 그거 가지고 살아날 수 있겠어? 백년 뒤에도, 천년 뒤에도? 백영귀한테 맞서서?"
[으으으.]
백흔귀가 작게 진저리를 친다. 다른 게 아니라, 백흔귀의 가장 큰 약점을 자극한 탓에.
백영귀.
카일린 행성 시절에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혈맹이었다. 그러나 유명계로 귀의한 후에는 가장 큰 경쟁자가 되었다. 지금은 철천지원수이고.
백흔귀가 백혈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달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뭐든 해서 성혼을 확보하여 살아남기 위함이지. 김현은 그걸 정확히 찔렀다.
[그래서?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잔뜩 지친 듯한 목소리.
"나와 거래하자."
[거래? 후원이 아니라?]
"그래. 다른 행성에서도 꽤 해봤을 텐데?"
[그 정도는 좋다. 후원이 가장 좋지만, 왕왕 거래 계약을 맺을 때가 있으니.]
"단, 수수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 직접 취급할 수 있는 유명계의 물건은 무조건 원가에 넘기고, 다른 세계의 물건도 최소한의 수수료만 붙여서 팔아."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백흔귀가 냉랭한 눈빛을 뿌린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게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백마혼께서 아시면 내 귀(鬼)로서의 자격마저 박탈당할 것이다.]
"아니지. 과연 그럴까?"
차분히 반박하는 김현.
"백흔귀. 네가 이렇게 곤궁한 처지가 된 이유는 딱 하나야. 성혼을 수급하지 못해서이지. 왜 그런 줄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결로부터 말하면 백영귀 때문이다. 백영귀가 백흔귀의 계약자와 거래자를 모조리 암살하는 것.
"나는 백영귀를 알아. 놈의 수법도 알고 성격도 알지. 그렇다면 문제. 백영귀가 날 암살하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내가 벌어다 줄 성혼이 네가 백마혼에게 내 존재를 알려서 얻을 상금보다 더 적을까 많을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백흔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 뿐.
김현은 침대에 편안히 기대어 누웠다. 말을 많이 했더니 조금 어지러웠다. 그런 김현을 백흔귀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흔귀가 거부하면 어쩌냐고?
뭘 어쩌긴. 대책은 이미 생각해 놓았다. 누구와 거래할 것인지, 앞으로 스며들 유명계의 비수에 대비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전부 다.
[하지만 수수료가 없다는 건 너무 불공정한 거래다.]
됐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 괜히 여기서 빈틈을 보여줄 수는 없잖아?
"너는 거래하는 성혼 자체가 실적이잖아. 수수료는 아무래도 좋은 거 아냐?"
[그야 그렇다만......]
"거, 밀어줄 때 크게 밀어주지 그래? 내가 잘 되어야 너도 잘 되지 않겠어? 나도 내 조건을 지켜주는 한 독점으로 거래할게. 1년 뒤, 2년 뒤를 생각해 봐. 내가 과연 어디까지 커 있겠어? 그때가 되면 오늘 나랑 거래하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될 걸."
백흔귀가 푸르게 점멸하는 눈으로 김현을 본다.
흐릿하고 아득한 안광. 김현을 보기는 보되 실은 그 미래를 짚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팍 하고 전깃불이 튄다.
허공에 맴도는 어둑한 웃음소리.
[그렇군...... 과연 그렇군...... 좋다. 선지자여, 그대와 계약하지. 그대가 원한대로 비밀을 지키고, 수수료 없이 유명계의 보물을, 최소한의 수수료로 이계의 보물을 거래하겠다.]
"좋아. 잘 생각했어, 동업자!"
[동업자? 그렇군, 우리는 동업자가 됐군. 잘 부탁하겠다.]
"나야말로."
악수 대신 눈빛을 교환한다.
오고 가는 웃음. 그러나 속내는 둘이 전혀 달랐다.
김현은 그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백흔귀는, 유명계의 사자는 미래에 반드시 배신한다.
거래한 성혼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한 다음에, 최소한 자기 공을 다 챙길 정도가 되기만 한다면 바로. 그때쯤에는 백영귀 정도로는 백흔귀를 위협할 수가 없을 테니.
'뭐 어때.'
기다렸다가 함정을 파서 싹 잡아먹으면 그만이지.
예측 가능하고 대비 가능한 배신은 굳이 피해 갈 필요가 없다. 그걸 빌미 삼아 상대방에게 뼈아픈 출혈을 강요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김현이 예측하기로는 백흔귀의 배신부터 외계종에 대한 반격의 서막이 시작될 것 같았다.
마음을 숨긴 채 첫 거래를 시작.
유명계 성혼 5개를 내놓았다. 모두 낮은 등급이지만 현 시점에서는 가치가 크다. 이렇게 구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유명계의 상부에서 백흔귀를 높이 평가할 테니까.
백흔귀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경천 등급이 하나, 유효 등급이 넷...... 정말로 대단하군! 어디 보자, 무엇을 주는 게 좋을까...... 그렇지. 반혼석 세 개를 주지. 어때?]
"필요 없어."
[그럼?]
"서리쇠, 화룡금, 전뇌 회로, 불사 진딧물, 기린의 흙이 필요해."
백흔귀는 새삼스런 눈으로 김현을 보았다.
'전뇌 회로로 척수를 잇고, 불사 진딧물과 기린의 흙으로 팔을 재생시킨다는 거지? 서리쇠와 화룡금이면 검을 만들어서 날만 세워도 상당하겠군.'
틀렸다.
김현이 요구한 물건은 의수의 재료였다.
전생에서도 한 동안 사용했던, 나중에는 장갑 멸망왕의 부품으로 사용된 그것. 당시 김현과 싸웠던 혼돈계의 괴물들은 김현의 의수를 두고 이렇게 불렀다.
붕괴의 손이라고.
물론 뼈대일 뿐이고 몇 가지 장치가 더 들어가야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이게 최선.
[좋다. 양은 얼마나 필요하지?]
"서리쇠 3kg, 화룡금 250g, 전뇌 회로 7더미, 불사 진딧물 2마리, 기린의 흙 600g이 필요해. 아, 추가로 환혼향 한 토막에 귀신 가루 한 줌도. 이 정도면 딱 맞지?"
환혼향과 귀신 가루는 김현이 아니라 하은이를 위해 필요하다. 빙의 상태는 풀어야 하니까.
[크흠!]
백흔귀가 허파도 없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만큼 김현이 제시한 분량이 수수료 포함하여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
[선지자는 과연 무섭군. 좋다. 여기 놓도록 하지.]
입을 쩍 벌리는 백흔귀. 거기서 온갖 물건이 쏟아진다.
쇠가, 금이, 회로 더미가, 꼬물거리는 진딧물은 물론 흙, 작은 나뭇조각과 정체불명의 가루까지.
마지막으로 작은 양초를 꺼내 건넨다.
[받아라. 혼의 초라는 물건이다.]
백흔귀가 허공에서 작은 양초를 꺼내 건넨다.
[언제든 초에 불만 붙여라. 그럼 당장 달려올 테니. 혹시 못 오게 되면 대리인이라도 보내지.]
"알았어. 다음에 보자고."
[건강해라. 죽지 말고.]
백흔귀가 휙 하고 사라졌다. 푸르스름하게 중환자실을 비추던 인광도 꺼져 버렸다.
"후우."
저승의 존재와 오래 접촉해서 그런지 꽤 피곤했다. 김현은 침대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늦은 밤이라 전화하는 대신 문자를 보냈다.
우선 김애경에게.
[누나, 내일 시간 비워 놔. 할 이야기가 있어. 하은이는 잠깐 집에다 맡겨놓고.]
이세희에게도.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시간 좀 내주세요. 저희 누나랑 같이요.]
처음 깨어난 순간부터 김애경에게 약속했던 사항.
진실을 알려줄 때가 왔다.
포장된 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