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재활 –1-
김애경이 눈을 부릅떴다.
놀란 것은 이세희도 마찬가지.
"하은이가요? 말도 안 돼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겠죠. 하은이가 빙의 상태라는 건, 제 초능력으로 알아낸 겁니다."
"예지몽이요?"
"아뇨, 제 성혼이요."
한 가지 사실을 더 공개하는 김현.
자신의 성혼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감정 계열인 별의 관찰과 재생 계열인 기린의 생명이 있다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김애경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고칠 수는 있어?"
"당연하지. 빙의 됐다고 해서 유명계 빙의귀들 생각하면 안 돼. 흔히 생각하는 빙의에 가까우니까."
"그럼 퇴마 의식 하면 없어져? 영화처럼?"
"비슷해."
"퇴마사들은 어디서 구하고요?"
"제가 하면 되요. 재료도 준비해 놨으니까."
영적인 종족을 상대할 때 퇴마 의식은 필수다. 김현은 그 방면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지식은 있었다.
백흔귀와 거래했을 때 왜 환혼향과 귀신 가루를 요구했을까. 바로 하은이에게 써먹기 위해서였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다.
"누나. 그런데 내가 퇴마 의식을 해도 하은이가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어째서?"
"유명계에 너무 오래 노출 됐으니까. 지금 하은이가 그냥 귀신 들려서 들떠 있는 거면 퇴마 의식만 해도 나아. 만약 그게 아니고 하은이는 잠들어 있고 귀신이 하은이 행세를 했을 때가 문제지."
"아......"
김애경도 대충은 알아들었다. 그런 종류의 설화가 아예 없지 않으니까.
이세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네. 있어요. 최악의 상황이 오면 선생님 힘이 필요합니다.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하은이는 저한테도 동생 같은 아인데......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게요."
제대로 인연을 맺은지 채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함께 사선을 넘고 참혹한 미래에 대해 들어서 그런지 적극적인 태도.
"잘못되진 않겠지?"
"걱정 마. 하은이는 누나 딸이지만 내 조카이기도 해.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어."
"그럼 지금 바로 가자."
김애경이 몸을 들썩였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집에 가서 하은이부터 챙기자는 태도.
"서두르지 마. 지금 밤이야. 귀신들 힘이 더 세질 때라고. 내일 낮에 시작하는 게 좋아. 정오, 그러니까 12시 반쯤이 좋겠다."
"후우, 알았어."
김애경은 하은이가 걱정되는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덩달아 옆에 누운 이세희도 잠을 설쳤다.
김현도 비슷했다.
육체가 느끼는 감정은 영혼과는 별개인 모양. 머리로는 별 게 아니고 무난히 해결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심장이 자꾸 두근거렸다. 끼무룩 잠이 들려다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쓴물에 화들짝 놀라 깨기도 했다.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다 가까워지고 날이 조금씩 밝아올 무렵. 배식차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이미 김애경은 자리를 비운 다음이었다.
"언니는 퇴원 수속 밟으러 갔어요."
"빠르네요."
"자기 딸 일이니까요."
결국 김애경의 성화로 그 날 오전에 퇴원하게 되었다.
주치의가 아직 퇴원하면 안 된다고 방방 뛰었으나 무시. 환자와 보호자 모두 강력하게 퇴원을 원하니 꼭 매일 내원하라는 말과 함께 약을 한 아름 처방하여 보내주었다.
물론 다 필요 없어서 약국도 들르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하은이가 답삭 안겼다.
"삼촌!"
"하하, 그래. 잘 지냈지?"
"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동물원 갔다 왔다? 좋겠지?"
"재밌었겠네. 뭐랑 뭐 봤어?"
"곰도 보고 원숭이도 보고, 또, 또......"
대공원 대신 동물원으로 적당히 입막음을 한 모양이다. 시간 관계 상 큰 곳은 못 갔겠지만.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졌다. 슬슬 시작해야 할 때. 김현이 눈짓을 하자 김애경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하은이에게 다가갔다. 하은이가 반응할 새도 없이 미리 준비한 밧줄로 꽁꽁 묶는다.
"어, 엄마!"
"하은아, 잠깐만 얌전히 있어."
이세희도 비장한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황금색 광채가 뿜어져 밧줄에 직격했다. 하은이는 놔두고 오로지 밧줄만.
"엄마? 언니? 삼촌! 왜 그래? 왜 그래?"
물색 모르는 하은이가 버둥거린다. 하지만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고작 5살짜리 어린아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울고 불며 난리를 쳐야 마땅한데 묘하게 침착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발연기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상황을 직감한 김애경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세희가 위로하듯 김애경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누구냐."
김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은이가 몸부림을 멈추더니 눈알을 굴린다.
"삼촌 조카잖아. 예쁜 조카 하은이. 정말 누군지 몰라?"
명백히 조롱하는 말투. 도저히 5살 꼬마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이, 이...... 너 누구야? 얼른 내 딸한테서 나오지 못해?"
당장 김애경이 폭주했다.
주먹을 하은이의 눈앞에 들이민다. 주먹이 시퍼렇게 달아오르며 허연 냉기를 뿜었다. 그게 얼음송곳이 되어 하은이의 미간을 겨누자, 하은이가 짤랑짤랑 웃었다.
"엄마, 그거 나한테 찌르게? 난 상관없지만 엄마 딸이 죽어도 괜찮아? 어휴, 불쌍한 하은이. 하은아, 너도 잘 알아두렴. 너는 네 엄마한테 죽을 운명이란다. 흑흑!"
"이익!"
김애경이 이를 갈았다.
"누나, 그만 둬. 귀신이랑 말싸움을 해서 뭐하게? 해봤자 입만 아파."
"입이 아프다고? 아, 맞다! 내가 진짜 아픈 거 보여줄까?"
하은이가 혀를 길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로 혀를 깨무는 시늉을 한다. 자연히 김애경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건방진 귀신 같으니.
김현은 미리 챙겨온 물건 하나를 꺼냈다.
작은 과도.
지금은 날이 다 나가서 써먹기도 힘들다. 다만 칼날에 흐르는 요요로운 빛이 인상 깊었다.
빙의귀들을 처치하고 혈귀의 눈에 박아 넣었던 물건. 유령을 십여 마리 이상 살해한 물건이라 어느새 유명계의 속성이 묻어 있었다.
하은이가 관심을 보였다.
"예쁜 칼이네. 근데 그걸로 뭘 하려고?"
"널 집어넣을 거야."
"어머, 내가 거기는 왜? 우리 이쁜 하은이를 놔두고 거긴 왜 들어가? 웃긴다, 너."
하은이가 빙글빙글 웃었다. 고양이 같은 웃음에 묘하게 소름이 끼친다. 김현은 천천히 이세희를 돌아보았다.
이세희도 준비해둔 것을 꺼냈다. 환혼향과 귀신 가루 한 줌. 그걸 본 하은이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뭘 하려고?"
대답할 필요 있나.
이세희가 정신을 집중했다. 성스러운 빛이 피어나자 환혼향에다가 가져다 댄다. 순수한 빛의 힘이라 시간은 오래 걸렸으나 결국 환혼향에 불이 붙었다.
묘한 파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냄새이면서 냄새가 아닌 무엇. 하은이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캬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 두지 못해? 네 딸년이 죽는 꼴을 보고 싶어?"
하은이가 머리를 마구 흔든다. 아예 바닥에 찧으려 해서 김애경이 급히 막았다. 급기야 하은이가 혀를 깨물었다.
김현이 손짓을 한 것은 바로 이때. 김애경이 하은이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이세희가 귀신 가루를 하은이에게 퍼 먹였다. 하은이가 어푸푸푸 뱉어내려 하나 불가능. 꼼짝 없이 잿가루 같은 걸 몽땅 삼키게 되었다.
"으으으......"
눈을 까뒤집는 하은이. 귀신이 순간적으로 기절한 것이다.
"제가 신호하면 축복 거세요. 그냥 거시지 말고, 발끝부터 위로 조금씩 밀어낸다는 감각으로요."
"네."
과도를 하은이의 입에 물렸다. 그 위험천만한 장면에 김애경이 까무러칠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하은이가 축 늘어졌다. 김현이 기다렸던 시간. 가볍게 손짓을 하자 이세희가 성스러운 축복을 발현했다. 미리 말했던 대로 발부터 시작하여 황금빛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큽! 크큽!"
하은이의 몸이 덜그럭거렸다. 그냥 떨리는 게 아니라 관절마다 실을 매달아놓고 인형처럼 흔드는 듯하다. 김애경이 울음을 삼키며 하은이를 끌어안았다.
발작은 10분 넘게 지속되었다. 특히 황금빛이 목 부분에서 무형의 벽에 막힌 듯 한동안 올라가질 못했다. 이세희가 피가 흐르도록 입술을 깨물며 힘을 쭉 밀어 넣었다.
성공.
빛이 들불처럼 번지며 하은이의 머리 위까지 도달한다. 하은이의 전신이 휘황하게 빛났다.
"다 됐어."
김현은 과도를 하은이의 입에서 꺼냈다. 허연 가루가 잔뜩 과도에 달라붙어 있었다. 비닐봉지에다가 대고 가볍게 털자 수명을 다 한 귀신 가루가 우스스 떨어진다.
하은이의 낯빛이 새하얗다. 이세희가 얼른 축복을 걸어보지만 무반응. 김애경의 얼굴이 파래졌다.
"하, 하은아!"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잠든 거야."
이세희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맥을 짚고 호흡을 확인하더니 걱정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왜 본인의 눈이 떨리는 것인가. 차마 김애경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우연히 김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힘없이 머리를 떨궈 버리고.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에 다 보이니까.
[상태] 혼미
혼미......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뜻.
유명계에서 너무 오래 있었고 정체불명의 귀신에게 너무 오래 빙의되어 있었다.
김현은 김애경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누나, 나만 믿어."
"우리 하은이, 괜찮은 거지?"
"그럼. 이세희 선생님이 치료할 수 있어."
"초능력이 안 통했잖아......"
울음 섞인 호소. 김현은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성스러운 축복은 안 통하지. 하지만 다른 성혼을 추가로 각성하면 어떨까?"
그 말에 김애경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다른 성혼? 다른 성혼이면 하은이를 치료할 수 있어?"
"응. 영혼 치료에 특화된 성혼을 수집하면 돼. 그리고 난 어디서 그걸 얻을 수 있는지 잘 알아."
원 역사에서는 신필종이 얻는 성혼이지만 뭐 어떤가. 성스러운 축복도 이세희가 가져간 마당에.
김애경이 눈물을 스윽 닦았다. 하은이를 껴안은 채 벌떡 일어난다.
"알았어. 바로 출발하자."
"워, 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철저하게 준비하고 들어가야 돼. 그리고 축복 걸려 있는 동안은 하은이한테 다른 문제는 안 생기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그래도 진정해야 돼. 누나가 우리 중에 최대 전력이야. 그렇게 급하게 굴다가 잘못되면 하은이는 어쩌라고? 지금 하은이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이세희 선생님 밖에 없고, 필요한 성혼을 구할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어. 그걸 명심해."
"하아......"
김애경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했다. 그런 다음에야 겨우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창백한 하은이의 뺨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일단 밧줄부터 풀고, 방에다가 눕혀 놓은 다음 다시 거실로 나왔다.
"계획은 있지?"
"응. 건국대 알지?"
"그럼. 요즘 뉴스만 틀면 나오잖아."
"거기에 우리한테 필요한 성혼이 있어. 1주일 뒤에 거기 들어갈 거야."
"1주일 뒤? 왜 그때야? 난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은데."
김현은 짧은 왼팔로 자기 휠체어를 툭툭 건드렸다. 외팔이면서 하반신 마비인 걸 어필한 거였다. 김애경이 용케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1주일 지난다고 뾰족한 수가 생겨?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세희가 밀어주면 되지 싶은데."
"그래요. 어차피 저는 초능력 걸어주는 거 말고 하는 일도 없잖아요."
역시 둘은 21세기의 상식에 얽매여 있다. 김현은 서늘하게 한 번 웃었다.
"1주일, 그거면 충분해."
"그러니까 뭐가?"
"1주일 동안 난 내 몸을 치료할 예정이야. 보고 놀라지나 마. 멀쩡하게 걷고 뛰어다닐 테니까."
한 줄기 놀라움이 둘을 휩쓸었다. 특히 간호사인 이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죠. 선생님이랑 누나만 도와주면."
"뭐든 말만 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려 할 때, 갑자기 섬뜩한 귀신의 울부짖음이 김현의 뇌리를 관통했다.
[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