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재활 –2-
갑자기 웬 귀곡성?
반사적으로 과도를 내려다본다.
짚이는 게 있었다.
고운 마음은 없다. 칼을 옆으로 잡고 휠체어의 쇠 부분에다가 힘껏 내리쳤다.
쨍!
[끼아악!]
재차 섬뜩한 비명이 들린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아, 귀신이 깨어난 것 같아서."
"귀신? 아, 하은이한테 빙의했던 놈 말야?"
"놈이 아니고 년 같아."
"그런 재수 없는 걸 왜 들고 있어? 버려."
"언니. 버렸다가 누가 또 귀신 들리면 어떻게 해? 차라리 용광로에 녹여 버리는 게 낫지. 나 알고 지내는 대장간도 있으니까 거기에 연락해볼게."
"맞아, 그러는 게 낫겠다."
하지만 김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왜?
과도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정보창이 대답이 되겠다.
[유령 깃든 단검(2★)]
2성 등급 물품.
대충 찌르기만 하면 영혼 피해를 입히는 물건이다. 특수한 성혼을 익히면 자유자재로 비행시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고. 곧 만들 붕괴의 손은 3성 등급이니 그보다는 떨어지지만 2성 등급도 나름 쓸 만 했다.
"보기엔 이래도 성능이 제법 괜찮아서 당분간 써먹으려고."
"위험한 거 아니에요?"
"소유주 정신이 약하면 잡아먹힐 위험은 있긴 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한테 그러면, 글쎄요.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김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원판 김현이라면 쉽게 잡아먹히겠으나 자신에서는 불가능. 만약 과도의 귀신이 그런 시도를 한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선생님. 알고 지내는 대장간 있다고 하셨죠?"
"어, 녹이시게요?"
"아뇨. 제 의수 좀 만들려고요."
"의수요? 차라리 병원에서 하나 구입하시는 게...... 요즘 의수는 꽤 좋아요."
"하지만 제 손처럼 쓰기는 힘들죠. 재활 치료도 오래 걸리고요. 또, 괴물들이랑 싸울 때는 무용지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절 믿으세요. 제 의수 보고 난 다음에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지나 마세요."
"에이, 설마요."
모두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이틀 후, 파주 월롱산 부근 한 대장간.
이세희의 인맥 덕에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소정의 금액을 주고 대장간을 하루 빌리기로 한 것.
전통과 현대가 혼재된 대장간이었다. 널찍한 공간에 화덕과 모루, 각종 연장이 놓여 있었다. 또 그 옆에는 풀무질 기계와 매질 기계가 놓여 있어 묘한 조화를 자아냈다.
"그래, 우리 세희 친구 분들이시라고?"
대장간 주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키는 작아도 몸이 아주 옹골찼다. 이세희의 삼촌뻘 되는 친척이라던가. 원래는 오늘 장소만 빌려주기로 했는데 부득불 자리에 나와 있었다.
"비슷하지요."
"흠, 빌려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망치를 쥘 수나 있겠어? 우리 세희는 당연히 아닐 거고, 그쪽 분께서 잡나?"
대장간 주인, 한철군의 시선을 받은 김애경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무술 유단자고 초능력자여도 의수 제작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새삼스레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의수는 누가 만드는 거지?'
그 동안 연달아 벌어진 사건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김현이 만든다고는 했으나 신체조건 상 무리 아닌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때, 김현이 휠체어를 끌어 앞으로 나섰다.
"저랑 누나가 같이 만들 겁니다."
"흐음, 둘이서? 뭐, 나야 세희 부탁도 있고 돈도 받았으니 할 말 없지만 정말 필요한 거면 차라리 나한테 의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대장간 일, 만만히 보고 덤비면 안 돼.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난감해진다고."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한철군이 뒤로 물러났다. 김애경이 다가와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야, 이런 말은 없었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쉬워. 망치질 할 필요도 없고."
"망치 안 써도 된다고?"
"응."
괜히 김현이 서리쇠를 붕괴의 손 기본 재료로 채택한 게 아니다. 만약 원 역사에서처럼 김애경이 황혼의 일격을 각성했으면 불티쇠를 구매했겠지.
"망치를 안 써서 만든다고?"
한철군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럴 거면 왜 여기 왔냐는 눈치.
잠깐 갈등했다.
작업하는 걸 보여줘도 되나 싶어서. 지금 있을 작업은 어디까지나 성혼을 이용하여 이뤄지기 때문이다.
"비밀입니다만."
"허 참, 뭐 대단한 걸 만든다고......"
"보시는 건 괜찮은데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가족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의수 말고도 만들어야 할 건 많다. 영입해야 할 인재 중에는 각종 기술자도 끼어 있었다. 이세희의 친척이면서 대장장이라면 영입해 볼 만하다.
특히 한철군의 눈.
덩치만큼이나 옹골찬 고집과 신념이 꽉 맺혀 있었다. 저런 자들은 믿어도 좋다. 전생에서의 경험으로 한철군을 믿어 보기로 했다.
한철군이 주먹코를 벌름거렸다.
약간은 빈정이 상한 듯.
"비밀을 지키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주 대단한 물건이거든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허허, 참! 이거 보니 허언증이 있는 친구고만. 뭐, 좋아. 역사고 뭐고 필요 없이 날 놀라게만 해도 비밀 정도는 지켜주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 번 보자고."
이제 아예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선다. 이세희가 왜 굳이 성질을 긁느냐며 등을 톡 친다. 가뿐히 무시하고 김애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애경이 짧게 숨을 들이킨다. 가지고 온 배낭을 바닥에 내린 다음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물을 본 한철군이 타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어?"
대장장이라 그런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
아직은 거기까지다. 본격적으로 나서 볼 생각은 없는 듯하다.
관심을 끄고 김애경에게 말했다.
"누나. 쇠부터 올려. 모루에다가."
"가열은 안 해도 돼?"
"응. 필요 없어."
서리쇠 3kg이 모루에 올라간다. 일반적인 철보다 밀도가 많이 낮은 터라 저걸 조각하면 사람 팔 하나 정도 되지 싶었다.
"이걸 봐."
김현은 스케치북을 하나 꺼냈다. 지난 이틀 동안 방에서 침식을 잊어가며 그렸던 설계도였다.
하나의 의수.
매우 정교했다. 생김새는 일반적인 사람의 손보다 조금 뭉툭하고 두꺼웠다. 언뜻 보면 의수보다 강철 장갑, 그것도 팔꿈치까지 가는 아주 두툼한 보호용 장갑에 가까워 보였다.
한철군이 참견을 했다.
"어, 장갑인가? 쇠로 장갑을 만들려고? 그러려면 주물을 해야 되는데 초보자들끼리 주물 하는 건 자살 행위야. 지금이라도 나한테 맡겨."
"주물 안 합니다. 변형할 겁니다."
"뭐?"
"누나. 쇠에다가 누나 힘을 주입해 봐."
"그래도 괜찮아?"
김애경의 눈이 뒤에 서 있는 한철군을 향했다. 김현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5일 뒤에는 다 알게 될 건데 뭘?"
"하긴 그렇다."
두 손을 서리쇠에 가져가는 김애경. 정신을 집중한다. 당장 시퍼런 빛이 일어나며 서리쇠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영화 CG도 아니고, 사람이 빛을 뿜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불퉁한 기색이던 한철군이 몸을 튕겼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김애경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리거인 성혼을 주입하자 기이하게도 서리쇠가 자기 몸처럼 변한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어때?"
김현이 서리쇠에 자기 오른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김애경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기는. 내 손 느껴지지?"
"맙소사......"
"어느 정도야? 누나 손을 만질 때랑 비슷해? 아니면 내 지문도 느낄 수 있어?"
"으...... 토할 것 같아."
당연한 반응이다.
서리쇠는 곧 서리거인의 살. 서리거인 성혼을 가진 김애경이 얼마든지 떡처럼 주무를 수 있었다. 감각도 인간의 육체보다 더 예민하게 느낄 거고.
김애경이 보기 좋게끔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제 이것처럼 만들어 봐. 쉬워. 생각만 하면 쇠가 변형되니까."
"으으, 속이 이상해."
"선생님. 누나한테 초능력 좀 걸어줄래요? 그러면 좀 나아질 거예요."
"알았어요."
이세희의 손에서 황금색 빛이 떠난다. 김애경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여기까지 보던 한철군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초능력자......"
한철군도 바보는 아니니 상황을 파악한 것.
돌아보며 한 번 웃어주었다.
"비밀은 지켜주시는 겁니다."
"아, 알았네."
서리쇠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네모나던 철괴에서 길쭉한 원기둥 형상이 된다. 이어, 한쪽으로 쇠가 이동하여 둥근 철퇴 같은 형상을 했다.
김애경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으, 이거 어렵네."
"처음이라 그래. 익숙해지면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그럴 걸."
"나보고 이 짓을 계속 하라고?"
"이걸로 누나 갑옷을 만든다고 생각해 봐. 엄청나겠지?"
"우웩!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무 민감한 감각 때문인지 질색을 한다. 사실 그거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안 되지만.
어느새 의수가 모양을 갖췄다. 다만 큰 틀에서 그렇다는 거지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많았다. 당장 관절도 재현이 되지 않았고, 화룡금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으니까.
"관절 만들자. 그냥 동그랗게 비워놓기만 하면 돼. 어어, 그건 너무 비웠다. 부피 조금 줄여 봐."
"이걸로 돼?"
"어. 어차피 섬세한 작업은 내가 다 하니까. 좋아, 거기까지. 이제 흙 넣자."
관절 부위에는 기린의 흙이 들어간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안 되고 화룡금이 함유되어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신경도 만들어야 되니까 구멍 뚫어. 이건 똑같이 만들어 줘야 된다?"
"뭐 이렇게 복잡해?"
"별로 안 복잡한데."
설계도 상 의수에는 팔뚝에서 시작하는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그것이 얽히고설키며 다섯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다. 감각은 필요 없으니 인체의 운동 신경 주행만 참고하여, 일곱 회로만으로 작동이 가능하게 간략화한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김애경은 진땀을 뺐다. 칼날처럼 예민한 감각에 몸서리쳐가며 작업을 했다.
그나마 통짜로 작업을 한 게 아니라 의수를 수평면(horizontal plane)으로 얇게 잘라 작업을 해서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틀린 점이 있으면 김현이 실시간으로 지적을 했으니까.
마지막 손가락 작업이 특히 어려웠다. 팔뚝에서는 통로가 송곳 두께였다면 손가락까지 가면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졌으니. 그때는 거의 두꺼운 종이 두께로 잘라야 했다. 그래야 붙였을 때 안 틀어지고 통하지 않겠나.
잘랐던 조각들을 다 붙인 다음 김애경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안 해. 아니, 못 해."
"수고했어. 이제 내가 마무리할게."
"마무리? 다 끝났다고?"
그럴 리가.
지금부터가 진짜다. 김애경이 한 건 하나의 틀을 만든 게 전부.
다만 아직은 육체적인 노동이 조금 필요한데......
이쪽을 귀신 보듯 쳐다보는 한철군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을 돌아보고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을 붙였다.
"아저씨, 조금 도와주실래요?"
"으응? 내가?"
"예. 제가 손이 이래서요."
앙상한 팔을 흔들자 김애경이 끙, 하고 일어섰다.
"됐어. 내가 할게."
"아냐, 누나는 고생했는데 쉬어."
"내가 해도 된다면 기꺼이 돕지."
어느새 태세 전환. 한철군이 바짝 다가왔다. 김현은 바닥에 놓인 화룡금을 가리켰다.
"저것만 화덕에 넣어서 녹여 주세요. 그리고 제가 말할 때마다 의수에 부어주시고요."
"그러면 되나?"
"그럼요. 흙도 중간에 넣어야 하는데 그건 제가 하죠."
의수를 일단 간이 틀에다가 고정했다. 화덕에 불을 지핀 다음 국자 같은 것에 화룡금을 넣어 가열한다. 열기가 훅훅 끼치면서 화룡금이 녹아 적금색 액체로 변했다.
"이거, 녹는점이 낮은가 본데? 벌써 녹는 걸 보면."
"그런 편이죠. 무르기도 엄청 물러요."
"금 같이 생겼어도 금은 아닌가 봐?"
"아니죠."
이윽고 화룡금이 완전히 액체로 변했다. 전뇌 회로 7더미를 녹인 다음 한철군에게 액체 금을 의수에다가 부을 것을 부탁했다. 기포가 생기지 않게, 또 기린의 흙에 충분히 흡수되도록 천천히.
한철군이 지상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심혈을 기울인다. 액체 금이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그어졌다. 그리하여 의수 내부를 꽉 채우는 동시에 똑 떨어졌다.
김현의 설계와 김애경의 재현 모두 완벽했던 것.
이제 마지막 단계.
불사 진딧물을 꺼냈다. 한 마리를 아직도 부글부글 끓는 액체 금에다가 집어넣는다. 잠깐 액체 금이 튀었다가 조용해졌다.
남은 한 마리는 입에다 넣었다. 단숨에 깨물자 머리가 아찔해진다.
"현아?"
"뭐, 뭐하세요?"
정보가 밀려온다.
끓는 금에서 발악하는 진딧물이 뿌려대는 정보가, 방금 전 터진 진딧물을 향해 마구 날아오고 있었다.
보였다.
회로가, 금빛 세상에 부유하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설계한 대로 배치한다. 김현의 강력한 정신력이 진딧물을 통해 중계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흐느적거리기만 하던 문양이 겹겹이 중첩되어 어떤 뜻을 나타냈다.
[연결, 통신, 수축, 이완, 접합, 폭주]
새겨진다.
전뇌 회로로, 화룡금에.
끓던 금이 차분히 굳어졌다. 금을 한껏 머금은 기린의 흙도 고무처럼 탱탱하게 변했다. 전뇌 회로의 힘이 서리쇠 표면까지 올라와 금빛 궤적을 그리며 내달린다.
이것으로 완성.
의수를 집어 휑한 왼팔에다가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