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서경태 –1-
생존자!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오늘은 2018년 5월 14일. 5월 4일 밤 8시에 침식이 시작되었으니 이 서경태라는 자는 거의 열흘 가까이 홀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리자 둘 다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게 가능해?"
"대단하네요. 그 사람도 각성자겠죠?"
"맞아요."
김현은 아까 스치듯 별의 관찰에 떠올랐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능력>
[이름] 서경태 [성별] 남성 [나이] 23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쇠약
[근력] 12 [체력] 12 [민첩] 11 [감각] 11
[혼력] 12 [의지] 11 [통찰] 10 [위엄] 10
[성향] 암흑
[성혼] 그림자 숨기(암흑, 2★), 어둠 질주(암흑, 2★)
2성 등급 각성자!
게다가 암흑 성향 은신 계열이다. 숨어 다니기에는 최적의 성혼.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겠다.
'건국대학교가 복구된 게 7월 초였지.'
원 역사에서 침식 세계에 진입하는 방법은 6월 말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그때만 해도 외계종과 거래를 통해 일일이 진입 장비를 구입해야 했으니까.
아무리 은신 계열 각성자라도 두 달이나 버티기는 불가능했겠지. 침식된 시간이 오래될수록 괴물들이 전반적으로 강해지니까. 3성 등급 각성자라면 몰라도 2성 등급 각성자이니 더더욱.
"그럼 저 분부터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죠. 열흘이나 혼자 계셨으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겁니다."
"찾을 수 있지?"
"글쎄."
전생에는 이런 상황에서 우월한 감각 기관으로 곧잘 흔적을 찾곤 했다. 별의 관찰 성혼은 흔적 추적에는 쓰기 힘들어서 자신하기 어려웠다.
스마트폰을 꺼낸다. 지도 어플과 블로그 검색 등을 이용, 건국대학교의 지도와 건물 내부 안내를 담아온 상태. 지금 위치한 신전의 내부를 유추해 보았다.
열흘 동안 생존하면서 가장 문제가 됐을 것은 역시 물과 식량. 서경태는 어디서 음식을 구했을까?
답은 매점이다.
'아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음식은 매점에서 조달한다 치고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인가. 매점은 평소 유동 인구가 많았던 만큼 천사들도 많이 이끌릴 텐데.
안내도를 훑어보다가 4층 구석에서 시선이 멎었다.
동아리방.
으슥한 곳에 위치한 그곳이라면,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일단 매점부터 들르죠."
"아, 그거 좋은 생각이야. 거기 가면 뭐라도 있겠지."
신전 내부는 꽤 컸다. 종합경기장 정도 수준이라고 할까. 다만 구불구불 미로처럼 형성되어 있어서 이동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갈림길을 잘 따라가서 매점에 도착. 들어가자마자 기이할 정도로 달짝지근하면서 풋풋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이거 무슨 냄새지?"
"썩는 냄새야."
"어? 정말?"
"응. 그리고 이거 독이니까 오래 맡으면 안 돼. 둘러보고 얼른 나가자."
매점은 커다란 연회장으로 변형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병풍처럼 칸막이가 있고, 칸막이 사이에 둥근 탁자가 놓여졌다.
그리고 음식물.
해진 김밥이 탁자 위를 굴러다닌다. 라면 국물이 바닥에 고여 있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눈살 한 번 찌푸리고 말았을 텐데, 기이하게도 유난히 맛있어 보였다.
"꿀꺽."
이세희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선생님. 조심하세요. 저거 천상계 환각 효과 때문에 맛있어 보이는 거지, 실제로는 다 썩은 음식이에요. 독도 들었고요."
"누, 누가 먹는대요?"
"지금 냄새도 다 왜곡된 겁니다. 축복을 다시 한 번 걸어주세요."
이세희가 경각심을 가지고 축복을 돌린다. 그제야 연회장의 광경이 실제에 가까워졌다.
향기는 악취로, 음식은 쓰레기로.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 빠르게 연회장 내부를 뒤졌다. 특히 개방된 주방 뒤쪽의 냉장고를 확실히 살폈다.
뒤진 흔적이 있었다.
'하긴 보존 식품 위주로 가져갔겠지.'
라면이나 과자는 모두 동난 상태. 남은 것이라고는 음료 몇 캔이 전부다. 가끔은 다급하게 움직였는지 바닥에 떨어뜨려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놓기도.
여기서는 더 볼 게 없다. 당초 생각했던 대로 4층 동아리실을 뒤지는 게 좋겠다.
"맛있는 냄새~"
"누구야? 누가 왔어?"
"이히힛!"
"맛 좋은 김밥♩ 맛있는 라면♪ 후식은 딸기우유♬"
왁자지껄한, 다소 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충 들으면 평범한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웃음소리.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노래랍시고 우렁차게 부르는 그 가락에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었던 것.
김애경이 김현을 돌아본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것들은 괴물, 쓰러뜨려야 할 존재라고.
"저, 저기......"
접근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이세희. 떨리는 손으로 연회장 출입구를 가리킨다.
네 명의 대학생이었다. 남녀 둘둘. 언뜻 보면 평범한 것 같지만, 관절을 묘하게 비틀어대며 걷는 그들. 찢어진 옷 곳곳에 금색 액체가 묻어나오고 두 눈은 어둑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다.
[천상 신도]
김현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전생의 지구, 천상계가 점령한 유럽에서 흔히 보이던 존재였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저렇게 변하여 성혼 채굴에 쓰였지.
성혼은 인간의 영혼에 자극을 받아 태어난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극적인 감정적 변화가 있을 때. 천상계는 이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했다.
친족 살해와 인신 공양을 통해서.
자유 의지? 천상 신도가 된 시점에서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천사 관리자들이 제 멋대로, 성혼 채굴에 도움이 될 정도로만 조절했으니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악몽이면서, 자살도 불가능했던 천상계 치하의 지옥.
저절로 주먹이 힘이 들어간다.
우우웅......
[뭐야, 왜 그래?]
치솟는 살의를 느낀 것인지 의수가 낮게 울어댄다. 탄띠에 걸어놓은 단검도 자극하여 귀곡성을 터뜨릴 정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어 발자국 떼어 앞으로 나아갔다.
신도들이 김현을 본다.
"맛있겠다!"
"치킨! 피자! 족발!"
"부먹찍먹?"
"오늘은 내가 쏜다!"
의미 없는 울음을 토하며 덤벼온다.
관리자가 없는 천상 신도의 전형적인 행태.
구해주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저들은 이미 천상계의 기운에 너무 깊이 침식되었고, 이 작은 세계의 핵을 깨뜨리는 즉시 혼백이 육체를 빠져나갈 테니까.
"명복을 빈다."
짧은 탄식.
돌진한다.
단련되지 않은 육체가 비명을 질렀으나 무시했다. 덜컥덜컥 팔을 휘두르는 남학생의 품 안으로 뛰쳐 들었다. 어느새 꺼내든 단검을 남학생의 목에다가 꽂는다.
[끼아악!]
귀신이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성스러움이 가득찬 천상계의 기운은 유명계 유령들에게는 천하진미나 다름이 없으니.
남학생의 눈에서 황금빛 기운이 꺼진다. 전신에서 힘이 풀리며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인다.
우연이었을까. 김현과 눈이 마주쳤다.
"고, 고맙......"
이어서 고꾸라지는 남학생. 빠르게 시체가 부패하면서 역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김현은 이를 악물었다.
총을 쏘는 대신, 김애경을 내보내는 대신 직접 돌진한 이유.
모든 천상 신도는 자의식을 유지한다. 족쇄가 된 육체 안에서 고통 받고는 있어도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악업을 기억하는 것.
특히 육체적으로 분쇄한다고 죽지 않는다는 게 문제. 가루로 만들어도 그렇다. 공급되는 천상계의 기운을 끊지 않는 한 그렇게 박살난 고통까지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
"현아......"
김애경이 김현을 부르지만 대답할 새가 없다.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다가와 두 팔을 내리친 것.
의수를 들어 막았다. 힘이 부족한 까닭에 뒤로 조금 밀린다.
그 힘을 오히려 역이용했다.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역수로 쥔 단검을 여학생의 오른쪽 목에다가 박았다. 여학생이 금색 피를 주르륵 흘리고는 시체로 변하여 쓰러진다.
이어서 남은 두 학생도 격파. 짧은 시간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가만히 실소했다.
'나한테 이런 열기가 남아 있었구나.'
저항군 사령관으로 십여 년을 투쟁하고, 모든 희망을 버리면서 다 꺼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기야 그랬으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시공의 문을 폭주시키지도 않았겠지. 평소에는 냉정해 보여도 속으로는 용암을 품은 게 김현의 본질이었던 것.
"괜찮아? 왜 그래?"
전에 없이 분노하여 뛰쳐나간 게 의외였던 모양.
"그 사람들, 살아 있었어."
"응? 뭐라고?"
"누나. 이 세계에서는 말이야, 죽어도 죽는 게 아니야. 세계에 가득 찬 힘 때문에 강제로 움직이게 돼. 자기 상처를 그대로 느끼면서, 자기가 뭘 하는지 모조리 보면서.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거 하나 뿐이야."
가만히 단검을 들어보였다.
이세희가 침중한 얼굴을 한다.
"저번에는 안 그랬잖아요?"
"신촌 병원도 우리가 빨리 해결해서 그런 거지, 하루 이상 헤맸으면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났을 겁니다."
"아......"
"이 사람들, 구해줄 방법은 없어?"
"지금은. 모르지, 몇 년 지난 다음이라면......"
"그래? 그럼 이 사람들부터 해결해야 되는 거 아냐?"
"아니. 핵만 제거해도 돼. 세계만 무너지면 모두 풀려나니까."
"그렇구나."
서둘러야겠다.
그런 공감대가 셋 사이에 형성되었다. 얼른 매점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미 변형이 될 대로 됐다. 원래는 계단이었어야 할 곳이 복도이고, 원형 미끄럼틀이고, 깊은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신중히 길을 따져 4층까지 올라갔다.
처음으로 확인한 곳은 기타 동아리.
"이햐햐!"
"꺄흥!"
문을 열자마자 천상 신도가 덤벼든다. 이번에도 김현이 먼저 나서려고 했으나 김애경이 한 발 빨랐다. 두 신도의 목을 제압하고는 김현에게 내민다.
이게 더 쉽긴 하네.
목을 찔러서 끝을 보았다. 두 학생이 눈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는 시체가 된다. 이세희가 우울한 눈빛을 보냈다.
"얘네들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죠? 모두 어려 보이는데."
"보물을 가진 죄죠."
"무슨 보물이요?"
"성혼 말입니다. 성혼은 우주 최고의 보물이에요. 하필이면 우리 지구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게 문제입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는 일은 없었겠죠."
"말도 안 돼."
"세상살이가 그렇죠. 선생님도 아시잖습니까?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게 세상입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에요. 규모가 우주적으로 커지긴 했어도 본질적으로는 같죠."
"하지만......"
"자,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어쨌든 외계종들 몰아내고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누나 말이 맞아."
다른 동아리 방도 뒤졌다. 그때마다 천상 신도 한둘이 뛰쳐나온다. 모조리 처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변화가 있었던 것은 뒤에서 두 번째, 어느 연구 동아리 문을 열었을 때. 크게 변형되지 않은 작은 공간이었는데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긴 조용하네."
"이제 하나 남았어. 건너가자."
"잠깐만."
둘은 속여도 김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두 눈동자가 컴퓨터 책상 아래 옅은 그림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광경이지만 천상계에서라면 부자연스럽다. 빛이 사방팔방에서 쏟아져서 그림자가 작고 옅기 때문. 더구나 별의 관찰 항목에 글자가 주르륵 떠오르는 바에야.
"서경태 씨."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그림자가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