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서경태 –2-
서서히 일어난다.
책상 아래에서, 음영만 있던 것이 입체적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수염과 구레나룻이 덥수룩하여 나이를 알기 어려운 남자. 그 동안 고생했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
이세희가 인사를 하려는 찰나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몸이 시커멓게 물들면서 급격히 가속했다.
허공에 그어지는 검은 선!
엄청나게 빠르다. 김애경 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 셋을 그대로 지나쳐 뒤의 출구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예측했던 상황.
김현이 진즉에 힘을 모아 바닥을 내리찍고 있었다.
꾸아앙!
충격파가 터졌다.
화룡금과 서리쇠의 반발을 응용하는 충격파다.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막 김현을 지나치려고 하던 남자가 그걸 온통 뒤집어썼다.
"크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진다.
그나마 바닥에 찍어서 이 정도. 정면에서 맞았으면 뼈도 못 추렸겠지.
"쿨럭, 쿨럭!"
남자가 엎드린 채 기침을 했다. 출구를 막고 선 채 재차 말을 걸었다.
"서경태 씨, 맞죠?"
남자, 서경태가 고개를 든다.
눈가에 희미한 절망감이 어려 있었다.
"죽여라."
"네? 제가 왜요?"
"괴물 새끼, 내가 배만 안 고팠어도 죽여 버렸을 거다."
서경태가 침을 뱉는다. 뭐, 입이 바싹 말라 있는 까닭에 거의 나오지도 않았지만.
보아하니 일행을 천상계 괴물로 오해한 모양이다. 잠시 궁리하다가 가방에서 생수 한 통을 꺼냈다. 그걸 서경태에게 던져주었다.
"무슨......"
"목마르실 테니 물부터 드시죠.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는 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초능력자죠. 경태 씨처럼."
김애경에게 눈짓을 보낸다. 찰떡 같이 알아듣고 성혼을 발현했다. 두 주먹에서 푸른빛이 쏟아지자 서경태의 눈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더니 생수통을 따서 마시기 시작한다. 500ml짜리 작은 통. 벌컥벌컥 마시자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흐아아! 살 것 같다. 당신들, 정말 인간 맞아요?"
"맞다니까요. 민증이라도 까요?"
"아니,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죠.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저흰 세계 침식에 휘말린 게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왔습니다."
"예? 정말요? 혹시, 구출하러 오신 거예요?"
"아뇨. 개인 자격으로 왔습니다. 저흰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에요. 생존자가 있는 줄도 몰랐고."
"아아, 네......"
"그건 그렇고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래 굶으신 것 같은데 밥 정도는 나눠 드리죠."
"어어, 정말요? 먹을 게 있으면 주세요! 근 사흘 동안 음료수만 줄창 마셨어요!"
음식 얘기에 바로 눈빛이 바뀐다. 애원하듯 초롱초롱한 눈빛에 못 이기는 척 전투식량을 나눠주었다.
물만 부우면 조리가 되어 즉석에서 섭취가 가능한 종류. 서경태가 허겁지겁 전투식량을 먹어치운다.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서 눈가에 찔끔 난 눈물을 닦았다.
"하, 군대 있을 때는 꼴도 보기 싫던 게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네요. 더 먹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몸만 무거워집니다. 이 세계를 탈출한 다음 더 드시죠. 이런 거 말고,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거요."
"그럴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잠깐만, 여기서 탈출하는 게 가능해요?"
"들어오기도 했으니 나갈 수도 있겠지요."
서경태가 머리를 들어 일행을 본다. 자연히 김현은 물론이고 김애경 및 이세희와도 눈이 마주쳤다.
김애경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만, 혹은 김현을 믿으라는 기색. 이세희도 마찬가지다.
"그, 그럼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그러시죠. 피곤하겠지만 몇 시간만 더 참으세요. 최대한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당연하죠! 제가 머리는 나빠도 체력은 자신 있어요! 절대 낙오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저희들 뒤 따라다니면서 주위만 감시해 주세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선생님?"
"알았어요."
이세희가 서경태에게 손짓을 한다. 금색의 빛이 일렁이자 서경태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다가 이세희가 포근하게 웃어보이자 겨우 진정을 했다.
축복이 내려앉는다. 서경태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우와, 이거 좋네요. 감사합니다! 참, 저는 서경태라고 하는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제 초능력입니다."
"아......"
서경태가 김현의 의수를 훔쳐본다. 이름을 단번에 안 것도 그렇고 아까 전 충격파도 그렇고 궁금한 게 많은 모양.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요정 및 환수 성향 각성자 김현입니다."
"반가워요. 거신 성향 각성자 김애경이에요. 여기 이 녀석 누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천상 성향 각성자 이세희에요. 원래는 신촌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합류하게 됐어요."
"형님, 누나들이시네요. 그런데 성향이 뭡니까? 각성자? 초능력자를 말하는 건가 보죠?"
"각성한 성혼의 속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경태 씨는 암흑 성향이고요. 각성자는 경태 씨가 생각한 게 맞습니다."
"형님이신데 그냥 말 놓으시지......"
"하하, 나중에요."
전생의 아론은 거의 대부분 하대를 했지만 김현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원판 김현이라고 해야겠지.
원판 김현은 판타지 소설가. 집에서 홀로 작업할 때가 많았다. 더구나 붙임성도 별로 없어서 보자마자 친한 척 하는 걸 어색하게 여겼다. 지금의 김현도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
서경태는 호기심이 많았다. 봇물 터진 듯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놔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손을 들어 막았다.
"자, 질문은 나중에.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나 합시다."
"네, 형님."
"가죠. 목표는 학장실입니다."
이곳 학장실에는 2성 등급 치유 계열 성혼이 잠들어 있다. 그곳으로 이동하면서 서경태가 겪은 일에 대해 들었다.
5월 4일 저녁 8시.
바로 그 시간에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세계가 침식되고, 천사들이 날아들고, 사람들이 죽은 다음 괴물이 되어 일어나고......
"운이 좋았죠."
무거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
"전 뒤에 있어서 괴물들이 공격할 때 정신을 차릴 수 있었거든요. 정말 겨우 도망쳤어요. 호수에 빠지기도 하고...... 거기서 초능력, 음...... 성혼을 못 얻었으면 그 날 죽었겠죠."
"그림자 은신을 거기서 얻은 겁니까?"
"아뇨. 그건 여기 화장실에서요. 큰 일 보러 화장실 들어갔는데 변기가 은색이더라고요. 왠지는 몰랐는데 일 보다가 각성했어요."
화장실에서 곧잘 숨어서 뭘 하던 사람이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김현은 산탄총 한 자루를 서경태에게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어색해 했으나 금방 적응을 했다. 이어 날아오는 아기천사들에게 쏴대는데, 근거리에서는 김현만큼이나 정확한 실력을 뽐냈다.
"이거, 소총보다 쓰기 더 좋은데요?"
"가까우니까 그렇죠. 50미터만 돼도 맞추기 힘듭니다."
"아, 소총은 250미터도 쉽죠. 이해했어요."
"250미터요? 그렇게 멀리도 맞출 수 있어요?"
"그럼요. 영점만 잘 잡으면 대한민국 예비군은 250미터 정도는 무난할 걸요? 고문관만 아니었으면 뭐......"
어느새 학장실 앞. 일행을 멈춰 세우고 비망록 내용을 떠올렸다.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밝은 곳이었다. 하늘에 황금색 구름이 빼곡한데, 모든 구름이 빛을 뿌리는 것 같았다. 장대한 들판, 들어서자마자 구름 속에서 발광하는 천체가 나타났다......]
여기서 나타나는 괴물은 광륜 천사.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과는 다르게 순수한 영적 괴물이었다.
총은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 김현은 산탄총을 아예 보스턴 가방에다가 넣었다. 서경태가 갖고 있던 산탄총까지도.
"자, 들으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에서 천사가 하나 내려올 겁니다."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냥 듣기나 해. 김현 님은 예지 능력도 있어."
"햐, 진짜요?"
"어쨌든 아직 천사 상태일 때 공격을 해야 됩니다. 천사가 빛나는 원반 상태로 변신하면 상대하기 껄끄러워지거든요. 경태 씨?"
"네!"
"천사 나오면 바로 어둠 질주 써서 들이 받으세요."
"어...... 저도 다른 천사한테 그거 해봤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어요. 차라리 총을 쏘는 게......"
"물리 타격은 아예 안 통합니다. 경태 씨는 그렇게 한 번 들이받고 물러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누나도 마찬가지야. 천사 보이자마자 뛰어. 경태 씨 공격하고 나면 천사가 잠깐 정신을 못 차리니까 그때 제대로 한 방 꽂아주라고. 알았지?"
"쉽네. 넌?"
"마무리해야지."
가만히 허리춤을 두드리는 김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천사가 저 위에서 강림하는 게 보였다. 하늘 위라고는 해도 굉장히 낮아서 3미터 높이 수준이다. 서경태가 검은 선을 그으며 뛰쳐나갔다.
서경태, 김애경, 김현 순으로 공격이 폭풍처럼 이어졌다. 단검이 목에 꽂히자 천사가 새된 비명을 지른다.
"끼아아악!"
"시끄러워."
크게 벌어진 입에다가 의수를 쳐 넣었다. 그대로 혼력을 폭주시켜 내부에서 터뜨린다. 충격파가 터지며 천사를 갈기갈기 찢었다.
빛 덩이가 공중에서 비산했다. 그 뒤를 따라 금색 액체가 사방팔방으로 뿌려지자 서경태가 질린 얼굴을 했다.
"무서운 형님이네......"
"후우!"
김현은 뻐근한 왼팔을 흔들었다.
역시 아직은 충격파 공격을 자주 쓰기가 어렵다. 몸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의 잔해를 뒤지니 은빛 구슬이 하나 나왔다.
[빛의 치유(천상, 2★)]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던 성혼.
이세희에게 건넸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그냥 먹으면 될까요?"
"예. 2성 등급 치유 성혼이니까 앞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다행이네요. 하는 일이 너무 없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세희가 구슬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곧 각성하면서 새로운 성혼을 얻는 게 보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다른 신전들도 엿보인다. 그 신전마다 2성 등급의 성혼이 잠들어 있겠지. 지금의 김현에게 그것들을 취하기란 식은 죽 먹기.
대신 시간이 문제다. 아무리 비망록을 암기하고 있어도 신전 하나 당 몇 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백흔귀와의 거래를 생각하면 아깝지만 오늘은 서두르는 게 낫겠지. 당장 내일 저녁 9시 32분에 새로운 세계의 침식이 예정되어 있으니.
"호수로 가죠."
"거기 핵이 있나 봐?"
"어.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구름 바다를 건너면 하늘 궁전이 나와. 거기에 핵이 있어."
"구름 바다에 하늘 궁전? 재미있네."
"막상 가면 재미없을 걸. 이젠 총도 안 통한다고."
호수 바깥이 난이도 낮은 지역 1이었다면 호수 안쪽은 난이도 높은 지역 2라고 보면 되겠다.
김애경이 김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너 하라는 대로 하면 끝인데, 뭐. 너만 믿고 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김현은 앞으로 어떤 괴물이 나올지 다 알고, 모든 상황에 대해 대비책을 가지고 있으니.
'불길한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다.
서경태 때문이겠지. 김현이 가진 비망록은 7월 초의 정보인데 지금은 5월 중순이라는 점을 서경태를 보고 실감했으니.
침식 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농익는다. 괴물이 많아지고 등급도 올라간다. 지금은 설익어서 난이도가 훨씬 낮다는 뜻.
그런데도 등골을 찌르는 이 느낌.
전생의 경험이 김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뭔가 틀어졌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호수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거대 물뱀]
김애경의 비망록에는 없었던 괴물.
심지어 천상계에 속하지도 않는 그것.
길이 20미터의 거대한 물뱀이 호수 아래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