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20화 (20/200)

# 20

거대 물뱀 –1-

그래.

가끔 이런 일이 있다.

'떠돌이구나.'

전생에서도 몇 번은 봤었지.

성혼의 힘에 이끌려 아무 세계나 방문하는 존재들. 보통은 자기 체급에 맞는 세계를 찾아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해당 세계 내의 괴물들보다는 더 강하다. 침식 세계 내의 괴물들은 막 태어난 존재들이라 미숙하다면, 이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 충분히 강하고 지혜로우니까.

"어, 뭐가 있네요?"

청명한 빛깔치고는 사실 혼탁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호수. 용케 이세희가 내부를 꿰뚫어 보았다.

"저거...... 혹시 뱀이에요?"

"뱀? 어디?"

"언니, 저기요. 저기 흐릿하게 보이는 거요."

"진짜네."

"이상하네요. 제가 호수에 빠졌을 때만 해도 저런 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호수에는 왜 빠진 겁니까?"

"도망치다가요. 천사들은 호수에 잠수하면 잘 안 쫓아오거든요."

말하는 투가 그때 말고도 몇 번 호수에 뛰어들어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는 모양.

한 가지 짐작 가는 사실이 있었다.

어쩌면 원 역사에서 서경태는 저 물뱀에게 잡아먹힌 게 아닐까?

모를 일.

김현은 물뱀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잡아야지?"

"그럼. 안 잡고 지나가면 우리 다 저놈 점심거리가 돼."

"어떻게 잡죠?"

그게 김현의 고민이었다.

거대 물뱀은 육체적으로 강력하다. 유령이나 천사처럼 특별한 약점도 없다. 아직 설익은 각성자 넷이서 잡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

김현 본인이, 혹은 김애경이 완성된 3성 등급 각성자라면 자웅을 겨뤄볼 만하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부족하고.

미끼를 던져놓고 빠르게 호수를 돌파할까? 성혼 두어 개만 쓰면 적당한 미끼를 만들겠는데.

'아냐.'

곧 머리를 흔들었다. 물뱀의 속도를 떠올린 까닭이다. 호수 반대편에 미끼를 던져도, 물뱀은 그걸 순식간에 삼키고 일행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지금도 보라.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콕콕 쑤시는 중이다. 거대 물뱀이 아닌 척 딴청을 피우고 있으나 실은 일행을 감지하고 주시하고 있다는 뜻.

'강한 화력이 필요한데......'

일행이 가진 무기를 점검해보자.

산탄총, 권총, 단검은 쓸모없다. 물뱀의 비늘을 뚫지도 못하고, 뚫어도 모기에 물린 수준일 테니. 서리거인? 그것도 드잡이질 조금 하는 정도지. 성스러운 축복이나 어둠 질주는 말할 것도 없고.

수류탄이 아쉬워진다. 어떻게든 입에다가 까서 넣기만 하면 되는데......

'잠깐. 수류탄?'

한 줄기 영감이 떠오른다.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른팔의 거의 두 배 두께를 자랑하는 붕괴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붕괴의 손!

김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거라면 가능성이 있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괴물 잡으려고 만든 게 붕괴의 손 아닌가.

자신을 보고 있는 김애경, 이세희, 서경태를 한 번씩 쳐다본다. 그러다가 서경태와 눈을 맞추었다.

"혀, 형님? 왜 그러세요?"

"경태 씨. 혹시 물속에서도 어둠 질주 쓸 수 있습니까?"

"네. 왜요? 설마 제가 미끼 역할을 해야 하나요?"

"미안합니다. 우리 중에서 경태 씨 말고는 저놈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없어요."

"끙, 위험하진 않겠죠?"

"사실 저놈이랑 싸우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하지만 저놈을 못 잡으면 꼼짝없이 여기 갇혀 있어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젠장,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직접 싸우는 건 못 해요. 전 도망치는 재주밖에 없다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 이것도 가져가세요."

김현은 자기가 쓰던 산탄총까지 넘겼다. 여차하면 눈이나 입천장을 쏴서 놀라게 하라는 조언도 함께.

'슬러그 탄도 가져올걸.'

육체적으로는 약한 천사 상대라 버드샷만 가져온 게 아쉽다.

"어둠 질주에 특별한 제한 같은 게 있습니까? 사정거리는 얼마나 되고, 대기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어...... 글쎄요? 제 몸속에 있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있는 동안은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한 50미터? 그게 한계라서 평소에는 5미터에서 10미터 정도만 끊어서 써요."

"방향 전환은 안 되죠?"

"네, 일직선으로만. 잠깐 끊었다가 방향 트는 건 돼요."

"그때 몇 초나 걸려요?"

"몇 초까지라고 할 것도 없어요. 거의 눈 깜짝할 사이?"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서경태가 벌리는 거리는 50미터. 그 이후에는 헤엄치거나 달려야 한다. 그렇다면 거대 물뱀은 얼마 만에 서경태를 쫓아올까?

답은 2.5초. 거대 물뱀이 생애 절정기에 도달해 있다면 시속 70킬로미터를 상회 하는 속도로 헤엄을 치니까.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유인을 시작한다 해도 5초면 잡힌다고 봐야 했다. 그 사실을 알리자 서경태가 입을 쩍 벌렸다.

"5초요? 말도 안 돼!"

"그러니 괴물이죠. 절대로 잡히면 안 됩니다. 그리고 누나?"

"말해."

"누나가 조금 위험한 일을 맡아줘야 할 것 같아."

"그럴 줄 알았지. 뭘 하면 되는데?"

"경태 씨가 물뱀 유인해 오면 후려갈겨. 누나가 성혼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 잠깐은 맞싸움이 있어. 그러니까 치고박고 싸우면서, 물뱀이 입을 벌리게 만들어."

"입을?"

"응. 그럼 내가 막타 꽂을게."

이어서 물뱀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물뱀은 맞상대하는 적이 있으면 우선 꼬리부터 휘두른다. 동시에 머리를 휘저어 깨물려고 한다. 그걸 성공적으로 피하면 몸으로 휘감고 졸라댄다.

몸으로 덮칠 때가 핵심. 단번에 머리 위로 뛰어올라 양쪽 턱을 후려쳐야 한다.

"턱을 때리라고?"

"응. 거기가 약점이야. 저놈도 뱀이라서 턱이 관절이 아니고 인대로 연결되거든. 거길 부수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돼."

다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대형 괴물인 만큼 재생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몇 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전부겠지.

그 정도면 충분.

김현은 두툼한 왼팔을 쓰다듬었다.

"전 뭐 하면 돼요?"

"누나가 다칠 때마다 치유 성혼 써주세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저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누나가 뚫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는 거니까, 그만큼 선생님 임무가 막중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 알았어요."

"그럼, 시작할까요?"

서경태와 김애경은 호숫가에, 김현과 이세희는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섰다. 서경태가 긴장된 기색으로 두 팔을 휘돌린다.

"후아압."

길게 심호흡 후 도약.

첨벙!

물로 뛰어들자 물보라가 크게 일어났다.

헤엄치기 시작한다. 물뱀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심한 척 유유히 호수 아래를 노닐던 물뱀이지만, 서경태가 어느덧 중간 지점에 닿자 더는 연기를 하지 못했다.

패앵!

휙 하고 몸을 돌리자 꼬리 끝이 수면을 격하게 때렸다. 폭음과 함께 물이 잔뜩 비산 했다.

"이크!"

서경태가 몸을 돌린다. 몸이 거뭇하게 물들면서 빠르게 쏘아진다. 순식간에 몇 미터를 단축하여 이쪽으로 이동했으나, 드러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금방 상황을 알아차렸다. 분명 10미터를 기약하고 성혼을 발동했는데 겨우 절반 남짓 이동한 것.

다시 어둠을 부른다. 푸른 호수 아래 검은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동한 거리는 고작해야 5미터. 옆에서 보고 있던 이세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떻게 해!"

김현의 눈이 깊어진다.

금세 원인을 간파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경태 씨, 뛰세요!"

"네?"

"뛰라고요, 수면 위로! 날치처럼 뛰어요!"

"아!"

서경태의 눈이 커졌다. 이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 사이 물뱀이 가까워졌다. 서경태의 바로 옆까지 접근한 상태. 수면 위로 몸을 쭉 내밀며 입을 벌렸다.

흉악한 치아가 가지런히 빛날 때 서경태도 성혼을 발현했다.

텁!

물뱀이 허공을 깨물었다.

검은 선이 물뱀을 뒤로하고 튀어 나갔다.

위로 30도. 비스듬히 경사를 그린 채 수면을 박차고 도약한 것.

포탄을 보는 듯했다. 저항이 약한 대기를 가르며 길게 날아간다. 발사하는 순간 힘을 집중한 탓에 오히려 더 긴 거리를 이동했다.

"우하하!"

한 번 해보더니 요령이 붙었나 보다. 이제는 수면을 박차는 순간만 어둠 질주를 썼다. 그 뒤에는 관성의 힘만으로 날아가도 충분했기 때문.

서경태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 뒤를 물뱀이 부리나케 쫓아오지만 이미 잡기가 그른 것 같다.

"잘 됐네요! 진짜 다행이에요!"

"경태 씨는 여기까진 것 같습니다. 치유 준비해주세요."

"네? 멀쩡해 보이는데요?"

"저 기술은 몸에 부담이 많이 가요. 자기 몸을 포탄처럼 쏘는 건데 멀쩡하겠어요? 그래도 안 잡혔으니 다행이네요."

아닌 게 아니라 기껏 들고 갔던 산탄총 두 자루를 이미 놓쳐 버렸다. 서경태 본인은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손목 발목이 뒤로 꺾여 있었다.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

이윽고 호숫가까지 도착했다. 그냥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걸 기지를 발휘해 어둠 질주를 짧게 써서 착지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경태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이제야 고통이 밀려온 것.

물뱀이 쫓아오고 있었다. 김애경이 서경태를 들어 휙 하고 던져준다. 그리고 힘을 모아 주먹을 내쳤다.

쌔애액!

주먹 중심에서 고드름이 맺혀 날아간다. 정확히 눈 쪽. 미친 듯이 달려오던 물뱀이 움찔 놀랐다.

"쿠어엉!"

놀란 것도 잠시. 몸을 틀며 길게 꼬리를 휘두른다. 김애경이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물뱀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물이 뿌려졌다. 가득, 시야를 가릴 정도로.

"이런!"

이 광경에 김현조차 놀라 경호성을 질렀다. 물뱀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교활하다는 뜻이니.

뿌연 물안개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어 강렬한 타격이 김애경을 덮쳤다.

쩌걱!

뭔가 쪼개지는 소리.

"언니, 안 돼!"

이세희가 비명을 질렀다.

반면 김현은 마음을 놓았다. 조금 전 소리가 인간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과연 그러했다.

물안개가 걷히고 호숫가 정경이 드러난다.

김애경이 서 있었다. 얼음의 방패를 두르고서, 물뱀의 꼬리를 막아낸 채.

"크르르......"

물뱀이 목울대를 진동시켰다. 자신에 비하면 작기만 한 존재가 공격을 막은 게 의외였던 모양.

"크아아악!"

이내 괴성을 지르며 공격하기 시작. 몸 대부분은 호수에 담근 채 꼬리를 휘두르고 머리를 휘젓는다. 특히 교묘히 시선을 빼앗았다가 일격을 가하는 게 일품이었다.

김애경은 전신에서 빛을 뿜어댔다. 아예 파란색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우뚝 선 채 얼음을 만들어가며 물뱀과 싸운다.

체급 차이로만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시 애경 장군이야.'

저걸 보고 누가 각성 열흘 차라고 볼까?

슬슬 준비를 했다.

깊이 숨을 들이쉰다. 정신을 집중한다. 의수에 혼력을 몰아넣는다. 잠재된 전뇌 회로가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충격파 공격이 아니냐고?

천만에!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단순히 서리쇠와 화룡금을 반발시키는 것을 넘어, 극도로 폭주시키는 것에 요체가 있다.

의수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떠오른다. 용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흡사 반도체 집적 회로를 연상시키는 문양이다. 동시에 의수 전체가 덜그럭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워낙 막대한 혼력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

더욱 집중한다. 약한 대신 순수하게 정제한 혼력을 공급한다. 무턱대고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전뇌 회로의 주행을 따라 섬세하게 이어나간다.

전뇌 회로가 정렬했다. 원래는 여섯 가지였던 문양이 오직 하나로 통일되어 무수히 겹쳐졌다.

[폭주]

그리하여 불가능했을 기법을 현실화시킨다.

꾸앙!

범종 울리듯 광량한 소리.

츠으으......

수증기가 뿜어진다.

팔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익어가고 있었다. 의수에서 뿜어지는 열기 때문에.

그때 물뱀이 몸을 굴리는 게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도약하는 김애경. 얼굴이 일그러진 와중에도 물뱀의 머리 위에 올라 양 턱을 후려친다.

퍼억!

강렬한 타격음.

물뱀이 머리를 휘저으며 비명을 지른다.

"꾸에에엑!"

그 바람에 김애경이 하늘 위로 솟구치고 말았다.

잔뜩 지친 상태. 몸에 어려 있던 청광이 흩어졌다.

눈이 마주치는 둘.

김애경이 눈빛으로 말했다.

끝내라고!

손을 들었다.

왼손을 정면으로 내밀고 오른손으로 팔뚝을 받친다.

머릿속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푸확!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화염. 화악 끼쳐오는 열기. 뼈를 으스러뜨리는 충격.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쏘아졌다.

의수가, 붕괴의 손이.

허공에 궤적을 그리며 파멸을 향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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