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21화 (21/200)

# 21

거대 물뱀 –2-

찰나의 순간, 의수가 거칠게 물뱀의 입에 틀어박혔다.

물뱀이 몸을 경직시킨다.

잠시 정적.

이내 둔중한 진동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꾸웅!

물뱀이 크게 몸을 들썩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일행을 한 번씩 보는 물뱀.

이런 작은 존재들에게 자신이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 그러나 이미 결과는 결정되었고, 물뱀의 내부가 곤죽이 된 다음이었다.

"크우우우우!"

길게 터뜨리는 구슬픈 울음.

그것을 끝으로 머리를 떨어뜨린다. 물이 잔뜩 튄 호숫가에 그 커다란 몸을 누이자 땅이 진동하며 격렬한 소음을 냈다.

"이, 이겼다!"

서경태를 치료하던 이세희가 만세를 부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함께 기뻐할 처지가 못 됐다.

"쿨럭, 커헉!"

당장 김현만 해도 의수를 쏜 후폭풍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니까.

왼쪽 팔은 골절, 전신에 화상을 입은 상태.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훨씬 처참하다.

"허억, 허억."

김애경도 녹초가 되어 겨우 걸어온다. 겨우 김현이 있는 곳까지 오더니 아예 뻗어 버렸다.

잠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지친 까닭에 누워서 쉬고 싶었던 것.

그러다 서경태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어, 다들 저기 좀 봐요!"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서경태.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황금빛 점 수십 개도 넘게 날아오는 중. 물뱀의 존재를 알고 얼씬도 안 하던 놈들이, 물뱀과 싸우느라 터진 소음을 듣고 뒤늦게 몰려오고 있었다.

"어, 어쩌죠?"

"나 이제 싸우기 힘든데......"

"끙!"

김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죄다 허접한 아기천사들이지만 수가 워낙에 많았다.

"선생님, 저 좀 앉혀주세요."

"네? 네!"

"누나. 가진 권총 나한테 줘. 가방에서 탄창도 다 꺼내주고."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괜찮아. 나한테 맡겨. 경태 씨? 제 옆에서 재장전만 해주세요."

"예!"

권총 세 정을 땅바닥에 가지런히 놓았다.

눈이 따가워 시야가 흐릿하다. 심호흡하는 한편 말라버린 혼력을 간신히 끌어냈다. 기린의 생명을 발휘하며 눈에 보내자 비로소 세상이 또렷해진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센다.

총 쉰두 마리.

노래를 부르며 날아온다. 처음 들려주던 아름답고 청량한 목소리가 아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느라 잔뜩 목이 쉰, 잔인한 식인종의 함성 같은 음색이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조금씩 커진다. 처음에는 점처럼 보이던 게 이제는 이목구비가 조금씩 구별될 정도.

어느덧 100미터 이내.

권총 한 정을 쥐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

아무리 숙련된 사수라도 여간해서는 맞추기 힘든 거리.

그러나 김현은 누구와 비교해서도 차원이 달랐다.

전생의 아론이 쓰던 주무기가 검과 총 아닌가. 아론은 100구경짜리 거대 구경 권총인 처형자로 곧잘 수 킬로미터 저격까지 해내던 인물이다. 전자두뇌와 곤충의 시력, 다기능 고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그 실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조악한 권총을 쓰든, 몸 상태가 영 아니든 관계없는 일. 고작 70미터 사격 정도는 김현에게 있어 이야깃거리도 못 된다.

아기천사들이 떨어진다.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보는 듯하다. 총성 하나에 아기천사 하나, 총성 둘에 아기천사 둘이 어김없이 낙하했다.

서경태가 입을 벌린다.

"말도 안 돼......"

먼 놈은 70미터. 가까운 놈은 50미터.

소총으로 쏘면 그나마 쉽다. 대한민국 예비군 중 이 정도 거리를 못 맞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권총으로 백발백중했다는 점이 놀랄 노릇. 영화에서야 귀신같이 맞춰대지만, 현실에서는 15미터만 잘 맞춰도 숙련자 소리를 듣지 않는가.

김애경과 이세희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대단한 거예요?"

"그럼요! 엄청난 겁니다!"

이세희의 물음에 서경태가 거품을 문다. 하지만 여전히, 이세희도 그렇고 김애경도 그렇고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김현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 신촌 병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워낙 대단한 장면을 자주 보여주었으니.

"후우......"

버릇처럼 길게 숨을 불어내는 김현.

어느새 황금색 점은 다 떨어졌다. 수십에 이르던 아기천사를 권총 세 자루만으로 모조리 처치한 것.

대신 탄창을 많이 소모했지만 어쩌랴. 호수 반대편에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호수로 들어가죠. 시간 더 지체하면 다른 괴물들도 올 텐데, 권총으로는 상대하기 힘듭니다."

"형님, 그런데 팔이......"

"네? 아, 그거 의수였습니다. 잘린 지 좀 됐지요."

"전 특이한 장갑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 단순히 방어 용도로 쓸 거면 그냥 방패를 쓰지, 누가 그런 장갑을 차겠습니까? 불편하게. 참, 경태 씨가 주위 돌면서 천사들이 흘린 걸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동안 저희는 이걸 밀어보죠."

"예, 형님!"

"그런데 이건 시체가 그대로 있네요?"

이제 깨달았다는 듯 이세희가 말한다. 지금까지 본 괴물들은 죽으면 몽땅 녹아내려 사라졌는데, 거대 물뱀은 시체가 여전히 온전한 게 신기했나 보다.

"이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녀석이거든요. 세계의 핵에서 힘을 얻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복잡하네요."

"복잡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나중에는 자연히 다 알게 되실 거예요."

김현은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떠돌이.

놈들은 지구에서도 골치다. 지금은 침식된 세계에만 드나들겠지만, 나중에는 차원의 벽이 얇아지면 지구에도 출현하니까.

그때가 되면 지구에서도 떠돌이라는 명칭이 정착되겠지.

어쨌든 미래에 벌어질 일.

셋이서 힘을 합쳐 물뱀을 호수로 밀었다. 덩치에 비해 가벼운 괴물이라 어느 정도 물에 잠기자 둥둥 떴다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한다.

"왔습니다! 월척이에요!"

서경태가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가볍게 돌아보기만 했는데 은빛 젤리를 13개나 모았다고 한다.

"그럼, 들어가죠."

"어떻게 하면 돼요? 저 수영 못 하는데요."

"숨 참고 잠수하면 물이 저절로 끌어들일 겁니다. 1분만 참으면 돼요.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호수 반대편으로 저절로 이동하니까 그냥 눈 감고 계세요."

모두 눈을 감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과연 어떤 힘이 일행 모두를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호수가 짙어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그것이 호수 아래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었다.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기면 호수 중심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후압!"

도착한 곳은 또 하나의 천상계.

좀 전까지 있던 곳이 빛의 천상계라면 이곳은 어둠의 천상계였다.

땅은 거칠거칠한 검은 구름이요, 하늘에는 창백한 달이 홀로 외로이 떠 있었다. 전반적으로 어둑한데, 기이하게도 푸르스름한 반딧불들이 날아다녀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없었다.

"여긴 분위기가 다르네요."

"천상계라고 다 빛만 가득한 건 아니니까요. 다니다 보면 불의 천상계도 있고 물의 천상계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천상계는 상반되는 속성끼리 붙어 있을 때가 많아요."

어쨌든 여기서 잠시 정비를 하기로 했다. 물뱀과 싸우면서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기 때문.

이세희가 가장 바빴다. 숨을 헐떡이도록 빛의 치유를 뿌린다. 그나마 김애경은 금방 회복되었지만, 서경태와 김현의 경우는 상태가 심각했다.

"자, 됐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구구, 저는 아직도 몸이 결리는데 형님은 대단하시네요."

"전 재생 계열 성혼이 있으니까요."

"저도 그런 거 하나 갖고 싶네요."

"글쎄요. 본인 특기를 갈고 닦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초입이라 천사는 보이지 않지만 오래 머물기는 힘들었다. 자리를 뜨기 전 단검을 들고 물뱀 시체로 다가간다.

물뱀 시체도 가라앉은 까닭에 여기까지 일행과 같이 넘어온 것. 김애경이 몸을 풀다 말고 묻는다.

"뭘 하려고?"

"성혼 빼내야지. 적어도 두 개, 많으면 세 개도 나와."

"내가 할게. 넌 쉬고 있어."

"괜찮은데......"

"내가 한다니까."

김애경이 거의 강제로 김현을 땅바닥에 앉혔다. 시선이 잘린 왼쪽 팔을 훑고 지나가는 걸 보면 속으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어디를 갈라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뇌, 심장, 위.

더럽고 궂은일이지만 묵묵히 수행한다.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단검이 잘 안 들자 손날에 서리거인의 힘을 불러 쓱쓱 갈랐다.

풍겨오는 역한 냄새에 이세희와 서경태가 기겁할 지경. 김현은 그런 김애경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감흥에 젖었다.

'누나는 옛날부터 그랬지......'

몇 가지 추억이 눈앞을 스친다.

싸움이 붙은 동네 아이들을 앞장서서 혼내주던 일, 학교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공부를 가르쳐 주던 일, 무엇이든 자기가 먼저 양보하던 일까지도.

흐릿한 웃음과 함께 따스한 감정이 가슴을 적신다.

'애경 장군은 좋은 누나이기도 했구나.'

"으앗!"

갑자기 지르는 비명에 흥취가 깨져 버린다.

"왜 그래?"

"으, 사람 손가락인 줄 알았어."

김애경이 딱딱하고 길쭉한 물건을 들어 김현에게 보여준다.

뭔가 했더니 붕괴의 손 조각이다. 물뱀의 위장 안에서 폭발하고 그 잔해가 남은 것.

"형님, 그거 복구할 수 없어요?"

"있죠. 그런데 원래 성능의 절반도 못 낼걸요."

"그게 어디에요. 아까 물뱀 일도 있고 하니 안전하게 갔으면 좋겠는데......"

"누나, 괜찮겠어?"

"쳇. 만만한 게 나지?"

앞뒤 다 자른 말이지만 김애경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반쯤 가른 물뱀의 위장을 샅샅이 뒤졌다.

서경태는 본인이 말을 꺼내고도 눈치만 보았다. 그러다 김현이 한 손 거들기 시작했을 때에야 위장 속을 헤집었다.

"우웩, 냄새."

이세희도 토하는 시늉을 하며 돕는다. 더러운 것은 딱 질색이지만, 남들 다 일하고 있는데 홀로 내숭을 떠는 건 더 싫었기 때문. 덕택에 위장 안의 잔해를 모두 긁어낼 수 있었다.

폭발하면서 많은 부분이 망실된 까닭에 수습한 것은 절반이 전부. 그래도 이만하면 아쉬운 대로 의수를 재구성하는 게 가능하다.

이번에도 김애경의 서리거인 성혼을 빌렸다. 쇳조각들이 꾸물거리며 달라붙는 걸 본 서경태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처음에 제작할 때보다 더 어려웠다. 조각난 전뇌 회로를 최대한 맞춰가며 복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김애경이 서리거인 성혼에 익숙해져서 가능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대장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을 터.

"야, 이게 더 멋있는데?"

"진짜 사람 팔 같아요."

"예전 것보다 낫네요."

복구된 의수를 보고 다들 감탄사를 내뱉는다.

지금 김현이 장착한 왼팔을 보라.

오른팔과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 날렵한 근육질의 팔을 형상화하지 않았나. 그 미려하게 떨어지는 곡선은 흡사 예술 작품이 따로 없었다. 화룡금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표면에서 광택이 흐르느라 더더욱 그랬고.

반면 김현은 불만족스러웠다.

예전의 의수는 전생의 팔을 그대로 재현한 거였으니까. 성능 면에서도 차이가 컸다. 움직임은 더 자연스러워도 충격파의 위력이 예전과 비교하여 1/3밖에 안 나오는 것이다. 최후의 일격, 즉 의수째 날리는 건 꿈도 못 꿨고.

그나마 등급이 안 떨어진 게 다행. 다만 이름이 붕괴의 손에서 충격의 손으로 바뀌었다.

"다들 고맙습니다. 이제 하나만 남았네요."

김현의 눈이 저 앞쪽, 우두커니 솟은 신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끝을 보자."

김애경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로 전진.

거칠 것이 없었다.

얼굴 없는 천사들이 나와 덤벼들었으나 가뿐히 격퇴. 김애경의 서리거인 성혼과 김현의 유령 깃든 단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결국 신전의 주인이자 세계의 핵 지킴이인 검은 달의 천사도 목이 찢기고야 말았다.

당연한 일.

아무리 지킴이라고는 해도 미숙한 세계의 일원이다. 완성된 개체인 거대 물뱀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된다. 하물며 거대 물뱀조차 처치하고 여기까지 온 일행에게는 더더욱 그렇고.

[성령의 보호(천상, 3★)]

"드디어......"

하은이를 치료할 성혼.

김애경이 감회가 깊은 얼굴을 한다.

김현도 씩 웃었다.

오늘 얻은 수확은 컸다. 아까 물뱀에게 해성계 3성 성혼 세 개를 얻은 까닭에 더 그랬다.

도합 3성 등급 4개, 2성 등급 5개, 1성 등급 18개.

단순히 머릿수로 나눌 수는 없다. 그 경우 무임승차하는 얌체가 반드시 발생하니까. 기여도 별로 점수를 매겨 분배하는 게 좋겠지. 원 역사에서 정립된 대로.

쿠르르릉!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하늘이 색유리처럼 깨지면서 언뜻 익숙한 밤하늘이 엿보인다.

현실로 돌아가는 시간.

아마도 구경꾼들과 기자들, 정치인들이 잔뜩 몰려왔겠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첫걸음을 이제는 내디뎌야 한다.

"지금부터구나."

김애경이 김현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 손길이 든든하고 따뜻했다.

"맞아, 지금부터야."

결의를 다지듯 낮은 목소리로 뇌까린다.

그리고 이때, 침식되었던 세계가 완전히 현실로 돌아갔다.

아찔한 머리를 다잡으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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