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23화 (23/200)

# 23

세계에 알리다 –2-

"반갑습니다. 요정 및 환수 성향 각성자, 김현입니다."

일부러 팔짱을 끼고 턱을 들었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태도.

의도된 연출이었다.

원 역사에서 김애경은 대승적인 행보를 견지했지만 김현은 그 길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동족을 믿었기 때문에 맞아야 했던 그녀의 최후가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사령관이다.'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쳐낼 건 쳐낸다. 끝없이 의심한다. 자신에 대해 질시와 탐욕이 일게끔 유도한다. 그리함으로써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 결과적으로 인류의 자강을 이끌 생각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우상(icon).

그게 며칠을 고민하며 새롭게 세운 계획이었다.

"거신 성향 각성자 김애경입니다."

"천상 성향 각성자 이세희에요."

서경태는 빠졌다. 스스로가 한계에 달한 까닭에 응급차를 불러 달라 요청한 것. 서로 눈빛만 한 번 교환했다.

조만간 보자고.

기자들이 손을 든다.

"각성자가 뭡니까? 초능력자 말씀입니까?"

"성향? 그건 뭐죠?"

예전에 김애경과 이세희에게 설명했던 내용을 똑같이 반복 설명했다. 그러자 어떤 어리바리하게 생긴 기자가 의외로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도 초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기자를 주시하는 김현.

별의 관찰이 기자를 분석한다.

[성향] 무형

사실 대부분의 지구인이 그렇다. 성향이 중립이거나 없음일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예, 기자님은 무형계 성향이 있네요. 무형계 성혼과 접촉하고, 그 성혼과의 적합도가 높으면 무난하게 각성하실 겁니다."

"어어...... 진짜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계신 기자분이 22명이지요? 모두 한 가지씩 성향을 갖고 계십니다. 기자분들만 아니고 우리 인류 전체가 그래요. 성향이 없는 분은 전체 인구의 1% 이하에 불과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각성자가 될 수 있다!

그 선언에 기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스마트폰을 두드려 속보를 내보내는 사람도 보이고, 길바닥에서 노트북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 김현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잘 들린 탓에 스마트폰을 두드린다, 통화를 한다, 난리를 부렸다.

삽시간에 도떼기시장이 되어 버린 경찰 저지선 앞.

한 줄기 외침이 선명하게 귀로 파고들었다.

"어떻게 하면 초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까? 가르쳐 주십쇼!"

시끄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땀 훔치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

김애경이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 여기서 사실을 밝혔을 때 터질 파장이 무서워서.

성혼이 깃든 은빛 물체.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지난 몇 달 사이 엄청나게 증식해서, 어디를 가든 심심찮게 목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게 각성의 재료라는 것을 알리면 어마어마한 파동이 일 것이다. 성혼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고, 치안이 안 좋은 나라는 희생자가 속출하겠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생에서, 22세기에서 위장 계획을 짜던 당시에 이런 논의도 있었다.

성혼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이냐, 말 것이냐.

논의 끝에 밝히는 쪽이 낫다는 결론을 얻었다.

왜?

그로 인한 이득이 초래될 부작용보다 크니까. 치안의 부재로 무고한 자들이 죽고 여러 도시가 폐허가 되더라도 지구를 지킬 확률이 10%쯤은 올라가니까.

당초 목표인 1월이 아니라 5월, 7월에 도래해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시점에 사실을 밝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했다.

'그러니 영웅이 못 되는 거지.'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김현은 우상이 된다.

누군가는 악당이라 할 테고, 누군가는 영웅이라 하겠지.

입을 열었다.

"각성은 오로지 성혼을 흡수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주위를 둘러본다.

어떤 나이든 기자가 수첩에다가 만년필을 끼적이는 게 보였다.

요즘 세태에는 영 구닥다리. 다만 김현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가 극명했다. 만년필에 혼을 담았는지 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

다가간다. 기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시 경찰 저지선을 넘어온다. 경찰들이 어어, 하고 반응했으나 김현이 뿌리는 기이한 박력에 개입할 때를 놓쳐 버렸다.

만년필을 빼앗다시피 하여 높이 들어 올렸다.

[무작위 찌르기(혼돈, 1★)]

때마침 기자의 성향과 일치했다.

"1월 1일부터 이렇게, 물건이 은색으로 변하는 일이 많았지요? 이게 다 성혼이 깃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성혼을 흡수하면 각성자가 됩니다. 기자분 이름이 뭡니까?"

"노, 노웅진이라고 합니다만......"

"노 기자님이시네요. 노 기자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기자님을 각성자로 만들어 드리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노웅진의 눈이 번뜩인다.

평생 글밥을 먹은 인물. 요즘 세상이 점차 각성자에게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한 바에야.

미친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암요, 당연하죠!"

"조금, 아니 노 기자님 기준으로는 아주 심하게 아픕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만년필을 빼앗는 순간의 반응을 보면서 적합도를 가늠해 본 다음이다. 이 정도라면 미약 적합은 된다. 입 안에 피를 내고 먹기만 해도 각성한다는 뜻.

그러나 안경알도 아니고 만년필을 어떻게 먹겠나. 씹을 수도 없고 목구멍에서 다 걸릴 판이다. 별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오른손으로 노웅진의 손을 붙잡았다. 의수로 만년필을 쥔 다음 손등에다가 그대로 꽂아 넣었다.

"크아아악!"

노웅진이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가만히 있으세요. 성혼 얻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선생님? 한 마디 해주시죠."

"아, 그거...... 저기, 기자님? 조금만 참으시면 돼요. 저도 그렇게 당했었는데요, 상처는 금방 낫거든요."

"으아아아!"

아파 죽겠는데 이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까?

잠시 시간을 재다가 만년필을 뺐다.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의수의 초월적인 힘이 만년필을 박살 낸다. 그러면서 은빛 영기(靈氣)가 흘러나왔다.

우웅......

공중에 퍼지는 기이한 소리.

은빛 영기가 철철 흐르는 피를 따라 흘러간다. 노웅진의 손등으로, 뼈 사이로, 신경과 혈관을 타고 전신을 주행했다.

"아아......"

노웅진의 눈이 게게이 풀렸다. 입에서는 침을 떨어뜨린다.

성공.

뒤로 물러나 주시했다. 잠시 후 노웅진이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말짱하게 아문 손등과 흔적처럼 남은 상처를 보더니 김현에게 고개를 돌린다.

"끄, 끝난 겁니까?"

"예. 노 기자님의 성혼은 혼돈 성향이고 무작위 찌르기라는 겁니다. 저한테 그거 써보세요."

금속 의수를 내밀자 노웅진이 주저한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손가락으로 김현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팟!

미약한 섬광이 튀었다.

보라색 같기도, 초록색 같기도 한 무엇.

그것이 의수를 때렸다. 의수에 감각은 없지만 둔중한 진동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은 기절 직전까지 가겠네.'

다시 말해서 1성 등급 성혼이라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

김현이 어떠냐는 듯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기자들은 사진 찍기 바쁜데, 저기 뒤쪽 어떤 시민이 손뼉을 쳤다. 덩달아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진다.

노웅진이 내려가고 멈췄던 말을 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성혼을 흡수하면 각성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본인의 피가 기본이 됩니다. 적합도가 충분하면 피를 묻히고 부순 다음 피부에 밀착하거나, 아예 먹어버리면 시작되지요."

"먹어도 됩니까?"

"그게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적합도는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은색 물체와 접촉했을 때 본인이 느낍니다. 접촉하자마자 각성하면 합치,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끼면 극도 적합, 속이 메스껍거나 심하게 어지러우면 매우 적합, 전기 자극만 오면 보통 적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냥 은근하게 기분이 좋고 고무적인 느낌이 들면 미약 적합인데 그건 본인이 구별하기가 어렵죠."

"저, 저는 무슨 성향입니까?"

"그런 건 직접 알아보시죠. 제가 기자분 각성시키려고 여기 나온 줄 압니까?"

택도 없는 소리를 하자 당장 면박을 주었다. 옆에서 김애경이 옆구리를 쿡 찌르지만 무시. 앞으로 기자들과 입씨름 할 일이 많은데 끌려다녀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더 중요한 얘기를 하지요. 내일 저녁 9시 32분 몇 군데 장소가 추가로 침식이 됩니다."

"세종시 말씀입니까?"

"세종시를 포함한 29곳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29곳?

세종시의 정부청사만이 아니었나?

기자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덩달아 손이 바빠졌다.

차분히 눈을 감는 김현.

기억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애경 장군의 비망록에서 읽었고, 저항군 중앙 컴퓨터에 기록된 일지에서 읽었으니.

'아직 내가 한 일은 거의 없지.'

오늘 폭로 때문에 앞으로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세계 침식을 불러와야 할 성혼이 사냥당할 테니 침식되는 장소도 급격히 줄겠지. 그러나 내일까지는 영향이 없을 거라고 봤다.

천천히 장소를 불러준다.

"미국 예일 대학교, 몽골 징기스칸릉, 그리스 아폴로 신전, 이집트 스핑크스,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세계적인 명소도 아닌 곳도 있었다.

육대주를 망라하는 목록.

기자들이 몸서리를 쳤다. 5월 4일에 침식된 100곳만 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초래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떨까 싶어서.

"저, 정말로 또 건국대학교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예.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기자들을 둘러본다. 아니, 카메라로 보고 있을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을 훑어본다.

가슴이 쓰렸다.

이렇게 경고를 한다 한들 정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닥쳐봐야 안다. 그나마 대한민국 국민은 김현의 행동을 안마당에서 봤으니 진지하게 고민하겠지만, 외국에서는 흥밋거리 해외 토픽쯤으로 치부할 터.

"다시 한번, 불완전하되 완벽한 예지 능력자로서 말씀드립니다. 29곳입니다. 대한민국 시간으로 밤 9시 32분, 지금으로부터 하루뒤에 29곳이 침식되어 은색 돔으로 덮입니다. 각국 정부는 제가 예지한 장소에서 시민들을 대피시키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합니다. 전 분명히 경고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네들의 몫입니다."

이어 진입 방법에 관해 설명.

어차피 현재 지구의 기술 수준으로는 못 만든다. 외계종과 거래하여 얻는 게 최선이었다.

기자들은 엉뚱한 곳에 꽂혔다.

"외계종이라니요?"

"모르셨습니까? 지금까지 가끔 나타났던 괴물들, 그리고 침식된 세계에서 출몰하는 괴물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의 주민, 즉 외계종입니다."

"신촌 병원에서는 유령이 나왔다고 하던데, 그것도 외계종이라고요?"

"예. 엄밀히 말하면 외계종(外界種)은 아니고 이계종(異界種)이지만, 어쨌든 외계의 종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소란스러워지는 기자들.

더 던져주었다.

"각 침식된 세계의 핵을 제거하고 수습한 자는 외계종과 직접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해당 세계에서 냄새를 맡고 쫓아오거든요. 그게 아니더라도 3개월 뒤, 8월 말에 외계종들의 시설물이 지구에 나타납니다."

"그게 무슨......"

"외계인들이 직접 침입한다는 겁니까?"

기자들, 시민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러 영화에서 봤던 외계인 침략을 상상하는 듯.

단호히 머리를 젓는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외계종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혼이고, 자기네 물건이랑 성혼을 교환하려고 하니까요."

"아, 그럼 뭐......"

다들 한숨을 돌린다. 김현의 어투에서, 어쨌든 최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반면 반발하는 자도 있었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뭐라고요?"

"책임질 수 있냐고요. 내일 9시 30분? 그때가 돼서 당신 말대로 침식인지가 뭔지가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할 건데. 손가락이라도 자를 거야?"

처음에는 그래도 존댓말을 쓰더니 나중에는 숫제 반말이다.

김현은 남자를 주시했다.

이런 인간이 꼭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자들.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무형의 기세에 남자가 두 발짝을 물러선다. 남자의 말에 찬동하며 웅성대던 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왼팔을 들었다. 오른손으로 의수를 잡고 떼어낸다.

흉한 절단면을 보여주었다.

카메라가 집중된다. 시민들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김현의 강철 팔이 의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책임질 수 있냐고요?"

비죽이 웃는다.

"전 이미 팔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래도 싸우고 있지요. 인류를 위해서, 저를 위해서. 그리고 이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서."

다시 팔을 장착한다.

키이잉.

기묘한 쇳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한 발짝, 두 발짝......

"전 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괴물이라도 한 마리 잡았습니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구했습니까?"

"이이......"

남자가 뒷걸음질 쳤다.

"말로만 떠들 거면 그냥 닥치고 있으시죠. 당신 같은 작자들 때문에 인류가 발전하지 못하는 거니까. 최소한 내일 9시 32분까지만 가만히 있어 보던가. 입을 털 거면 내일이 지난 다음에나 털라, 이 말입니다."

차갑게 몸을 돌렸다.

정윤식 경위가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

"저, 저기......"

"말씀하시죠."

"이제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말 그대로.

"갑시다."

김애경과 이세희는 하은이를 치료하게 집에 보낼까 생각했으나 조금만 미루기로 했다. 그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발생할 리도 없고 정부 측 인사와의 대담에서 둘이 해야 할 일도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죠."

이때만 해도 김현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과연 누가 나올까?

경찰서장? 지방경찰청장?

경찰 관련 인사가 나오는 것 자체가 멍청이 인증이다. 현 상황을 그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

최소한 장관급 인사는 나와야 한다. 국정원장이든 행정안전부 장관이든 간에. 김현은 자신과 대면할 자가 누군지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을 달리할 작정이었다.

만약에 국무총리나 대통령과 만난다면?

그럼 좋지. 우군이 늘어난다는 뜻이니.

반면 대한민국 정부의 대처는 김현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인도된 회의실에서, 김현은 다소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에 둘러앉은 면면을 둘러보았다.

기록 파일에서 봤던 얼굴들.

국무총리,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행정안전부 장관, 비서실장, 안보실장, 안보실 차장 2명.

여기에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NSC(국가 안전 보장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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