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국가 안전 보장 회의
대한민국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대응.
머릿속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대통령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민기석입니다."
"각성자 김현입니다."
저쪽에서 신사적으로 나오면 이쪽도 신사적으로 나가는 게 도리. 김현도 비굴하지 않되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김애경과 이세희도 마찬가지. 다만 김애경은 담담한 데 반해 이세희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앉으시죠. 기자 회견은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별말씀을. 세상에 경고도 할 겸, 제가 아는 걸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본인이 예지 능력자라고 하셨지요?"
"예, 맞습니다."
"정확도가 얼마나 됩니까? 솔직히 말해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이런 건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보단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게 낫다.
슬쩍 김애경을 보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대통령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어, 잠시만.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아까 TV 보면서도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요."
김애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작년 말에 국회 오셨을 때 안내를 맡았습니다."
"아, 맞아요. 그랬지요! 허허, 이거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서기관이라 들어서 능력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오늘도 아주 큰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요. 제 동생이 정말 대단하죠."
"그렇습니까? 어디,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김애경이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했다.
5월 4일 병원에서 있었던 일. 특히 초 단위로 정확하게 예지를 했다는 대목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이 눈을 빛냈다.
"허어, 대단하십니다. 그럼 혹시 이번 주 로또 번호도 알 수 있습니까? 떼부자 되는 건 식은 죽 먹기겠습니다, 그려."
풍채 좋은 행정안전부 장관이 웃으며 묻는다. 때아닌 질문에 눈총이 쏟아지자 손을 휘저었다.
"농담한 겁니다, 농담. 그리고 다들 궁금하시잖습니까? 미래를 얼마나 내다보는 건지 알고 싶기도 하고."
"크흠!"
"험!"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졌다.
김현도 행정안전부 장관을 한 차례 주시했다. 단순히 실없는 소리를 한 건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단춧구멍 같은 두 눈이 깊숙이 침잠되어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는 뜻.
'제법인데.'
간단히 의도를 간파했다.
예지 능력의 능동성에 관해 물어본 것 아닌가. 성혼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21세기 초의 사람치고는 괜찮은 식견이었다.
"로또 번호는 안 보입니다. 저라고 미래가 다 보이는 건 아니어서요."
"제한적으로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예. 기자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불완전하되 완벽한 예지 능력자입니다. 단, 보이는 미래가 적을 뿐이지 일단 본 미래는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불완전하되 완벽하다......"
대통령은 물론 장관들 모두 그 말을 곱씹는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여태 묵묵히 앉아 있던, 마르고 강퍅한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말씀하세요."
"한성 일보의 기사는 저도 보았습니다. 김 각성자께서는 은빛 돔의 출현을 세계의 침식으로 정의했고, 세계의 침식은 성혼이 폭주하여 일어난다고 했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폭주하는 성혼을 미리 제거하면 어떻게 됩니까? 세계의 침식도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오호.
역시 다들 멍청이는 아닌가 보다. 제한된 정보로도 이런 결과를 도출해내는 걸 보면.
이세희도 그건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애경만 덤덤했다. 김현이 그 방법을 쓰지 않은 건 따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국정원장님, 맞으시죠?"
"예. 정희우입니다."
"국정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한 방법입니다만, 그건 역시 임시방편 밖에 안 됩니다. 핵이 될 성혼 하나만 제거해서는 소용이 없어요. 인근에 있는 성혼이 어차피 폭주해서 수 시간 이내에 침식이 일어납니다. 제가 그것까진 예지할 수가 없으니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되는 셈이죠."
"으흠...... 그렇다면 주변의 모든 성혼을 제거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바로 핵심입니다."
"핵심이라고요?"
"예."
김현은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렸다.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게 하자 10개 봉우리가 된다. 사람의 손과 기계의 손이 움직이는 광경을, 여기 앉은 이들 모두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어떤 지역에 성혼 10개가 있다고 치지요.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숙성되고, 자기들끼리 조금씩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공명한다......"
"예. 그 공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폭주합니다. 따라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성혼 하나만 제거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제거할 거면 다 제거하고, 아니면 폭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핵을 쳐내야지요."
"어떻게 하면 해당 되는 성혼을 찾을 수 있습니까?"
"특수한 장비가 필요합니다. 아니면 탐색 계열 성혼이 있거나...... 불행히도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지요."
"지금은 안 된다는 말씀은 차후에는 가능하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맞습니까?"
"당연하지요."
선선히 대답했다.
외계종들과 거래해서 재료만 구하면 성혼 레이더는 어렵지 않게 만든다. 원 역사에서도 2020년대 중반만 되면 탐색자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빌 정도였으니.
대통령이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오늘 일도 그래서 벌이신 겁니까?"
"대통령님께서 짐작하신 게 맞습니다."
"허허, 이런......"
갑자기 툭 튀어버린 내용에 이세희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무슨 일이냐며 김애경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지만 지금 설명할 수는 없는 일. 김애경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 즉 기자 회견을 뜻한다.
왜 했냐고? 오늘 터뜨린 폭탄으로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다 예측하면서 왜 저질렀냐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성혼을 사냥하고 흡수해서 각성자가 되라고 그랬다. 야생 상태의 성혼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계 침식 위험도가 높아지니까.
시작은 대한민국에서. 며칠만 지나면 인터넷을 타고 세계 전역으로 각성 방법이 퍼질 것이다. 당연히 지구 전체가 조금은 더 안전해지겠지.
"그래도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최소한 의논은 해보시는 게 좋았을 거예요. 여기 김 서기관도 있으니 저는 몰라도 우리 당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겠습니까? 국회의장도 있고, 여러 의원님도 계시니까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김현도 할 말이 있었다.
"글쎄요. 전 정치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허헛!"
"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통령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몇몇 장관들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김애경도 다급하게 김현을 불렀다.
"그렇잖습니까? 사실 이 자리도 저희가 일부러 기자 불러가며 침식된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건국대학교가 복구되는 결과를 만들어서 오게 된 거지, 그게 아니라 대통령님 말씀하신 것처럼 단계적으로 정식 절차 밟았으면 언제 이런 자리에 왔을지 모릅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정부 청사가 침식되는 내일 9시 32분까지 국회의원은커녕 그 보좌관 얼굴도 못 봤을 겁니다."
"크흠!"
"어험!"
뼈를 치는 말에 이 자리의 장관 겸 국회의원들이 민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대통령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목에 힘이 들어간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김 각성자님을 이해합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저는 그동안 고생한 세종시의 공무원들에게 하루 휴가를 주려고 합니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대통령님, 그건......"
행정안전부 장관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대통령이 가만히 머리를 젓는다.
"혹시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저는 여기 김 각성자님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괜히 웃음거리가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까짓거 제가 국민들한테 욕 좀 먹고 말지요. 6·25동란 이후 최대의 위기 상황입니다. 이럴 때 김 각성자님 같은 분이 나타났는데 그냥 무시하는 건 지혜롭지 않은 처사라고 봅니다."
그래도 상황 파악은 어느 정도 하는 모양이다. 성혼을 노리는 외계종들의 침략이 시작되면 세계의 침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사실 그렇다. 벌써 사망이 확인된 이들만 수백을 넘어가니까. 침식된 다섯 곳을 다 합치면 수천 명이 죽은 셈이고.
"김 각성자님, 그리고 김 서기관님과 이 각성자님. 세 분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예, 들어 드리겠습니다."
"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정부청사를 복구시켜 달라는 말씀 아닙니까? 어차피 거기까진 하려고 했습니다. 내일 9시 35분에 정부청사로 진입해서 2시간내에 복구시키도록 하지요."
자신만만한 태도에 장관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허허, 자신 있으신 모양입니다."
"정부청사 내부를 미리 봤거든요. 어디로 가서 어떤 괴물을 쓰러뜨리면 되는지 아니까 쉽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김 각성자님의 말처럼만 풀리면 원이 없겠습니다."
이야기가 슬슬 끝나는 것 같다.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대통령이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김 각성자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조언이라니요?"
"이번 사태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 당장 내일 세계적으로 29곳이 침식된다고 하니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언제까지냐고 할 것도 없습니다. 100년 넘게, 최소한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성혼과 각성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늘어납니다. 외계종들이 괜히 지구에 찾아오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영구히 유지되니까 찾아오지요."
다들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냥 한 번 있는 이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런다 하니 암담했던 것.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각성자에 외계종...... 하나만 들어도 답답한데 둘을 다 해결해야 하니 골치가 아픕니다. 혹시 좋은 정책이 있으면 고견을 들려주세요."
정책이라.
김현은 역사 속에서 지구의 여러 나라가 시행했던 정책을 떠올렸다.
여러 종류의 정책이 있었다. 어떤 나라는 실패하여 일찌감치 지옥으로 떨어졌고, 어떤 나라는 성공하여 꽤 오래 저항을 했다. 결국에는 모두 외계종의 목장 신세가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정책을 입 밖에 냈다.
"헌터 등록제를 시행하시는 게 좋습니다."
"헌터 등록제라 하심은?"
"각성자 등록제라고 해도 좋겠네요. 말 그대로입니다. 각성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시되 억압하는 쪽으로 가셔서는 안 됩니다. 세금 혜택이나 주고, 상금이나 퍽퍽 땡겨주세요. 그럼 전국의 성혼이 줄어들면서 침식 위험이 줄어들고, 폭주하는 성혼이 생겨도 각성자들 선에서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흠, 각성자로 이뤄진 특수부대를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원 역사에서 대한민국이 취했던 방법.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계 침식에는 효과적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외계종이 도래하고, 외계종들은 성혼을 노린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군대식 육성으로는 외계종들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외계종들은 단순히 성혼을 거래하러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대통령님, 생각해 보십시오. 성혼은 우주에서 제일가는 보물입니다. 외계종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혼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결국 무슨 수를 쓰겠습니까?"
"전쟁이라도 벌인다는 말입니까?"
"예. 처음에는 평화적, 우호적으로 다가오겠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옛날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당장 내일의 일도 믿기 어려운데 외계종에 우주 전쟁, 식민지 얘기까지 나오니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거 참."
행정안전부 장관이 혀를 찼다.
"아무리 예지 능력자라고 해도 너무 나간 거 아닙니까? 제국주의 외계인이라니요. 더구나 식민지? 무슨 외계인들이 그렇게 인간적이에요? 차라리 지구를 테라포밍해서 자기네 터전으로 만든다고 하시면 그럴 듯 하겠습니다."
"장관님께서는 제 말을 못 믿으시나 봅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세계 침식은 직접 보여주신 게 있으니 그렇다고 치고, 외계인은...... 어휴."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 행정안전부 장관.
김현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전된 것도 대단한 거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괜히 김애경과 이세희를 데려온 게 아니니까. 실은 어떤 장면 하나를 연출하려고 그랬다.
시계를 본다.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환하게 밝혀놓은 형광등이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것은 전조.
어떤 존재가 출현하기 직전의.
"그렇다면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뭘 말입니까?"
"외계종을요."
"뭐요?"
행정안전부 장관이 놀라 눈을 부릅뜬다.
잠시 시간을 쟀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것을 신호로 손을 휘저었다.
"소개합니다. 천상계, 빛의 신전 소속 명월천(明月天)입니다!"
팟!
눈을 찌를 듯 강렬한 빛이 터졌다.
빛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녀린 몸에 하얀 날개를 가진 존재.
천사, 명월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