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31화 (31/200)

# 31

미국행

상황은 번갯불처럼 진전되었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더 김현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김현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낙심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그 날 저녁 미국 대사가 찾아왔다. 30분을 꽉꽉 채운 면회 후, 미국 대사가 유리창 너머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돌아갔다.

이후에 일본, 중국, 러시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대사가 찾아왔으나 김현이 면회를 거부했다. 이미 얘기가 끝났고, 기왕 갈 거면 가장 크고 강한 나라로 가는 게 좋으니까.

미국의 대처는 빨랐다.

1시간쯤 후에 구치소에서 풀려난 것.

사과는 없었다. 묘하게 냉랭하게 보는 시선 사이에서 쫓기듯 경찰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물론 김현은 그 와중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지만.

"Mr. 김!"

덩치 좋은 백인 사내가 김현을 끌어안았다.

"고생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미합중국이 Mr. 김을 전적으로 지원할 테니 오늘 같은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조금 피곤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도 될까요?"

"그럼요! 내일 아침 비행기를 준비해놓겠습니다."

"내일 아침이요? 그렇게 빨리?"

"예. 우리 미합중국의 시민들이 Mr. 김이 어서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다.

아마 처음에 김현이 등장했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다가 김현이 귀화 용의를 밝히자 바로 결정해서 행동하기 시작했고.

"그래도 내일은 너무 빠릅니다. 저도 나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모레 아침으로 하죠."

"음......"

미국 대사가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모레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 정보팀 분석으로는 내일 오후만 되어도 Mr. 김이 대한민국을 벗어나기가 번거로울 거라고 합니다."

설마, 정부에서 수작을 부리는 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미국에서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오전에 경찰서 앞에서 시민들이 연행되는 Mr. 김을 구하려고 했지요? 그것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Mr. 김을 가둬놓으려고 한다는 게 조금 다릅니다만."

입이 썼다.

시민들이 경찰서 앞을 막고 내려라를 연호했을 때는 김현도 조금은 감동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때 그 감정 하나로 결정된 사항을 뒤엎을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미국 대사가 까만 리무진 한 대를 제공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물건이다. 경호원이 열어준 뒷문으로 들어가니, 둥근 소파와 함께 고급 양주가 가득 찬 바(Bar)가 눈에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좌석. 그러나 분위기는 좌불안석이었다. 김애경이 무거운 얼굴로 김현을 보고 있었기 때문.

"결국, 이민을 선택한 거니?"

전에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

이세희가 어쩔 줄 몰라 둘만 돌아본다. 김애경과 이세희 모두 영어를 수준급으로 해서 김현과 미국 대사의 대화를 알아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김애경은 현시대 최강의 전력이다. 김애경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미국으로 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왜?

김애경, 애경 장군이야말로 성혼 각성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인류의 한계는 5성이다. 한계를 넘으려면 환골탈태, 인체 개조, 영육 개변 등의 방법이 필요했다. 이걸 원 역사에서 밝혀내고 정립한 뒤 공개한 게 바로 애경 장군.

추후 저항군에서 집단 지성의 연구를 통해 8성까지 가는 길을 개척한다. 하지만 9성만큼은 요원했다.

그 지식이 있으니 김현도 8성까지는 쉽게 간다. 하지만 9성은? 성혼의 끝, 별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게 되는 9성은?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인류 최고의 각성자였던 애경 장군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김애경이 중요했다. 향후 인류의 자강 독립에서 열쇠 역할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

"누나, 하나만 묻자."

"말해 봐."

"누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뭐야? 국가? 민족?"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다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중요하긴 하지만, 하은이가 가장 중요하지."

당연한 말.

이 세상에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식 말고 다른 것을 더 우선순위로 놓을 수 있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묻는다.

"역시 그렇지? 그럼 우리 부모님이랑 비교하면 어때? 그래도 나라가 더 중요해?"

"말 돌리지 말고. 미국 가기로 한 거 맞아?"

"맞아. 안 그러면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든."

"뭐?"

깜짝 놀라는 김애경.

김현은 가만히 두 손을 뻗어 김애경의 손을 잡았다. 사람의 손과 기계의 손이 동시에 느껴지자 김애경이 몸을 부르르 떤다.

"누나, 이번만큼은 내 결정을 따라줬으면 좋겠어. 절대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야. 앞뒤 다 재보고 우리와 우리 가족, 그리고 인류를 위해 결정한 거야. 누나는 알고 있잖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김애경이 고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특히 김현의 예지 능력에 대해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강하게 실감한 김애경이다. 일단 한 번 일어난다고 한 일은 반드시 일어났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동의하고 말았다.

"후우, 알았어. 그래도 난 귀화는 안 할 거야. 알았지?"

그 정도쯤이야.

"알았어. 선생님, 선생님도 같이 가실 거죠?"

"저, 저도요?"

이세희가 놀란 얼굴로 김현을 본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선생님도 같이 가요. 대한민국에 남아 있어 봐야 기자들이랑 정치인들한테 시달리기만 할걸요."

"그래도......"

"선생님. 지금 세상에서 누구 옆이 가장 안전한지는 아시죠? 안 오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갔으면 하네요."

이세희가 입술을 오물거린다. 국적을 바꿀 생각을 하니 고민되기는 하는 모양.

뜻밖에도 김애경이 이세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됐으니 나랑 같이 가자. 오래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현이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세희 너까지 국적을 바꿀 필요는 없잖아? 나도 미국은 가지만, 여전히 한국인인걸."

"그,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미국이 원하는 건 현이지, 우리 둘이 아니야."

그 말에 얼굴이 활짝 펴진다. 평소 이민 갈 생각을 하던 사람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보니 이제 부담감이 사라진 것.

이걸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설득 완료. 김현은 리무진 소파에다가 몸을 푹 묻었다.

'아깝긴 하네.'

22세기에 세웠던 연막용 시공 회귀 계획.

아군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으니만큼 그 양과 질이 엄청났다. 그게 있었으니 김현이 예지 능력자로 활동할 수 있었지. 2018년에서 2030년 사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모든 중요한 사건은 다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인재 역시 마찬가지. 원 역사에서도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은 그 실력이 높기로 유명했다. 김현은 대한민국의 각성자 수천 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장점은 해외로 나가는 순간 상실한다. 김현은 세계사도 줄줄 꿰고 있지만, 시공 회귀 계획에 담긴 대한민국 역사만큼은 아니고, 각성자 역시 세계구, 전국구 일부는 알아도 지역구까지 알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발목 잡히는 것보다는 낫지.'

대통령이 완벽하게 김현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대통령은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터. 현실의 정치인들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조금 바쁠 것 같아."

"왜?"

"신은서 기자랑 인터뷰도 하고, 건국대 병원 입원한 경태 씨도 보고 와야지."

"아, 맞다. 경태......"

"경태도 데려갈 거예요?"

"그럴 생각인데, 경태가 어쩔지 모르겠네요."

김애경은 혈육이고 이세희와는 지난 시간 쌓아온 전우애가 있다. 반면 서경태는 잠깐 침식 세계를 같이 헤맨 게 다니, 과연 따라오려고 할지 모르겠다.

생명의 은인? 그걸 내세워 강압할 수는 없지. 서경태는 자기만 바라보는 아버지도 있으니.

띠리리링. 띠리리링.

김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익숙한 이름이 액정에 떠 있었다.

[신은서]

짧은 통화 끝에 인터뷰가 결정되었다.

지금 당장, 건국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리무진이 셋을 건국대학교 근처에 내려주었다. 약속한 카페에 가서 조금 기다리자 신은서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아뇨. 괜찮습니다. 저희도 막 왔어요."

벌써 저녁 7시.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현 각성자님. 오늘 큰일을 겪으셨죠? 총포법 관련해서 긴급 체포되셨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셔도 괜찮을까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는 신은서의 눈이 기대에 차 있다.

두 번째 독점 인터뷰. 그것도 명성이 극에 달한 시점 아닌가. 어떤 내용이 나오든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그걸 보니 조금은 미안해진다.

지금부터 말할 내용이 썩 좋지만은 않을 테니까.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닙니다. 어떤 정치인이 저를 음해했더라고요."

"네? 음해요?"

"네. 아, 증거를 가져올 걸 괜히 던져 버렸네요."

대통령에게 던졌던 넥타이핀이 새삼 아쉽다.

"어쨌든 대통령님도 오셔서 절 설득하려고는 했는데요, 결국 조건이 안 맞아서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결렬됐다는 말씀은......"

"저, 곧 미국으로 떠납니다."

텁!

신은서가 들고 있던 스마트펜을 떨어뜨렸다. 김애경이 주워다가 신은서에게 쥐여 주었다.

"떠, 떠난다고요? 미국으로?"

"네, 안 그러면 제 부모님이 위험해지셔서 어쩔 수가 없어요."

"서, 설마요."

김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이번에는 어쩔지 몰라도, 원 역사에서 부모님이 사망한 건 사실이니까. 인간들에 의해 죽은 건 아니고 김애경이 정부의 명령으로 해외 출장을 간 사이 괴물들에게 죽은 것이긴 해도.

신은서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그런 신은서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미국과는 이야기를 다 끝냈어요."

"그, 그런...... 설마 귀화하시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럼 이 시기에 미국 여행을 가겠습니까? 귀화하는 게 맞습니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는 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죠."

김현은 몇 분 동안 억울함을 토로했다. 잘하고 싶었다고, 기왕이면 고국에서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슬쩍 정보를 흘렸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음해한 당사자라는 것을 돌려서 말하고 그 비리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 미국에서 어차피 가만히 놔두진 않겠지만 김현의 사소한 복수라고 하겠다.

신은서는 거의 혼이 나간 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김현의 미국행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

"사설은 여기까지 하죠. 제가 곧 비행기를 타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예고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 예고요?"

"네. 일단 다음 침식은 1주일 후에 일어납니다. 총 15곳이고요."

김현의 가장 큰 능력, 예지.

신은서의 손이 바빠졌다. 김현의 미국행만큼이나 중요한 특종이었으니까.

곧 떠날 나라, 왜 미래 정보를 남기느냐고?

나는 할 만큼 했지만, 정치인들 때문에 떠난다는 뜻을 담은 메시지다. 김현의 예고가 맞으면 맞을수록 시민들이 더 분노하겠지. 이 또한 한바탕 홍역을 앓아보라는 김현의 사소한 복수.

15곳을 일일이 불러주었다. 이번 침식은 100% 원 역사와 같이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걸 듣던 김애경이 옆에서 참견했다.

"우리나라는 없네?"

"응, 없지. 그래도 신 기자님께서 이건 꼭 기사화해주셔야 합니다.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도 살아야지요."

"네...... 알겠어요."

"이걸로 5월 침식은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6월에는 고생 좀 하실 것 같습니다. 6월에 꽤 많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어, 어떤 일들이요?"

"많죠. 대침식, 대범람......"

처음 듣는 용어들.

그러나 얼핏 듣기에도 심상치가 않다.

신은서가 마른 침을 삼켰다.

"우선 대침식부터 말씀드리죠. 5월 4일에 일어났던 수준으로, 100군데 이상 침식이 되면 대침식이라고 합니다. 대략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어나지요. 아, 지금 미리 말해두지요. 6월 6일, 7월 10일, 8월 15일에 대침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주기로 계속 일어나고요."

"6월 6일, 7월 10일, 8월 15일......"

"장소는 아마 제가 100% 예지하지 못할 거예요. 그때쯤에는 제 예지가 조금 흔들릴 거거든요. 그래도 날짜는 확실합니다. 그리고 대침식 때는 반드시 대범람이 따라오니까 대비해야 하고요."

"대범람이요?"

"예. 침식된 세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면서 괴물들이 강해지는 건 아시죠? 제가 액션캠으로 밝혔으니까. 그러다가 완전히 성숙해서 완숙 상태가 되면, 대침식 때 나오는 파장에 공명하여 세계의 벽이 무너집니다. 침식 세계 내부의 괴물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는 거지요."

"마, 말도 안 돼"

신은서는 물론 김애경과 이세희의 눈도 흔들린다.

세계 침식은 한적한 곳에 이뤄지기도 하지만 도심 한복판에 생기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신촌 병원과 건국대학교, 정부청사 모두 그랬지 않나.

거기서 괴물들이 뛰쳐나온다고?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예상된다.

말 그대로 악몽.

김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몰랐으면 피해가 컸겠지만, 제가 알려드렸잖습니까? 군대로 포위하고 기다렸다가 화력을 퍼부으면 그만이에요. 나오는 괴물들 대부분이 1성에서 2성이고, 3성 서너 마리가 나오는 게 전부니까 미리 대비하면 대처할 수 있어요."

"다행이에요."

"아, 이것도 7월 정도까지입니다. 8월쯤 되면 4성 괴물도 튀어나와요. 4성 괴물은 재래식 무기로 해결할 수 없으니까 각성자 전력을 꾸준히 올려놔야 합니다."

원 역사에서 칠대 괴수라고 불리는 괴물들.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 당시에 4성 등급 각성자가 존재하지 않아 더더욱 그러했고. 결국에는 수개월 후 외계종의 도움을 받아 처리해야 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인류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그건 내 거야.'

지금 시점에서는 가끔, 아주 가끔 침식 세계에 출몰하는 4성 등급 떠돌이를 제외하면 4성 성혼을 얻기가 힘들다. 당연히 김현은 그 칠대 괴수를 독식할 작정이었다.

"재래식 무기가 안 통해요?"

"예. 4성 괴물쯤 되면 영체화니 초재생, 시간 왜곡으로 피해가거든요."

원 역사에서는 대한민국이 직접 4성 괴물에게 습격당하는 일은 드물었다. 마음껏 싸돌아다니던 비철룡과 태산호가 맞붙어서 충청남도 공주시가 붕괴한 게 다니까.

"정말, 정말 미국 가세요?"

미련이 남은 듯한 신은서의 마지막 질문.

단호하게 대답했다.

"갑니다."

이것으로 인터뷰는 종료.

당연히 격랑이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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