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새로운 성혼
[속보 : 김현 각성자 미국 이민 예정]
[긴급 체포, 모 정치인의 음해 공작으로 밝혀져]
[김현 각성자, 대침식과 대범람을 예지]
[6월 6일, 대침식이 예고되다.]
아직은 한성일보에 갓 게재된 정도.
그러나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그게 현실로 몰려오기 전, 김현 일행은 건국대학교 병원에 도착했다.
"어? 혹시 김현 각성자님 아니세요?"
병원 원무과에 들르자마자 시선이 집중된다.
김현만 아니라 셋 모두가 유명인. 여기저기서 숨죽여 탄성을 질렀다.
"각성자들이다!"
"누구?"
"왜, 건국대학교 복구시킨 사람들 있잖아!"
"어, 진짜다. 진짜! 나 TV에서 봤어!"
"체포된 거 아니었어?"
"풀려났겠지. 지금 저 사람들 가둬두는 나라가 어디 있겠어?"
괜히 시선이 쏠리는 건 사양이다.
낮은 목소리로 원무과 직원에게 속삭였다.
"서경태 씨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데 어디 계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서경태 씨요? 어...... 아, 그분이요? 잠깐만요. 금방 찾아드릴게요."
얼굴이 보증수표가 되어서일까? 무슨 관계냐고 묻는 일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리고 서경태가 입원해 있는 병실 호수를 가르쳐 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하자 원무과 직원이 수줍게 김현을 불렀다.
"저......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나.
21세기 초중반의 각성자들은 연예인보다 더한 인기를 누렸다. 그 단면을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사인.
"그러시죠."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원무과 직원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어디서 커다란 종이와 펜을 꺼내서는 사인을 요청한다.
김현만 아니라 김애경과 이세희에게까지도.
둘 다 어색한 얼굴로 사인을 했다. 다른 직원들은 물론 환자와 보호자들까지 몰려들어서 제법 오래 시간을 빼앗겼다. 거의 30분은 지나서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된다.
"아, 힘들었다.
"누나, 익숙해져. 앞으로는 더 심해질걸."
"설마. 건국대라서 그런 거 아냐? 다른 곳에서도 이런다고?"
"미국 도착하면 알겠지. 공항 내리고 놀라지나 마."
"에이, 무슨 미국에서까지 그러겠어? 우리나라도 아니고."
띵동.
목표 층에 도착.
"들어오세요."
문을 두드리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들어가서 인사하자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던 서경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형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누님들도 오셨네! 여기 와서 앉으세요. 과일도 드시고요."
고작 며칠 지났는데 치료를 잘 받았나 보다. 꾀죄죄하던 몰골이 사람 태가 났다. 별의 관찰 성혼에서 보이는 상태 항목도 쇠약에서 정상으로 바뀌었고.
김애경이 병실을 둘러보았다.
"아버님은?"
"아버지는 부산 내려가셨어요. 일이 바쁘셔서요."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헤헤,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다 보니까 좋아지더라고요. 다행이죠, 뭐."
서경태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어딘지 모르게 드리워진 그늘.
겉으로는 쾌활한 척 웃고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을까.
열흘 가까이 침식된 세계에 고립되어 있으면서 온갖 경험을 다 겪었을 테니...... 어쩌면 친구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봤을 수도 있고.
새삼스레 병실을 둘러본다.
널찍한 특실이다. 일개 대학생이 묵기에는 호화로운 공간. 더구나 병실 곳곳에 고급 난초 화분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화분마다 깨알 같이 새겨진 글씨들.
무슨 무슨 정당, 국회의원, 시장......
하여간 숟가락 얹을 곳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다.
김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경태가 머쓱하게 웃었다.
"총장님께서 신경 써 주셨어요. 그 고생을 했는데 몸이라도 편해야 한다고...... 그런데 썩 편하진 않네요."
"그렇죠.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편해야 몸이 편해지는 법이니까."
잠시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눴다.
날씨 이야기, 근자에 있었던 총포법 관련 이야기, 혹은 병원 밥이 별로 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그러다 슬슬 방향을 틀어갔다.
"경태 씨. 실은 제가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신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인데요?"
"저, 내일 미국으로 떠납니다."
"미국이요?"
서경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김현은 말없이 무음 상태의 TV를 가리켰다.
때마침 오늘 오전에 있었던 김현의 긴급 체포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저거 때문이에요?"
"그렇죠. 저도 잘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그냥 마음 편하게 훌쩍 떠나려고요."
"어...... 형님, 제가 이런 쪽은 잘 모르지만요. 미국 간다고 저런 일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요."
"없지는 않죠. 그래도 우리나라보다는 낫습니다."
미국에서도 권력 다툼과 주도권 다툼은 있다. 그건 인간 사회에서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원 역사의 경술팔적과 같은 인류팔이는 없다는 것.
"그래서 말입니다만 경태 씨, 저희랑 같이 갈 생각은 없습니까? 저번에 움직이시는 걸 보니 충분히 자질이 보이던데요."
단도직입적인 권유.
서경태의 얼굴이 굳었다. 몇 번이나 낯빛이 변하는 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듯하다.
뜻밖에도, 마지막에는 머리를 흔들고 만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 다시는 그런 괴물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김현은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측했으니까.
당장 얼굴만 봐도 그렇다. 저 그늘, 저것은 다름 아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표출이었다. 지금 서경태에게는 휴식과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아니, 왜?"
이세희가 갑자기 발끈하며 나섰다.
"야, 넌 은혜도 모르니? 너 혼자 건국대에 갇혀 있을 때 우리가 안 들어왔으면 넌 죽은 목숨이었어. 그런데 너 혼자만 쏙 빠져나가겠다고?"
"그건......"
서경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세희가 더 쏘아붙이려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선생님, 그만 하세요."
"김현 님! 하지만 이건......"
"그만두세요. PTSD에요."
그 단어에 이세희가 몸을 경직시켰다.
본인이 간호사 아닌가. PTSD에 대해서는 잘 안다. 과거 큰 교통사고를 겪은 환자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지 겪어본 바 있고.
"미안해, 경태야. 그런 건 줄 몰랐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서경태가 눈을 둥그렇게 뜬다. 그것도 잠깐 손사래를 치며 이세희를 말렸다.
"아니에요, 누나. 누나는 그렇게 느끼실 수 있죠."
"내가 잘 모르고 실수한 거니까 너무 개의치 마. 쉬고 싶을 때까지 쉬어. 훌쩍 여행도 다녀오고. 미국 놀러와도 돼. 누나가 잘해줄게. 알았지?"
갑자기 다정해진 말투에 서경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언제 그랬냐 싶게 자신을 다잡으며 활짝 웃는다.
"네, 누나!"
김현은 서경태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알았다고 그냥 보내줄 수도 있다. 서경태 정도면 향후 뛰어난 각성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대체할 각성자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머리는 적당히 관계만 유지하고 보내라 하고 있는데 가슴이 쿡쿡 쑤셨던 것.
'김현, 너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왜?
곧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령관의 경험이라고 할지, 각성자의 직감이라고 할지 그 어떤 무엇이 서경태와 이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고 있던 것.
22세기에 이런 말이 있다. 각성자의 직감을 무시하는 것처럼 바보짓이 없다고.
망설이다가 들고 온 가방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지금까지 잘 써먹은 귀신 깃든 단검.
그걸 건네자 서경태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형님?"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지 능력자이긴 한데, 앞날을 다 아는 것은 아니어서요. 사실 제 예지에서 경태 씨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손에 단검을 꼭 쥐여 주며 말했다.
"경태 씨. 다시는 그런 괴물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결론부터 말해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2018년을 사는 한, 어떤 식으로든 괴물들과 엮이는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나라를 가든, 어느 산골 구석에 숨든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서경태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 그건 서경태도 안다. 그러나 사람이란 항상 이성적으로만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불 보듯 뻔한 미래를 앞에 두고도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때가 아주 많다.
특히 지금 서경태처럼 정신에 상처를 입었다면 더더욱. 불길이 다가오는 걸 뻔히 보면서도, 덤불에 머리부터 숨기고 보는 것이다.
"경태 씨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언젠가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한테 연락하면 당연히 달려가겠지만, 혹시 그렇게 되지 못할까 봐 드리는 겁니다."
단검이 아깝지 않으냐고?
별로.
사실 더는 쓸모가 없다. 내일 미국으로 가면서 새로운 근접 무기를 만들 작정이니까. 그것도 귀신 들린 단검과는 상대가 안 되는 것으로.
"흐윽, 형님!"
서경태가 끝내 눈시울을 붉힌다. 좋은 말로 위로해주었다. 아무래도 언젠가 서경태에게 정말로 위기가 닥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이 지나서야 서경태의 병실을 나섰다. 김애경이 김현을 한 번 보더니 묻는다.
"경태한테 진짜 무슨 일 생기는 거야?"
"아마도."
"확실한 것은 아니고?"
"응.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하긴 넌 예지 능력자니까......"
김애경도 이세희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 순간 김현은 가슴을 옥죄는 답답함을 느꼈다.
예지 능력자라고? 그 무슨 헛소리를!
내가 아는 건 과거의 역사적 사실뿐이다. 그걸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풀어놓은 게 내 예지 능력의 진실. 내게 예지 능력이라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가 뜨겁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각성?'
새로운 성혼을 각성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
하지만 어째서? 새로운 성혼을 흡수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깨달았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했지.
김현은 스스로를 예지 능력자로 포장했다. 사람들은 그걸 진실로 믿었다. 그 믿음이 지구 성혼의 근원을 뒤흔들고, 이제 김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성혼 자체가 인간의 영혼에서 빚어지는 힘이다. 김현이 건국대학교 앞에서 고고성을 터뜨렸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김현도 처음 겪는 일. 눈을 감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현아?"
"김현 님?"
김애경과 이세희도 상황을 파악했다.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김현의 앞뒤를 막아섰다.
폭풍과 같은 기세가 김현에게서 번지고 있었다. 병원 복도를 오가던 환자들이 놀라 웅성거린다. 간호사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뛰어왔다.
들끓던 힘이 점차 가라앉았다. 김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자 한 차례 별빛과 같은 안광이 반짝였다가 본래대로 되돌아간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아니, 좋아."
"어떻게 된 거야?"
"별 것 아냐. 예지 성혼을 하나 얻었어."
왼쪽 손바닥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주르륵 올라오는 항목 중 새로 추가된 것이 있었다.
[성혼] 예지(요정, 1★)
예지 능력자라고 말하고 다녔더니 정말로 예지 성혼이 생겼다.
필요하면 적당히 구해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지가 않다. 김현에게는 예지 계열 성혼에 대한 적합도가 없었다. 지금 이건 물기 하나 없는 모래밭에서 아름드리나무가 저절로 자라난 것과 같은 기적이었다.
김애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예지몽 말고 다른 방법으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거야?"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야."
"대단하다 너. 야, 그럼 이번 주 로또 번호 알아낼 수도 있겠네?"
"그놈의 로또는 진짜. 지금 내 수준으로는 택도 없어."
1성 등급으로는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몇 분에서 몇십 분 뒤 상황을 단편적으로 읽어내는 게 전부. 복권 당첨 번호를 읽거나 주식 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싶다면 4성 등급은 되어야 한다.
이쪽을 구경하는 환자들과 간호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병원을 빠져 나왔다.
"현아!"
늦은 시각, 어머니가 맨발로 뛰쳐 나와 김현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같이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