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35화 (35/200)

# 35

펜타곤 –1-

김현은 창밖을 가리켰다.

"누나. 저기 봐."

워싱턴 D.C.를 가로지르는 포토맥 강 서쪽에 유명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정오각형 형태. 12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넓이. 미군의 심장.

펜타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없다. 대신 거대한 은색의 돔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포토맥 강 쪽으로 두 개의 모서리만 삐죽 나와 덧없이 자기 존재를 소리칠 뿐.

사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이 번개처럼 타결된 것이다. 펜타곤이 침식된 까닭에 미국은 몸이 달아 있었으니까.

"어......"

이세희가 바짝 고개를 내밀더니 눈을 가늘게 뜬다.

"백악관이랑 엄청 가깝네요?"

"그럴 겁니다. 5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으니까."

"으...... 완전 코앞이다."

"그래서 Mr. 김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저기 파크웨이가 보입니까?"

로날드 레이건 공항에서 펜타곤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사람들이 공항부터 길 양옆에 꽉꽉 차 있었다. 저마다 성조기를 들고는 하늘을 향해 흔드는 중이다. 오전 9시, 이른 시간인데도 김현의 도착 소식을 듣고 몰려나온 것.

힐끗 활주로를 보니 크레인까지 동원해 대형 성조기를 걸어놓은 참이다. 기자들이 수백 명 가까이 몰려와 그곳을 촬영하고 있었다. 아마 저곳에 미국 대통령이 있겠지.

'하여간 쇼는 잘해.'

원래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유명해진 인물이니 그럴 만도 하다.

끼기기긱.

미군기가 더욱 가파르게 각도를 기울였다. 이윽고 활주로에 닿자 격렬한 진동이 기체를 뒤흔들었다.

"우아아아!"

비행기를 처음 타는 하은이가 괴성을 질러댔다. 김애경이 그걸 보고 미소를 짓는다.

"이제 내리면 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대통령께서 들어오실 겁니다."

5분 뒤 미군기의 문이 열렸다.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덩치 큰 백인 남자가 들어온다.

TV로 보아서, 기록 파일로 보아서 익숙한 현 미국 대통령. 나이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인데도 피부가 탱탱했다. 김현을 보자마자 미소지으며 손을 내민다.

"미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Mr. 김."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대통령."

의례적인 인사. 가벼운 포옹.

이어 김애경과 이세희, 한철군 및 김현의 가족들과도 짧게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 대통령의 눈은 김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장담하건대 우리 미합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크고 위대해서, 그런 속 좁은 작자들이 판치는 곳이 아니거든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자, 이제 슬슬 나갑시다. 기자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대통령이 김현의 손을 직접 잡고 미군기 밖으로 나갔다. 막 문을 나서서 계단에 깔린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요란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펑펑! 퍼퍼펑!

대한민국에서도 엄청났지만, 미국에서는 더 무시무시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경박한 은하수 폭죽을 터뜨린 것 같았다. 눈을 찔러대는 섬광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겨우 억눌렀다.

대신 웃었다.

환하게, 아주 밝게,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대통령이 잡지 않은 왼손이다. 그래서 더욱 빛났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금속 의수가 빛을 반사했으니까.

"우아아!"

쇼는 미국 대통령이 김현의 손을 들었을 때 정점에 달했다.

레슬링 시합에서 새로운 챔피언의 손을 들 때와 같다고 할까. 자연히 양손을 번쩍 들게 되자 기자들이 함성을 지른다.

아니,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저쪽, 공항 건물 너머에서도 떠들썩한 함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지금 이 장면이 대형 모니터 등을 통해 송출되는 모양.

이어서 김애경과 이세희도 모습을 드러냈다. 환호성이 쏟아지지만, 처음 김현이 나타났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군용기 옆에는 작은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늘 위에서 보았던 대형 성조기가 그 뒤에 배경처럼 걸렸다. 미국 대통령이 김현을 단상 위에다 데려다주고는 어깨를 두드리고 내려간다.

기자들이 김현의 입에 집중한다. 플래시 세례만 쏟아질 뿐 아무도 말이 없다. 비행기 운항마저 중단된 지금, 환호성도 그치고 아스라한 바람 소리만 귓가를 스쳤다.

한 번 쭈욱 주위를 훑어본다.

기자들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미국 대통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온다. 정면에는 로날드 레이건 공항 건물이 보이고, 그 옆으로 이질적인 색채가 눈을 찌른다.

은빛 돔, 펜타곤을 잡아먹은.

원래대로라면 보일 수가 없는 구도지만 은빛 돔의 높이가 높은 까닭에 여기서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악관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정 및 환수 성향 각성자, 김현입니다."

시선을 은빛 돔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이쯤 되자 기자들도 슬슬 눈치를 챈다. 몇몇 기자가 슬쩍 자리를 옮겼다. 옆에서, 김현이 멀리 눈길을 던지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 송출했다.

"많은 분이 실감하셨겠지만, 인류는 유사 이래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세계대전도, 냉전 시기의 핵 위협도 지금의 위기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요. 바로 저기, 미국의 심장이 침식되어 있으니까요."

왼손을 뻗는 김현.

그 끝에 정확하게 펜타곤이 걸려 있었다.

"저는 미국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봉사를 바로 저곳, 펜타곤을 복구함으로써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서 많은 분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여행을 떠나셨지만, 그분들의 유해나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습니다."

일부러 감정을 깔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다. 다민족 다인종 국가라서 그런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군대와 얽히면 더더욱 그렇고.

하긴 나쁜 건 아니지. 목숨 걸고 나라 지키는 군인들에게는 어떤 사회적 존경을 보내도 모자라니까.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간다.

"많은 말을 드리고 싶지만, 또 많은 말이 듣고 싶으시겠지만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자랑스러운 미국의 군인들이 가족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늦춰질 테니까요. 여러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기자들이 호응하며 손뼉을 쳤다. 손을 흔들어 주고 내려왔다. 대통령이 김현을 한 번 포옹하고는 단상에 오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대통령의 연설도 짧았다. 그래도 양념은 많이 쳤다. 김현을 영웅 중의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먼 길을 날아와 피곤한데도 모든 환영 연회와 만찬을 거절하고 펜타곤으로 들어가겠다고 한 의중을 밝힌 것.

이 얼마나 위대한 봉사 정신이며, 열정적인 행동이냐며 추켜세울 때는 기내식으로 먹은 스테이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도 금칠을 해대는 게 민망해서.

"미국의 영웅이 펜타곤으로 갑니다! 지금, 바로!"

급기야 지붕이 뻥 뚫린 차량을 동원하여 카퍼레이드를 시작한다. 김현의 가족들과 한철군은 빠졌지만, 김현과 김애경, 이세희는 꼼짝없이 차량 위에 타야 했다.

"너무 오글거리지 않아요?"

이세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나마 줄인 게 이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대한 환영 행사를 기획했었다.

근처 기지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색색 구름을 뿌리며 에어쇼도 벌이고, 자주포를 몰고 와서 예포도 몇 방 쏘고, 군인 가족들이 공항 안까지 들어와서 포옹도 하고......

여기에 의회 연설과 백악관 만찬, 연회까지 하려는 걸 겨우 말렸다. 지금 그런 게 문제냐며, 펜타곤 복구가 최우선 아니냐며.

"그래서 바로 펜타곤 가는 거야? 난 그래도 하루이틀 쉴 줄 알았는데."

"쉬는 게 쉬는 게 아냐. 정치인들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정치인들이랑 얽히라고? 백악관에도 얘기해뒀어. 실무적인 얘기할 거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잘했어. 하긴 그게 낫겠다."

이 와중에도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길 좌우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환영합니다! Mr. 김!"

"미합중국을 다시 위대하게!"

"외계인들 다 죽여버려!"

"펜타곤을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밟으면 5분 안에 도착할 거리.

카퍼레이드 중이라 30분이나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외곽 길로 한번 빠진 후 휙 돌아가자 바로 펜타곤 정면이었다.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도로에 세운 돋움 팻말, Pentagon 여덟 글자가 선명하다. 하지만 그 뒤로는 웅장했을 인공 구조물이 아니라 은색 돔이 돋은 상황이었다.

차에서 내렸다.

미군기에서 내릴 때부터 장비를 갖춘 뒤. 미군들이 다가와 보급품 배낭을 건넨다. 모든 군장을 갖춘 다음 단추 형태의 초소형 액션캠을 가슴에 다는 것으로 준비 완료.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하자 이 장면 역시 기자들에 의해 무수히 찍혔다.

"건투를 빕니다, Mr. 김."

"감사합니다."

"더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고 기회가 되겠지요."

배낭을 메고 펜타곤의 은빛 돔으로 접근한다.

오른손에 쥔 백호검이 웅웅거리며 울었다. 그러다가 타닥타닥 흰색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합!"

가벼운 기합과 함께 올려친다.

호왕갑의 근섬유가 크게 부풀었다. 막대한 힘이 폭발하듯 증폭되면서 근섬유를 타고 차례로 전달되었다. 발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가슴으로, 어깨로, 팔꿈치로.

마침내 장갑까지 타고 올라가 백호검을 통해서 뿌려진다.

하얀 빛무리에 휩싸인 백호검.

음속을 돌파했다.

꾸아앙!

범종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아울러 견고하기만 하던 은빛 돔의 외곽이 쫘악 쪼개졌다.

"엄마야!"

"맙소사!"

그리고 만천하에 드러나는 내부.

거대한 어둠이었다. 지독하게 차갑고 끔찍하게 어두운 공허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건너편.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인공 구조물도 함께.

'기갑계구나.'

펜타곤 침식 세계의 정보는 미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극비로 남았다. 복구에 참여했던 미국의 각성자들 모두 비밀을 지켰다. 그래서 김현도 이곳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뭐 어때. 오늘은 5월 19일이고 침식부터 보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아무리 기갑계라고 해도 아직은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을 것이다.

"가자."

발걸음을 옮긴다.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가는 김현.

등 뒤에서 응원이 쏟아졌다.

"Mr. 김! Mr. 김!"

"승리하고 돌아오세요!"

"사랑해! 돌아오면 내 팬티는 네 거야!"

그러나 곧 섬뜩하리만큼 조용한 적막이 귀를 닫고 만다. 아주 얇은 차원의 벽을 넘는 것으로 워싱턴과 완벽히 차단된 것.

따라 들어온 이세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 대체 뭐에요?"

우주.

그렇게 정의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나 보던 공간이 펼쳐진다.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까마득한 어둠뿐이다. 다만 곳곳에 떠다니는 인공 구조물에서 빛나는 광채 덕에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이한 것은 호흡에 문제가 없다는 것. 헤엄치듯 손발을 움직이면 느리게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지독히 춥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이세희가 축복을 뿌리자 견딜 만 해졌다.

"이건 우주야, 대체 뭐야?"

"기갑계야. 기갑계의 원래 세계가 여기랑 비슷해."

"거기서도 숨 쉴 수 있어?"

"아니. 우리도 한 열흘만 늦게 여기 들어왔으면 숨 막혀서 죽었을걸. 나중에 대범람 직전에 완숙 세계들 들어가면 그때는 호흡 문제 해결하고 가야 해."

원 역사에서도 이것 때문에 많이들 죽었지. 숨이 막혀서, 혹은 기이한 질병에 들떠서.

김현은 근처를 둥둥 떠다니는 인공 구조물에 주목했다. 한 변이 2미터 정도 되는 정육면체였다. 구석구석 달린 전등이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번갈아 점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 마침 일행 쪽을 향한 곳에 지름 1미터짜리 해치가 보였다.

"저기로 가자. 누나, 따라와."

"엄마야!"

이세희의 허리를 감자 이세희가 놀라 소리를 지른다. 무시하고 왼손을 가볍게 내쳤다. 약한 충격파가 발생하며 김현과 이세희를 동시에 쭈욱 밀어냈다.

"같이 가!"

김애경이 허둥대더니 김현을 흉내 낸다. 뒤쪽으로 두 손을 뻗고 약하게 성혼을 발휘한 것.

푸시시.

너무 약했다. 허연 수증기만 조금 뿜어지고 만다.

몇 번을 그러더니 드디어 방법을 터득했다. 수증기와 함께 충격파를 터뜨리며 휘익 날아온다. 저기서 조금만 더 세게 썼으면 충격파가 아니라 얼음 폭풍이 날아갔을 텐데 감각 하나는 역시 탁월했다.

"여기서 뭘 하려고?"

"들어가서 얘기하자."

끼기기긱.

해치를 돌리자 거친 소리가 났다. 안에 들어가니 기이한 시설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한쪽 벽면이 통째로 제어 장치였다.

SF 영화에서 나오는 물건 같다고 할까? 통짜로 유리여서 앞쪽이 잘 보인다. 유리 벽면 앞에는 경사진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중심에는 녹색 반구가 설치되고, 그 바로 앞에 까만 금속판이 위치했다. 손만 대면 녹색 반구 위쪽에 시야가 고정되도록.

신기한 것은 조명은 없는데 내부가 환한 백색광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 이세희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보다가 금속 의자를 발견하고 거기 앉았다.

"아, 차가!"

"기갑계는 난방을 하지 않아요. 앉으시는 건 상관없는데 엉덩이 동상 걸릴 각오는 하세요."

"으으, 기갑계 괴물들은 다 기계라도 돼요? 왜 난방을 안 한대요?"

"기계 맞아요. 그러니까 빛은 필요해도 난방은 필요 없죠."

뚜벅뚜벅 걸어갔다. 금속 의수를 까만 금속판에다가 얹는다. 비록 기갑계 성혼은 없지만 순수한 혼력을 주입했다.

김현의 의수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금색의 글자들이 의수 표면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연결, 통신]

의수를 만들 때 들어갔던 여섯 의미 중 둘.

웅웅웅.

인공 구조물이 거기에 반응했다. 그리고 김현의 머릿속으로 구조물의 기능이 빠르게 주입된다.

익숙한 감각. 기시감마저 느껴진다.

한 가지 기능을 활성화했다.

기이잉, 철컥.

금속음이 울리고.

쏴아아아!

구조물 바깥의 추진 장치가 힘차게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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