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펜타곤 –2-
"이거 우주선이었어?"
"대박!"
하은이가 봤으면 정말 좋아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은 피식 웃고는 금속판에서 손을 뗐다.
허공에다가 가볍게 휘젓자 녹색 원반이 반응했다. 뿌연 광채를 뿌리자 김현의 손을 따라 색색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길쭉한 타원형의 물체가 중심에 보이고, 그 주변에 다섯 개의 구형 물체가 인공위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이 물체 주위에는 아주 작은 점들과 그보다는 조금 큰 점이 무수히 찍힌 채 꾸물거렸다.
"지도야, 이거?"
"맞아. 지킴이는 여기 이 타원 중심에 있어."
"바로 돌진하면 되겠다."
"그러면 아쉽지. 여기서는 시간을 조금 오래 보내려고. 3성 등급 성혼을 최대한 얻는 게 좋을 것 같아."
김현은 다섯 개의 구형 물체를 눈여겨보며 말했다.
펜타곤이 오각형 형태여서 그럴까? 이 세계를 지탱하는 축도 다섯 개였다. 갓 침식된 미숙 세계는 3성 등급 성혼을 세계 지킴이에게서만 얻을 수 있지만, 열흘 이상 지나 확장이 완료된 성숙 세계에서는 축 지킴이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
모든 지킴이를 사냥하면 3성 등급 성혼 7개 정도는 거뜬하다는 뜻.
"그럼 얼마나 걸려?"
"기갑계니까 오래 안 걸려."
금속 벽을 톡톡 건드렸다. 이세희가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여긴 안전한 거죠?"
"외곽에 있을 때는요. 그래도 가까이 가면 요격당하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요격? 공격이라도 해?"
"응. 자, 모포라도 깔고 의자에 앉아. 팔걸이 앞에 안전띠 단추 있으니까 그것도 누르고."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중앙 의자에 앉아 단추를 누르니 X자형 띠가 튀어나와 김현을 꽁꽁 싸맨다.
안전띠가 아니라 구속띠 같은 모습.
이세희가 꿍얼거리면서도 의자에 앉았다.
"동상 걸릴 것 같은데......"
셋 다 착석 완료.
백흔귀에게 구입한 수정을 꺼내 둘에게 안겼다.
"이거 드세요. 침으로 녹여 먹으면 됩니다."
"먹으면 뭐가 좋아요?"
"몸에 좋아요. 누나는 힘이 좋아질 거고 선생님은 정신력이 좋아지겠죠."
"먹기만 해도?"
"응. 그 자리에서 바로 좋아지는 건 아니고 상승 확률을 높여줘. 누나도 모바일 게임 정도는 해봤지? 능력치 부스터라고 생각하면 돼."
"무슨 게임도 아니고......"
"이해하기 쉬우라고 그렇게 설명한 거야."
사실 별의 관찰 성혼만 해도 그렇다. 성혼 등급에 별을 붙이고, 사람의 능력치를 여덟 개로 나누어 성인 남자 평균에 맞추어 숫자를 부여한 건 21세기 후반에 정립된 거였다. 지금 다른 각성자가 별의 관찰이나 기계신의 주시 성혼을 얻는다면 김현과는 다르게 보인다.
김현 스스로는 혼력의 수정을 섭취했다. 싸한 기운이 전신을 훑더니 사라진다. 앞으로 2주 정도 유지되면서 혼력 능력치의 성장을 돕겠지.
이때쯤 구조물이 가장 가까운 구형 물체 근처에 도달했다. 구형 물체가 붉은 파장을 쏘아 구조물을 확인했다.
녹색 원반이 붉게 변하며 허공에 글자를 새긴다.
[경고 : 혼력 인증을 진행하시오.]
등록이 안 됐는데 인증은 무슨.
"뭐라는 거야?"
기갑계의 언어라 읽지 못한 김애경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거기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고 정신을 집중했다. 의수를 통해 구조물과의 연결이 더욱 공고해진다.
구조물 안에 있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다. 우주가 육안이 아닌 카메라를 통해 보인다. 온갖 센서가 보내오는 정보 덕에 이 고독한 우주가 발갛고 퍼런 선들이 그리는 궤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주는 더 이상 차갑지도 아득하지도 않다. 온갖 방사능과 순수한 힘이 뭉쳤다가 풀어지며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궤적이 대뇌에 황홀하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다. 이것이 기계의 시선으로 보는 우주, 전생에서 익숙했던 그것.
그때, 저 앞 구형 물체의 한쪽이 열렸다.
상자처럼 삐죽이 돌출되면서 시커먼 포구가 드러난다. 포구에 붉은색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숫자를 셌다.
'3, 2, 1, 지금!'
휘익!
구조물이 홱 방향을 틀었다. 짧은 순간 추진 장치의 화력을 최대한으로 점화. 급격히 돌진하자마자 구조물이 있던 곳을 노란 광선이 스치고 지나간다.
[경고! 경고! 경고! 31문의 포대가 본함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경고! 경고! 경고!]
"본함은 무슨......"
기갑계에서는 흔하디흔한 승용차 주제에.
김현이 코웃음을 치자 김애경이 의아한 눈길을 던진다.
"본함이라니?"
"그런 게 있어. 아, 꽉 잡아. 조금 어지러울 거야."
슈웅! 슝슝!
붉은 광선이 비오듯 쏟아진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걸 옆으로 피했다. 이번에는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른다. 전면 추진 장치를 점화하여 급감속하여 흘려보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일제히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것이다.
이번 건 피할 수 없겠는걸? 그러나 이럴 줄 알고 이쪽으로 온 거였다. 미끄럼틀 타듯 미끄러져 다른 구조물의 아래로 들어간다. 구조물이 산산조각이 나서 그 파편이 일행이 탄 구조물을 때렸지만, 어쨌든 직격은 피할 수 있었다.
"으윽, 으으윽!"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통에 김애경과 이세희의 얼굴이 죽상으로 변한다. 무시하고 구조물 운전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10분 만에 목표로 한 구형 물체에 도달했다.
"조심해! 충돌한다!"
"뭐?"
꽈과광!
구조물이 그대로 구형 물체를 들이받았다.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후려치면서 전면 유리가 깨져 산산이 비산 했다.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뒤쪽 해치를 비롯한 벽이 몽땅 날아가더니 셋이 앉아 있던 금속 의자가 사출된다. 의자의 팔걸이, 등받이에서 뭉클뭉클 미끄러운 거품 같은 게 뿜어져 셋의 몸을 꽉 감쌌다.
"으아아!"
"뭐, 뭐야? 이거?"
침착하게 가랑이 사이를 더듬는 김현. 사출 직후 작은 돌기 같은 게 나와 있었다. 그걸 누르자 거품이 걷히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구형 물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약 10미터 정도나 될까. 이 정도면 충격파 한두 번만 쏴도 도달한다.
"괜찮아요?"
"네! 네!"
"누나는?"
"야, 이럴 거면 이렇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지."
이세희와 김애경을 차례대로 구출했다. 김애경이 투덜거리며 머리를 털었다. 어깨를 툭 치며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 처음 해보는 조종이라 잘 될지 몰라서 긴장했거든."
전생에서야 밥 먹듯이 해본 조종이지만 이번에는 처음이니까. 기갑계 성향 각성자인 것도 아니고.
김애경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됐어. 조종 잘했으니까 쌤쌤이라고 치자. 이제 어쩌면 돼?"
"들어가야지. 아까 우리가 타고 온 거 통해서 들어가면 돼. 통로까지 구멍을 파놨을 테니까."
"그래? 신기한 우주선이네."
"그렇지?"
원 바탕이 기갑계의 강습양륙함이니까 그렇지. 김현이 많고 많은 정육면체 구조물 중 아까 그걸 고른 이유가 있었다.
"멋있긴 멋있네요."
구형 물체로 다가가며 이세희가 감탄한 듯 말했다. 김애경도 옆에서 동의를 표했다.
"그러게. 영화 보는 것 같아."
김현은 그저 슬쩍 웃었다.
'기갑계 가면 기절하겠네.'
실제 기갑계의 모습은 이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인공 태양 세 개가 기계 행성 열두 개를 비추고 있으니까. 김현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기갑계의 충실한 장갑 기사였던 터라 적잖이 감동했더랬지.
위이잉.
구형 물체를 들이받은 구조물은 처참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 와중에도 형체를 보존한 게 특이했다. 깨진 유리 너머로 길게 통로가 나 있는 것도.
통로에 접어들자 몸이 바닥에 들러붙는다. 내부에 인공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가자."
저마다 손전등을 꺼냈다. 헬멧에 적당히 붙이고 미군에게서 보급받은 총기로 무장했다.
M4A1.
군대에서 다뤘던 K2보다는 손에 덜 익지만 뭐 어떤가. 워낙 총을 많이 써본 김현이라 금방 익숙해졌다.
"조심해. 기갑계 괴물들은 다른 세계 괴물이랑은 많이 달라. 벽에서 전기 채찍이 날아오고 천장에서 레이저 쏘고 하니까 항상 경계해야 해."
"무슨 SF 공포 영화야?"
"어, 그거랑 비슷해. 그러니까 방심하지 마."
김현의 경고는 곧 현실이 되었다.
약 5분 후,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채찍 같은 게 날아온 것.
"엄마야!"
비명을 지르는 이세희.
그 즉시 가슴에 단 하늘 수정이 시퍼런 섬광을 뿜는다. 반투명한 방어막이 이세희를 감쌌다. 채찍 공격은 방어막만 한 차례 출렁이게 한 후 막히고 말았다.
탕! 탕탕!
공격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거친 총성이 좁은 복도를 찢어발겼다.
불꽃이 튀면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검은 채찍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조사하니, 채찍은 아니고 일종의 전깃줄이었다.
[전기 촉수]
원래는 이런 이름.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것도 괴물이야?"
"응. 기갑계는 조금 특이한 곳이거든. 아무것도 아닌 사물에 성혼의 힘으로 자아가 생긴 괴물들이 사는 곳이야. 기원까지 따지면 더 복잡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전진하자."
이후로도 다양한 기계 괴물들을 만났다.
홀로그램 괴물, 자동문 함정, 광선 포탑, 순찰 드론......
대부분은 총만 쏴도 무력화되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가령 광선 포탑은 1성 괴물 주제에 화력이 상당해서 조금 무리를 했던 것. 김애경이 시선을 끄는 사이 김현이 접근하여 백호검으로 끝장을 냈다.
"여긴 다른 곳보다 어렵네요."
"기갑계가 그렇죠. 이제 총 집어넣으세요. 2성 등급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에 매복 중인 기척을 읽은 김현이 지시를 했다.
'17마리...... 많은데?'
기갑계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가 많았다. 1성 괴물들이야 자기들끼리 움직이지만 2성 괴물들부터는 반드시.
뒤통수가 따가웠다.
예지 성혼이 작동하고 있다. 뒤로부터 기습이 있을 거라는 얘기.
별의 관찰 성혼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어둠 속에 묻힌 지형이 조금씩이나마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울러 네모난 틀들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돌격병 7기, 광탄병 10기.'
정석 조합이다.
돌격병은 회전 톱날과 화염 방사기로 무장한, 중갑을 갖춘 로봇이다. 이것들이 요소요소를 지키는 사이 광탄병들은 기둥과 장애물 뒤에서 저격을 노리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소총을 꺼냈다.
"누나, 돌격해. 내가 지원할게. 로봇들이 저격하니까 항상 서리거인 쓰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
김애경이 투구를 눌러쓰고 뛰쳐나갔다.
핑! 핑핑!
날아오는 광선 사격.
이때를 대비해 전신 갑옷을 두른 김애경이다. 원 기갑계에서 생산된 광선총이라면 모르겠으나 침식 세계에서 태어난 2성 괴물들이 뚫기란 요원했다. 모든 광선 세례를 견뎌내며 가장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화르륵!
기다렸다는 듯 화염 줄기가 쏟아졌다.
"이익!"
김애경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당겼다. 어깨와 허리가 동시에 돌아간다. 그걸 강력하게 때려 박았다.
팔에서 빛나던 청광이 오른쪽 주먹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화룡금과 화산은이 격렬히 반응한다. 주먹에 선명한 금빛 글자가 떠오르더니 뒤늦게 포효를 터뜨렸다.
꽝!
폭탄 터지는 소리.
새하얀 광채가 벼락 치듯 전면을 휩쓸었다.
빛?
아니었다. 얼음이었다. 워낙에 강력한 힘을 품고 있어 한 줄기 빛살처럼 보인 것.
얼음 폭풍이 정확히 돌격병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른 것도 아닌 동력원이 위치한 곳. 돌격병의 눈에서 빛이 꺼지고, 거칠게 돌아가던 회전 톱날이 정지하면서 뿌려대던 불꽃도 꺼진다.
"언니, 나이스!"
이세희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 사이 김현도 두 건을 해냈다.
탕! 탕!
M4 소총을 쏘아 광탄병 두 기의 심장을 부순 것.
돌격병과는 달리 장갑이 거의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돌격병이라면 소총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 대물 저격총이나 대구경 기관포는 가져와야지.
"김현 님도 최고!"
둘 다 최고래.
한마디 하려는 때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기긱.
뒤쪽이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문이 열렸다.
잘 싸우던 김애경이 움찔했다. 급히 뒤를 보자 자연스럽게 김현과 눈이 마주친다.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라고, 준비하고 있다고.
김애경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스친다. 가볍게 땅을 박찼다. 지옥불처럼 날아드는 불길을 훌쩍 뛰어넘었다. 심지어 돌격병의 머리를 걷어차며 다시 도약한 뒤 광탄병들 사이에 착지하고는 얼음 폭풍을 사방으로 쏘아보낸다.
앞쪽은 김애경에게 맡기면 되겠다. 안심하고 몸을 돌렸다.
척척척척.
열을 맞추어 걷는 소리가 들린다.
이세희를 등지고 선 김현. 소총을 내려놓았다. 대신 권총 두 자루를 꺼냈다.
S&W M500.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권총 중 하나.
천천히 약실에다가 총알을 장전했다. 5발씩 두 개, 총 10발을 장전하는 걸 이세희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권총 두 자루를 허리춤에다가 꽂았다. 거의 동시에 로봇 10기가 복도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다.
중장갑을 갖추고 대구경 자동권총과 전기 칼날로 무장한 놈들. 한때 지휘도 해 보았고 박 터지게 싸우기도 했던 것들이다.
장갑병.
어떻게 보면 장갑 기사의 하위 호환.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한때 기갑계의 그 수많은 장갑 기사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했던 이가 김현, 나 자신이다.
그런데 고작 장갑병 10기로 대적하려고 해?
몸을 낮추고 거칠게 들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