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전자 괴수 –2-
무수히 무리를 지어 다가오는 붉은 광선.
세상이 빨갛게 변한다.
이대로 모든 것이 지워져 없어질 것만 같다.
앞으로 나서는 김애경.
"합!"
짧은 기합과 함께 두 팔을 X자로 교차했다. 거기서부터 흐드러지게 뿌연 광채가 뿜어졌다. 빛을 따라 얼음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그것은 벽, 혹은 방패.
광선이 얼음 방패를 두들겼다. 보기에는 무시무시했으나 뜻밖에도 견딜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성 괴물, 광선 포탑의 공격에 불과했으니.
휘익!
솔방울 같이 생긴 물체 세 개가 허공을 갈랐다.
광선 포탑이 붉은빛을 뿌려 그것을 감지한다. 막 정체를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순간 훅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괴물들을 휩쓸어버리는 수백 개의 작은 파편들.
1성 괴물 주제에 견디기란 불가능하다. 수십 기나 되던 광선 포탑이 모조리 쪼개졌다.
"후아!"
비로소 짧게 한숨을 쉬는 이세희.
김현은 말없이 보병용 조명탄을 멀찍이 던졌다. 스스로 추진제에 불이 붙으면서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 바람에 현재 위치한 공간의 전모가 눈에 들어온다.
길쭉한 원통형.
흔히 보이는 중앙 개방형 백화점이나 마트를 닮았다고 할까? 외곽에는 층층이 발 디딜 바닥이 있고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의 구조가 아니다. 층층 바닥마다 괴물들이 잔뜩 몰려 있고, 그들이 조명탄의 빛에 의해 잠깐이라도 노출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맙소사!"
언뜻 위를 올려다본 이세희가 허탈한 눈빛을 흘렸다. 조명탄에 의해 비친 괴물의 수가 족히 수백을 넘었기 때문이다.
김현도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정도면 이곳 중심 구조물의 괴물은 물론 세 구형 물체의 괴물까지 모두 불러모은 것 같아서.
예측했던 일.
"달려요!"
크게 소리치며 튀어 나갔다. 김애경과 이세희가 급히 김현의 뒤를 따라온다. 뭐라고 얘길 하지 않았는데도, 배낭을 옆에서 열어 소총을 꺼내고 있었다.
김현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바로 잡히는 소총 대신 그 안쪽, 더 육중하고 투박한 무언가를 꺼낸 것.
윙윙윙.
벌떼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뻥 뚫린 천장을 따라 순찰 드론 수십 기가 날아온다. 크기는 작아도 치명적인 폭탄을 장비하고 있어 접근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괴물. 김현은 아까 꺼낸 것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리볼버 권총처럼 생긴, 그래서 6발까지 유탄을 장전하는 게 가능한 중량 7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유탄 발사기.
M32A1.
공중에 겨누고 쏘았다. 퉁 하고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덩어리 하나가 날아간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는 탓에 맞추기 어려워 보였으나, 김현은 사격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 유탄이 중심에 있는 순찰 드론을 맞추었다.
쾅!
유탄 폭발이 순찰 드론을 모조리 휩쓸었다. 잔해가 1층 바닥까지 쏟아지고, 하나하나 녹아들면서 성혼이 빛을 발하지만 그걸 수거할 시간은 없었다.
척척척척.
열을 맞추어 걷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2성 등급 괴물들이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저의가 뻔하다. 김현은 주위 상황에 귀를 기울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곧 나타났다.
2층 외곽에서 1층, 그곳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를 타고.
숨 막히도록 큰 덩치들. 모두 육중한 철갑를 갖추었다. 오른팔에는 화염방사기, 왼팔에는 회전 톱날을 장비한 괴물들이다.
돌격병.
그 수만 무려 쉰!
"뒤로 빠지자."
1층도 곳곳에 기둥이 존재한다. 거기 의지하여 적의 저격을 피할 작정이었다. 돌격병만 나타났다는 건 광탄병은 상층 곳곳에 숨어 있다는 뜻이고, 장갑병은 어딘가 숨어서 뒤를 노린다는 뜻이니.
돌격병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경사로를 따라 내려왔다. 쉰 마리가 똑같은 동작으로 전진해오자 위압감이 상당하다.
하지만 그게 실수.
전자 괴수는 똑똑하긴 해도 경험이 일천했다. 이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앞서 광선 포탑과 순찰 드론이 당하는 걸 봤으면서.
퉁퉁퉁퉁퉁!
방아쇠를 연거푸 다섯 번을 당겼다. 둥근 약실이 회전하며 시커먼 죽음을 토해낸다.
내리꽂히며 폭발.
다섯 가닥의 화염이 돌격병들을 휩쓸었다. 아무리 2성 등급에 중장갑을 갖추고 있어도 무시하기 힘든 화력.
그래도 부족하지.
김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배낭에서 가져온 유탄을 모조리 꺼낸다. 총 24발. 지금까지 6발을 사용했으니 18발이 남아 있었다.
6발을 단숨에 잡고 M32A1의 약실에다가 꽂았다. 신기하게도 한 치의 오차조차 없이 모조리 약실에 들어간다.
혼력으로 뇌와 신경계만을 강화한 탓에 가능한 기법.
전생에서는 혼력 집중이라고 불렀지.
철컥.
탄창 결합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쾅쾅쾅쾅!
재차 쏘아댄다.
도합 11번의 유탄 공격이다. 이쯤 되자 돌격병들도 버티지 못했다. 절반 이상이 완전히 부서지고 나머지도 반파 당했다.
"내가 마무리할게."
김애경이 가볍게 몸을 띄웠다.
혼자서도 돌격병 10마리는 감당하는 김애경이다. 여기저기 상처 입고 망가진 돌격병쯤은 쉽다.
그 사이 차분히 M32A1을 재장전했다. 이제 유탄은 12발이 남았다.
씨웅!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광탄.
몸을 숙여 피했다. 이세희도 그걸 감지하고는 얼른 기둥 뒤에 숨는다. 한 번 직격당하긴 했으나 방어막이 전개되면서 가뿐히 막아냈다.
"선생님. 소총으로 조금씩 응전하세요. 무리하진 말고요."
"네, 네!"
아직은 서툴러도 계속 성장 중인 이세희.
기둥에 몸을 숨기고 소총만 내밀어 쏜다. 가끔은 방어막을 믿고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한 번은 이마를 직격당했으나 방어막에 광탄이 튕겨 나가자 자신감을 갖고 응사하고 있었다.
김현도 마찬가지. M32A1은 내려놓았다. 대신 M4A1 소총을 꺼내 멀찍이 있는 광탄병들을 쓰러뜨린다.
확실히 명중률에서 차이가 심했다. 이세희는 딱 두 마리를 쓰러뜨린 반면, 김현은 벌써 열 마리를 넘게 명중시켰으니까.
'어디냐?'
지금 김현이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장갑병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처음 조우 했을 때처럼 그냥 뒤에서 들이치진 않을 것 같다. 분명 1성 괴물과 연계하여 올 것 같은데......
기이잉.
이때 기묘한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역시.'
모르는 척 소총만 거푸 쏘았다. 대신 이세희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이세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 이세희를 주시하다가 눈동자만 또르륵 굴렸다. 바로 위쪽, 기이한 소음이 들려오는 그곳을 향해서.
자연히 이세희 또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뭐든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무시. 소총만 쏘고 또 쏘았다. 그렇게 십여 초가 지나자 드디어 기다리던 일이 발생했다.
천장 곳곳에 기이한 천연색 구멍이 뚫린 것.
구멍을 통해 장갑병들이 낙하했다. 돌격병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보고 깨달았는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김현과 이세희를 완전히 둘러싼 상태.
그래 봤자지.
퉁! 퉁퉁!
어느새 소총 대신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곳곳에서 폭음이 터지며 장갑병들이 쓰러졌다.
"이거나 먹어라!"
이세희도 가세했다. 미리 빼둔 수류탄을 두 개 연거푸 던진 것. 덕택에 둘을 지척에서 포위한 십여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현아!"
뒤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졌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김애경이 날 듯이 달려왔다. 주먹을 연타로 날려 얼음 폭풍을 쏘아 보낸다. 그 유명했던 멸망권의 권로를 밟은 얼음 폭풍이 장갑병들을 하나하나 가루로 만들었다.
김현도 움직였다. 오호갑이 울컥울컥 힘을 증폭하고 그 힘이 백호검을 타고 뿌려진다. 새하얀 빛이 허공에 그어질 때마다 장갑병 하나가 두 조각이 나 쓰러졌다.
피융! 피융!
"야! 너희 상대는 나야!"
광탄이 날아오자 이세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숫제 몸을 기둥 바깥으로 내밀어 사격했다. 그러자 광탄 사격이 집중되었지만, 급히 기둥에 엄폐하는 바람에 뭘 어쩔 수는 없었다.
어쨌든 셋이 모두 분전한 까닭에 천장을 통해 침투한 장갑병을 모조리 사냥할 수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장갑병은 수류탄을 던져 끝장을 보았다. 이어 6발 남은 유탄을 모두 소모하여 상층에 숨어 있던 광탄병들을 처리했다.
이제 거의 끝에 도달했으니 보급품을 아낄 이유가 없지.
"허억, 허억."
"후우우우."
둘 다 적잖이 지쳤다. 그 증거로 숨이 턱 끝에 닿아 있었다.
김현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동료가 필요해.'
특히 원거리 공격을 하면서 이세희를 지켜줄 새로운 얼굴이.
그러나 쉴 시간은 없다.
펜타곤 기갑계의 마지막 관문, 3마리의 3성 괴물이 올라오고 있으니까.
삐이이잉! 삐이이잉!
요란한 경고음이 원통형 공간을 가득 채웠다.
1층 맞은편의 벽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언뜻 거대한 그림자가 비치며 위압적인 기세를 풍겼다.
그것은 거대한 전차.
지구의 전차와는 달랐다. 무한궤도 대신 여덟 개의 다관절 다리를 달고 있었다. 언뜻 보면 거미와 비슷한 형상.
몸체는 두텁고 각졌다. 회전형 광선 포탑을 장비하고, 다리 사이에 넓적한 화염방사기를 달고 있었다.
삐웅삐웅삐웅!
경고음이 더욱 짙어졌다. 너희 이제 큰일 났다는 듯, 어지럽게 붉은빛이 사방을 비추다가 거대 전차에게 모여들었다.
3성 괴물, 육지 철갑차.
"꿀꺽."
이세희가 침을 삼킨다. 김애경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애경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왜 1마리지?"
답은 등 뒤에서 왔다.
스윽.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칼날.
김애경이 손을 내밀어 칼날을 튕겨냈다. 순간적으로 앞이 이지러지며 언뜻 어떤 형체가 일렁인다.
사람 크기의 로봇. 두 눈이 녹색으로 빛난다. 전신은 옅은 회색이었는데 날렵한 여성의 체구를 형상화한 듯 아름다운 유선형을 그리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몸의 표면이 흔들리며 주위 광경을 투사한다는 것. 그 때문에 마치 투명화한 듯 또렷하게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기계 유령.
위장 능력과 함께 치명적인 독니를 가진 괴물.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연거푸 당겼다.
탕탕탕탕탕!
지근거리에서 뿌려지는 흉탄!
총알이 기계 유령에게 박힌다. 비록 경장갑이라고는 하나 기계 유령 또한 3성 괴물. 이것만으로 어쩔 수는 없었다.
대신 표면에 금이 갔다. 거미줄처럼 좍좍 그어지니 기계 유령의 가장 큰 무기가 봉쇄되고 말았다.
위장이 깨지고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 아무리 독니가 있다고 한들 은밀하게 목표로 다가가지 못한다면 그 위험은 반의 반으로 줄어든다.
[수리 필요.]
건조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김애경이 그걸 무시하며 달려들었다.
"죽어!"
폭풍처럼 가해지는 연격.
김현이 돕는다면 더욱 쉽게 끝나겠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당장 저 앞의 육지 철갑차가 포대를 이쪽으로 조준했으니까.
번쩍!
곧 밀어닥칠 적색 광선.
막을 것이냐, 피할 것이냐?
찰나의 순간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울러 어떤 그림들이 비누 거품처럼 일그러진 채 떠올랐다가 퐁퐁 터졌다.
예지 성혼의 발현. 아직 1성에 불과한 탓에 제대로 기능을 못 하고 있지만.
김현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다.
"선생님!"
소리 높여 이세희를 부르는 김현.
조금은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최근 많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여리고 평범하기만 했던 이세희.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과연 몸을 던질 수 있을까 하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의 호소. 이세희의 얼굴이 흔들린다. 눈으로 보낸 전언이 이세희의 영혼에 전달된 것.
당연한 일.
성혼을 각성한 이들은 그 영성이 크게 개화하니까. 여기에 강철 같은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 있다면 텔레파시에 가까운 눈빛 교환쯤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세희가 이를 악물었다. 이내 결연한 빛을 뿌리며 몸을 날린다.
저 앞쪽, 육지 철갑차를 향해서.
"세희야, 안 돼!"
김애경이 새된 비명을 올렸다.
이때, 김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층 외곽의 낮은 천장이 아니라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도 않는 이 공간 끝부분의 천장을.
아무리 칠흑에 묻혀 있더라도 보이는 것이 있다.
별의 관찰을 통해서.
그것이 제공하는 네모난 틀에 떠오른 몇 글자.
[이동 요새포]
3성 괴물 중에서는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괴물. 근접전에서는 약해 빠졌어도 원거리 폭격 하나만큼은 4성 등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었지.
쿠콰콰콰.
파멸의 빛이 쏟아졌다.
육지 철갑차의 공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