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전자 괴수 –3-
대비하고 있었다.
별의 관찰로 이동 요새포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혼력을 끌어모은다. 백호의 힘과 기린의 생명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한다. 희고 누런빛이 김현의 눈에 맴돌다가 오로지 순수한 백광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호갑을 자극한다. 오호갑이 크게 부풀었다가 그 힘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김현의 모든 것이 일점으로 모였다.
힘껏 사선으로 올려 긋는 백호검에!
그리하여 파멸의 빛과 백호검이 거칠게 부딪쳤다.
꾸앙!
광량한 진동이 울린다.
순간,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이어서 끔찍한 충격이 김현을 관통했다. 전신이 으스러지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통증. 비릿한 액체가 입안 가득 느껴졌다.
"크윽."
신음하는 김현.
세상이 온통 핏빛이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악!"
이세희 또한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보호복의 방어막 기능을 이용하여 육지 철갑차의 공격을 일순 방어하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기 때문.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그거면 된다. 이세희는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 있으니까.
"누나! 선생님을 부탁해!"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나간다.
문득 오른팔이 끊어질 듯 아팠다. 힐끗 보니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기린의 생명에 힘을 집중하면 재생하는 건 쉽다.
하지만 김현은 그 선택지를 버렸다. 저 위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이동 요새포 때문이다. 이동 요새포는 제 2타를 위해 한참 재충전 중일 테니까.
재충전에 필요한 시간은 약 1분. 그리고 이 원통형 공간의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거리는 약 100미터. 이걸 거슬러 올라가려면 기린의 생명에 주입할 혼력 따윈 없다.
급한 대로 뼈만 맞추었다. 오호갑이 부목 역할을 대신하고, 상시 운영되는 기린의 생명이 어느 정도는 통증을 줄여줄 테니.
백호검은 아예 입으로 물었다. 왼손으로 들면 안 되냐고?
안 된다!
"큭!"
길게 도약.
오호갑의 하체 부위가 강렬한 힘을 토해냈다. 그 힘을 타고 수 미터는 단번에 솟구친다. 이어 3층의 난간을 붙잡은 다음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충격파!
다시 충격파, 또,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충격파!
겹쳐지는 충격파가 김현의 몸을 띄운다. 뼈를 뒤흔드는 진동에 전신의 뼈가 비명을 질렀다. 쉬어야 한다고, 치료부터 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연이어 몸을 뒤집는다. 이제는 5층의 난간을 발로 밟았다. 오호갑이 희뿌옇게 빛나며 힘을 증폭시킨다.
연속되는 도약!
엄청난 기예였다. 최고 난이도의 서커스를 보는 듯하다. 이대로라면 100미터 높이도 금세 오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간다. 실제로 김현의 눈꺼풀이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잘게 금이 간 뼈나 뭉개진 근육 같은 건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어쩔 수 없다.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렸다. 덕택에 파멸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 천장에 닿을 수 있었다.
꽈앙!
천장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 김현.
우주가 보인다.
아울러 네 개의 다족 관절을 외부에 고정한 채 짧고 뭉툭한 광선포를 아래쪽으로 겨누고 있는 거대한 괴물도.
[적대 생명체 감지.]
붉은 섬광이 번쩍인다.
그러나 광선포를 거둘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올라온 것이라고는 딱 하나, 이미 탈진 직전인 김현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혼력이 바닥난 김현보다야 아래쪽에서 용맹 무비 하게 날뛰는 김애경이 더 위협적으로 보일 터.
대신 다족 관절에서 소형 기관포가 돋아났다. 그것들이 김현을 노리고 불을 뿜기 시작했다.
투타타타!
정면 대결은 불가. 김현도 그럴 생각까진 없었다. 대신 배낭에서 섬광탄을 꺼내 던졌다.
찌이잉!
기묘한 이명이 고막을 때렸다. 아울러 타는 듯한 광채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크윽."
시력 보호용 고글을 쓰고 있어도 지척에서 섬광탄이 터지면 견디기 어렵다. 수천 개의 바늘로 쑤셔대듯 안구가 아팠다. 그런데도 재차 섬광탄을 집어던진다.
찌잉! 찌잉! 찌이잉!
이것으로 배낭에 들어 있던 네 개의 섬광탄을 모두 소모.
대신에 눈이 멀어버렸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손상. 그래도 지금은 실명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에러. 에러. 감지 장치 손상.]
이동 요새포의 감지 장치도 함께 멀었으니까.
투타타타!
기관포 소리가 요란하다.
몸을 낮추고 돌진했다. 머릿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꺼냈다.
이동 요새포의 방어 기제. 다관절 다리에 설치된 도합 열여섯문의 기관포가 뿌리는 탄막의 구체적인 형태를.
달리다가 돌연 크게 도약한다. 기관포탄이 다리 아래쪽을 지나갔다. 이어 포복 자세를 취하자 바로 머리 위를 스치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릴 때는 왼쪽에서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렸다.
김현은 오로지 공간 감각만 믿고 그걸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태 입에 물고 있던 백호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오른팔이 짜르르 울린다. 칼로 뼈를 긁어내는 듯한 통증이다. 몽땅 무시하고 길게 도약했다가 백호검을 힘껏 찔렀다.
'여기!'
이동 요새포의 약점.
포탑과 몸체의 연결 부위를.
눈으로 보지 못했다.
별의 관찰로도 확인하지 못했다.
오로지 전생의 지식과 경험에서 이동 요새포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자신이 있던 곳에서 회피한 거리까지 따져 이곳이겠다 싶은 곳에 공격을 가한 것.
빗나가면 여기서 끝.
인류를 구하겠다는 대망도, 기껏 여기까지 끌고 온 김애경과 이세희도 모두 죽고 말겠지.
백호검을 내지르는 그 짧은 순간.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만 같다. 짧디 짧았어야 할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아득한 감각 너머로 의식이 표류하려는 것을 굳게 붙잡는다.
믿자. 나를.
이를 갈며 더욱 백호검을 내뻗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조금 더, 약 3센티미터 정도.
그러자 닿았다.
콰직.
뭔가 부스러지는 느낌.
김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성공.
그걸 확신한 후 바로 몸을 날렸다.
오호갑의 하체를 발동시켜 길게 도약한 후 의수의 충격파까지 뿌려 우주 저편으로 도망친다. 그 뒤에서 흰색 섬광이 꽃잎처럼 흐드러지며 피어났다.
아름다운 광채. 그러나 그 결과만큼은 무서웠으니.
구우우웅!
세계 전체가 떨었다.
중심에 위치한 타원형 구조물의 일각이 붕괴하고 말았다. 그마저도 모자라 연쇄 폭발이 벌어지며 그 허리가 동강 나려 하고 있으니.
둔중한 충격파가 덮쳐온다. 눈은 멀었으나 김현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직감했다. 백호검을 껴안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다가오는 충격에 대비한다.
뻐억!
전속력으로 달리는 수 톤 트럭에 치인 것 같다.
시신경이 다 타버렸는데도 뇌 속에서 번개가 쳤다. 직감적으로, 척추가 모두 으스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의 척수도 함께.
"흥......"
어쨌든 좋다.
이 정도 부상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것은 김애경과 이세희. 예고도 없이 천장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으니 거기 휘말렸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이세희가 문제. 보호복 하나 믿고 육지 철갑차의 공격을 육탄 저지했으니......
'믿자.'
나를 믿었던 것처럼 그들도.
내부로 깊이 침잠한다. 본인의 육체를 들여다본다. 모든 성혼을 억제한 채, 단 하나 기린의 생명만 최고조로 발휘한다.
찌그덕, 찌그덕.
넝마처럼 찢긴 육체가 천천히 회복된다. 깨진 톱니바퀴 시계가 저절로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새 살이 돋고, 으스러진 뼈가 맞춰지며, 신경계 말단이 재차 활성화되며 스스로 이어지고 있었다.
척수가 찢어지며 그쳤던 통증이 찾아온다. 세포 하나하나를 우악스럽게 뜯어내는 것 같은 고통이다. 진땀이 얼굴 가득 맺혔으나 김현은 그 아픔조차 기쁘게 받아들였다.
갑자기 두 눈이 못 견디게 아팠다. 아니, 안구가 아니라 그 속이 쿡쿡 쑤셨다. 모기에 물린 듯 간지럽고, 벌에 쏘인 듯 따갑다가 후끈거리고 차가워진다.
눈을 뜨는 김현.
광활한 우주가 보였다.
이제는 두 동강이 나서 우주 쓰레기처럼 변한 타원형 구조물도 함께.
팡!
충격파를 터뜨린다.
끝없이 우주의 외곽으로 멀어지던 김현의 신형이 멈췄다. 다시 충격파를 발하자 이번에는 반대로 우주의 중심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약 30분.
외곽까지 날아갔던 시간만큼 돌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오로지 몸의 회복에 썼다. 3성 등급 기린의 생명을 22세기의 지식으로 굴린 결과 척수와 척추는 온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이제 끝내자.'
이동 요새포의 폭발에 휘말리면서 얻은 조그마한 이익.
전자 괴수의 눈에서 벗어났다는 것.
길진 않다. 타원형 구조물의 안으로 진입하면 반드시 포착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릴 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탁.
구조물 안에 진입했다.
인공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고 있었다. 동강 난 구조물 반대편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진다. 거리가 멀어서 흐릿하기만 한 따스한 광채도 함께.
살아 있었구나.
몸을 돌린다. 원래는 원통형이었으나 이제는 반원통형이 된 공간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펜타곤 침식 세계에 대한 지식은 없다. 대신 펜타곤의 원래 지리는 잘 알았다. 침식되면서 변한 이 원통 공간이 기갑계의 어느 건물과 닮았는지도.
그래서 들어갔다. 반원통형 공간의 중층에 있는 무수히 많은 복도 중 하나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슝! 슝슝!
전자 괴수가 이제야 김현이 접근하는 걸 알아차렸나 보다. 방어 체계가 작동하여 김현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김현을 저지하기란 불가능.
뛰어오르며 백호검을 휘둘렀다. 거칠게 광탄을 쏘아대던 포탑들이 몽땅 부서진다.
터엉! 텅텅!
급기야 격벽을 내려 차단하기까지.
"쯧."
귀찮다.
그래도 지금은 우직하게 전진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괜히 서둘다가 전자 괴수의 함정에 빠지면 그야말로 바보짓이 없다.
모든 함정을 분쇄하며 나아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온몸이 삐걱거렸으나 묵묵히 견뎠다. 그리하여 수십 종의 함정을 돌파한 끝에 종착지에 이르렀다.
작은 방이다.
기갑계 같았으면 중심에 푸른색으로 표표히 빛나는 서버 컴퓨터가 위치했어야 할 곳.
이곳은 달랐다. 원형 단상 위에 스마트폰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전자 괴수의 코어 컴퓨터이자 세계의 핵.
치직. 치지직.
묘한 잡음이 울리더니 영어 음성이 울려 퍼진다.
[여기까지 왔군.]
전자 괴수의 전언.
[축하한다. 그리고......]
탕!
뭐하러 괴물이 주절거리는 걸 듣고 있어?
생각할 것도 없이 왼손으로 권총을 뽑아 쏴 버렸다. 총성이 세상을 강타하면서 스마트폰 표면에 쫙쫙 금이 가고, 허공으로 튕기는 장면이 느릿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안 돼!]
괴성을 지르는 전자 괴수.
이미 늦었다.
스마트폰이 공중에서 뒤집히며 낙하했다. 그리고 강철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접촉 부위부터 유리처럼 깨져 버린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스마트폰.
거기서부터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끝났구나."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상이 깨어지며 유리 조각처럼 흩날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우주가 압축되며 고작 12만 제곱미터의 대지로 복구되는 장면도 함께.
굉장히 힘들었다.
신촌 병원에서 혈귀에게 왼손을 잃었을 때보다 더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때는 전투 시간이나마 짧았지, 오늘은 정말 모든 체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썼으니까.
톡, 데구르르.
세계가 축소되면서 전자 괴수가 남긴 성혼이 굴러왔다.
[기계의 주시(3★, 기갑)]
[기계의 명령(3★, 기갑)]
"푸하하."
이거 재미있네.
둘 다 전생에 장갑 기사로서 가지고 있던 성혼의 하위 성혼이었으니까.
그리고 세계가 축소되면서 흩어졌던 이들이 모였다.
"현아!"
"김현 님!"
유령처럼 나타난 둘.
힘껏 둘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