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41화 (41/200)

# 41

백악관의 밤 –1-

나란히 앉아서 흩날리는 파편을 구경했다.

세계가 벚꽃처럼 으스러지고 있었다. 공간이 접히면서 건물들이 죽순처럼 돋아나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도 흥취가 있었다.

다들 지친 얼굴.

이세희가 특히 그랬다. 머리카락이 다 꼬불꼬불하게 타 버렸고 얼굴에는 여전히 화상이 심했다. 빛의 치유로 회복 중이기는 하나 시간이 걸리겠지.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이러실 거면 방패라도 하나 만들어 주시지."

"그러게. 나도 세희가 자살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그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누가 막아줄 사람이 없어서......"

"3성 괴물 3마리는 확실히 많긴 했지."

"우리가 너무 적은 거 아닐까요?"

"적죠. 최소한 대여섯 명은 되어야 해요."

원 역사에서도 그랬다. 각성자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 다녔다. 수가 너무 많으면 분배에 문제가 생기지만 너무 적어도 전력이 떨어지니까.

"우리 팀에 합류할 각성자를 뽑아야겠어요."

"어떻게?"

"글쎄. 미국 대통령이랑 얘기해 봐야지."

사람은 많다.

훗날 미국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검 알렉산더 브라운이라든지, 안하무인에 범죄자이지만 인류를 위해 죽었던 검은 심장 닉 스미스, 세계 최강의 마법사라 일컬어졌던 얼음불꽃 리아 테일러......

미국의 최상위 각성자 중 몇 명은 이 시기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김현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조금 그렇기는 하네.'

현재 활동 중인 최상위 각성자가 모두 인격 파탄자라는 게 문제.

최강의 각성자이자 최고의 인격자로 알려졌던 알렉산더 브라운? 인종차별주의자다.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로, 미국이 전략적으로 밀어주지 않았으면 역사에 쓰레기로 기록됐겠지.

닉 스미스도 마찬가지. 살인과 강간을 밥먹듯이 저지른다. 하도 실력이 좋아 미국이 써먹었고 마지막에는 개심하지만 현재로선 믿을 수 없는 존재.

리아 테일러도 비슷했다. 양성애자인 건 그렇다고 치자. 이 미친 여자는 가학 성애자이면서 시체 성애자였다.

셋 다 얽히지 않는 게 상책.

'골치 아프네.'

이들 말고 지금 나타난 각성자가 누가 있더라?

몇 명 더 떠오르긴 했으나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원점에서 박박 긁어봐야 할 모양이다.

투투투투!

둔중한 로터음이 들렸다. 위를 살펴 보니 헬기 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앞서 날아오는, 유난히 큰 헬기가 눈에 띈다.

한 남자가 헬기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덩치 큰 백발의 백인 남자다. 남자가 앉아 있는 셋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지금 셋이 앉아 있는 곳은 펜타곤 중심이었다. 천장이 개방되어 있어 하늘이 다 보였다. 김현도 헬기에서 몸을 내민 미국 대통령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쇼는 잘 한다니까.

방송국 헬기들이 부산을 떨며 흩어졌다. 둘을 한 구도에 담고 싶은 모양이다.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속도를 늦추며 펜타곤 중심으로 내려앉았다.

"고생했습니다, Mr. 김! 나는 Mr. 김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요!"

대통령이 김현을 와락 껴안는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며 김현을 보았다.

"아니, 이게 뭡니까? 무슨 땀을 이리 많이 흘렸어요?"

"펜타곤 복구가 쉽진 않았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복구한 곳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어서 가서 쉬셔야겠습니다. 자, 올라오시지요."

"알겠습니다. 레이디 퍼스트."

"레이디는 무슨. 오글거리니까 하던 대로 해."

김애경과 이세희를 먼저 헬기에 태웠다. 김현까지 올라타자 헬기가 둔중한 굉음을 터뜨리며 상승했다.

잠깐 펜타곤을 내려다보았다.

시체가 쌓여 있다.

온전히 형체를 보존한 시체도. 기계조각이 들러붙어 괴상하게 변이된 시체도.

명복을 빌고, 헬기 의자에 푸욱 몸을 묻었다.

투투투투!

백악관을 향해 직행하는 헬기.

쉬잉, 펑! 펑!

폭죽이 터졌다.

아름다운 불꽃이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을 수놓는다. 화염 꽃이 피고, 성조기가 그려지고, 은하수가 내려온 듯 색색의 별이 하늘 가득 떠올랐다.

"예쁘다......"

이세희가 넋을 잃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신비롭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단지 땅 위에서 올려다 보는 게 아니라, 별꽃이 잔뜩 핀 하늘 정원을 헤엄치는 것 같았으니.

대통령이 함지박처럼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이세희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

"피곤하시지요? 오늘내일은 푹 쉬시고, 내일 저녁 축하 연회에 참석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각성자들도 참석합니다. 침식 세계에서 직접 살아오신 분들이요."

거절하려던 김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각성자들!

그것도 침식 세계에 휘말렸다가 자력 귀환한 인물들이라면 더 따질 이유가 없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셈이니까.

김애경과 이세희에게 눈빛을 한 번씩 보냈다. 둘 다 미미하게 머리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내일 몇 시입니까?"

"7시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대통령은 백악관 내에 셋의 숙소를 내주었다.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진 않아도 굉장히 널찍했다. 원래는 국빈 방문 시에만 국가 원수에게 내주는 곳이라고. 앞으로도 원한다면 언제든 들어와서 쉬다가도 좋다나.

"우아아, 좋다!"

국가 원수가 묵는 방이라 그럴까? 침실이 네 개나 있었다. 거실은 물론 널찍한 회의실도 딸렸다.

이세희가 침대에 몸을 날리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좋긴 좋네. 5성 호텔 급인데?"

"5성 호텔 가본 적 있어?"

"있지."

김애경이 입술을 오물거린다.

아, 그렇구나.

신혼 여행 때 최고급 호텔에 묵었다고 자랑하던 기억이 난다. 비록 얼마 안 가 파탄을 맞았지만 그때만큼은 행복해 했었지.

김애경이 이세희의 옆에 몸을 던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두드리자 금세 신호가 간다. 그리고 혀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웅, 그래. 우리 하은이. 할아버지 할머니랑 잘 놀았어?"

[응응! 나 하얀 집 가서 놀았다?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나한테 선물 줬어!]

머리 하얀 할아버지?

대통령을 말하나 보다.

"그랬어? 어이구, 잘 했어요. 우리 딸."

"하은아 안녕?"

[이모 안녕! 삼촌은?]

웬일로 김현을 찾는다.

"나 여기 있지."

[삼촌! 나 선물!]

"에이, 아직 못 구했어."

[삼촌 거짓말쟁이!]

"아직 열 밤 안 잤는데? 열 밤 자기 전에는 꼭 구해줄게. 알았지?"

[응! 약속!]

"약속."

선물 때문이었구나.

하은이는 금방 김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다시 김애경을 찾아 칭얼거린다. 김애경이 스마트폰 카메라에 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김현은 펜타곤에서 얻은 전리품을 점검했다.

3성 7개, 2성 47개, 1성 61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세계 하나를 거의 싹쓸이 한 셈이니까. 펜타곤은 성숙 세계였던 만큼 미숙 세계보다 획득하는 성혼의 질이 더 높기도 하고.

"지금 바로 거래하게요?"

"생각 중이에요. 음......"

"왜, 왜 그래요?"

이세희가 별안간 팔을 교차해서 자기 가슴을 가렸다. 왜 그러나 싶어 이세희를 올려다 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상한 데 본 거 아니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누, 누가 부끄러워 했다고 그래요?"

"선생님 성혼 생각하고 있었어요. 축복, 치유, 보호만으로는 부족하잖아요? 원래는 공격 성혼 하나 각성하면 어떨까 했는데, 역시 방어 쪽 하나는 필요할 것 같아요."

"아......"

이세희가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김현의 맞은편에 앉더니 질문을 하나 던졌다.

"방어 계열 성혼이 있었으면, 저 혼자 아까 그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돼죠. 그래도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사실은 그게 정석이었다. 치유와 축복, 방어를 얻거나 치유와 공격, 방어를 얻는 게.

김현도 하은이가 귀신에게 빙의되지 않았으면 방어 계열 성혼부터 각성하자고 했겠지. 당시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약간은 아쉬움이 있다.

'혼력 능력치가 너무 낮아.'

현재 이세희의 혼력 능력치는 16. 상당히 오르긴 했으나 역시 모자라다. 3성 등급 성혼을 하나 더 각성하려고 하면 최소한 21에서 22는 되어야 했다.

"선생님. 혼력 수련은 열심히 하고 계시죠?"

"네.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성혼 수련 말고 혼력 수련이요."

간단한 요령을 알려주었다.

혼력은 이세희도 인식하고 있다. 다만 김현이나 김애경처럼 잘 활용하지 못할 뿐이지.

그걸 손으로 뿜어보라고 시켰다. 두 손에서 각각 뿜어낸 다음 서로 얽어서 실뜨개하듯 다양한 문양을 만들어보라고. 이세희는 육체파가 아니라 마법파이니 이런 방법이 좋을 것이다.

"이, 이렇게요?"

"아뇨, 이렇게요."

혼력을 뿌리기는 하는데 몽둥이 두 개가 X자로 교차하는 것에서 머물렀다. 해서 간단히 시범을 보여주었다. 은하수와 항성군이 얽혀 별자리를 만드는 광경이 펼쳐지자 이세희가 얼이 빠져서는 입을 쩍 벌린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쁜 걸 만들 수 있어요?"

"뭐가 예쁜데?"

"언니! 이것 좀 봐!"

마침 통화를 끝내고 나오던 김애경이 끼어들었다. 김애경도 따라서 혼력을 뿜기 시작했다. 비록 김현 정도로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지는 못했어도 개와 고양이, 장미꽃 세 송이 꽃다발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낸다.

"치잇, 내가 열등생이네."

"그야 넌 평소에 잘 안 써봐서 그렇지. 난 현이 사고 치는 거 막느라 몇 번 따라 해서 잘 되는 거야."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모르는 척 하긴."

식사는 방으로 백악관 직원들이 날라주었다. 거기에 더해 맥주 몇 캔을 깠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한 뒤라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가 그렇게 꿀맛일 수 없었다.

다음날 정오까지 푹 잤다. 그마저도 모자라 연회 시작 직전까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겨우 일어났다.

"이거 입으라던데?"

옷은 준비되어 있었다.

까만 정장.

치수를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몸에 딱 맞았다.

"김현 님, 멋지세요."

"선생님도 예뻐요."

이세희와 김애경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실 이세희는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 키가 작고 몸매가 밋밋하니까. 김애경은 호리병 같은 몸매지만 골격이 크고 어깨가 벌어진 탓에 여장군 느낌이고.

적당히 단장을 마친 후 백악관 직원의 인도에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에 들어가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미국의 영웅들께서 입장하십니다!"

"오오오!"

"펜타곤의 복구자시로군!"

얼굴이 붉어지는 유치한 별명이다.

하긴 원 역사에서는 유명한 각성자들이라면 누구나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 그렇게 별명을 붙이는 것 또한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턱을 높이 들었다. 짐짓 오만한 태도를 연기하며 손을 흔들며 입장한다. 김애경과 이세희도 어색해하면서도 김현을 따라 했다.

"오, 우리 영웅께서 오셨군!"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대통령이었다.

가볍게 껴안고는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준다.

연회에 참가한 것은 약 쉰 명.

스물두 명은 각성자였다. 침식 세계에 묶였다가 자력으로 세계를 복구하여 돌파한, 미국에서도 기대를 걸고 있는 인물들.

그리고 스무 명은 미국의 고위공무원들이었다. 백악관의 비서실장도 있고 수석 안보 보좌관도 있었다. 여기에 국방장관과 부장관, 합참의장 등 군부의 요인들과 NSA, CIA 등 정보부 요인들이 참가했다.

정치인은 없이 모두 국가안보 관련 인사. 괜히 수작을 부리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자기들 가족을 주렁주렁 소개하는 정도야 뭐, 애교로 넘어가고.

"모두 거리낌 없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펜타곤이 미국으로 돌아온 기쁜 날 아닙니까? 먹고 마십시다!"

"와하하하!"

흥겨운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하고 각종 산해진미가 혀를 기쁘게 한다. 적당히 웃고 떠들면서 스물두 명의 각성자들을 살폈다.

[알렉산더 브라운] 천사검(3★, 천상)

[닉 스미스] 악마심(3★, 악마)

[리아 테일러] 화염 폭파(3★, 염옥)

김현이 기억할 정도로 유명한 이들.

세 명의 3성 등급 각성자가 더 있었다. 나머지 열여섯 명은 2성 등급이었고 1성 등급은 없었다. 하긴 1성 등급 정도로 침식 세계를 돌파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이는 없다. 모두 고만고만했다. 김현이 평가하기에는 적당한 성혼에 적당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고민이 깊어진다.

이름을 아는 셋은 인성이 바닥이고, 나머지는 성장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고.

'아무나 골라서 키워 봐?'

당장 이세희만 봐도 많이 성장했으니까.

그러려면 견고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니 문제. 과연 미국의 각성자들은 김현을 신뢰하고 목숨까지 맡길 것인가?

탐색하듯 살피는 시선을 느꼈는지 미국 각성자들이 김현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우연처럼 잘 생긴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알렉산더 브라운.

순간적으로 푸른 눈에 경멸의 감정이 스쳤다. 입을 이죽거리며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럴 줄 알았다.

여전히 흥겹게 연주 중인 음악.

그러나 언젠가부터, 어색한 분위기가 점차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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