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42화 (42/200)

# 42

백악관의 밤 –2-

'원숭이 새끼.'

알렉산더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왔다는 조그마한 황인. 대통령이 시종일관 그 옆에 붙어 있었다.

미국의 영웅이니 뭐니 하는 찬사를 늘어놓으며.

그 소리를 들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언제부터 미국인이었다고?'

저 자리에 내가 있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불과 며칠 전까지 미국인들의 관심은 여기 있는 스물두 명, 그 중에서도 여섯 명의 3성 등급 각성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여섯 명에게는 홀리 소드니 블랙 하트니 하는 조금은 유치한 별명까지 붙었다.

그게 몽땅 사라졌다.

김현이 미국으로 옮겨오면서.

TV를 켜면 김현 밖에 안 나온다. SNS에서도 여섯 히어로 이야기는 사라졌다. 오직 김현의 이름만 찾아볼 수 있었다.

슬쩍 주위를 돌아본다.

다른 각성자들의 얼굴도 썩 좋지는 않았다.

2성 등급 각성자라 해도 침식 세계에서 벗어난 후에는 어딜 가든 좌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덕에 악몽 같은 당시의 기억을 잊어가고 있었다.

영웅이라는 자부심으로 PTSD를 치료 중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곳에서 오로지 김현만 주목을 받자 당연히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이 든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

"흥. 미국의 영웅은 무슨."

한 남자가 눈을 흘겼다.

같이 서 있던 여자가 주의를 준다.

"그만 둬. 들리면 어쩌려고?"

"들으라고 해."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컸다. 주위에 있던 각성자들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고 만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에게는 시비를 걸어볼 생각을 못했다.

알고 있으니까.

김현이 자기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각성자 특유의 직감은 물론, 대한민국에 있을 때 공개했던 영상만 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그래도 경원시하는 마음은 커져만 갔다. 만약에 김현이 뭘 하려고 하면 훼방은 놓지 않더라도 강 건너에서 구경만 할 것이고, 실패한다면 뒤돌아 손뼉을 칠 것이다.

"분위기가 안 좋은데?"

김애경이 속삭였다.

"그러게."

텃세.

종말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러는 게 우습지만, 이 또한 인간의 본성.

한 가지는 확실했다.

최소한 이 안에서는 새로운 동료를 구할 수가 없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런데 미국 대통령은 어제 김현이 넌지시 귀띔을 준 계획을 그대로 실행할 생각인가 보다.

별안간 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더니 낮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원체 키가 큰 인물이라 그것만으로도 연회장 어디서든 보이게 되었다.

"오늘은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비록 어려운 시기이지만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펜타곤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예일대학교, 디즈니 월드, 러시모어, 피셔맨스 와프, 데스 밸리, 휘트니 산은 아직도 저 사악한 빛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힘을 모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해야 합니다!"

"옳소!"

"브라보!"

박수가 쏟아졌다.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말을 끊는 대통령. 수십 개의 시선이 쏟아진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 미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이야말로 최고의 각성자들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가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만약에, 만약에 여기 있는 분들께서 하나의 팀을 이룬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제 펜타곤이 복구된 것처럼 미국의 영토를 온전히 우리 품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어, 이거......

김현은 대통령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단순히 김현에게 동료 몇을 붙여주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원 역사에서는 7월이 넘어서 주창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결성된 것은 한참이 더 지나야 하고, 그것도 한 차례 진통을 겪은 후 깨져 버리지만.

"저는 여기서 제안합니다. 슈퍼 팀(Super Team)! 최고최강의 각성자만 모아 미국의 영토를 복구합시다. 그 어떤 괴물도, 침식된 세계도, 외계종도 이 슈퍼 팀 앞에서는 유리처럼 깨져 나갈 겁니다!"

대통령이 주먹을 쥐고 강하게 흔든다. 박수 소리가 뒤따랐지만 아까보다는 작았다. 정부 관료들은 열렬히 반응하고 있었으나 각성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까닭이다.

슈퍼 팀?

발상은 좋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환영했을 일이다.

그러나 김현 일행이 연회의 주연으로 주목받는 지금, 슈퍼 팀은 과연 누구를 주축으로 결성되겠느냐가 문제.

최소한 굴러들어온 돌에게 명령을 받을 수는 없다!

"질문 있습니다!"

잘 생긴 백인 남자가 손을 들었다.

"오, Mr. 브라운. 말씀하세요."

"그 슈퍼 팀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설마, 대통령께서 지목해서 만들 겁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들어갈 것 같진 않은 데요."

"그거야......"

Mr. 김이 지목할 겁니다,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보는 각성자들의 눈빛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평생 사업가로 살며 사람들을 다루던 인물이라 왜 그런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런, 실수했군.'

김현이 오기 전에는 곧잘 이들을 불러서 오찬을 함께 하고 고위 관료를 파견해 필요한 것이 없는지 세세히 묻곤 했다. 그러다가 김현이 귀화 의사를 밝힌 후로는 김현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니 서운해할 만도 했다.

그런데 슈퍼 팀까지 김현에게 맡긴다? 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도 않고?

안 될 말이다.

대통령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계책이 두근거리며 떠올랐다.

"여러분들이 직접 만드셔야지요."

"직접 만들라고요?"

"예. 하하, 저나 다른 누가 인위적으로 지목한다고 해서 그게 슈퍼 팀이 되겠습니까? 마음 맞는 사람끼리 뭉치고, 팀의 가치를 증명해야지요. 1명이든 10명이든 좋습니다. 팀 별로 코드네임을 부여하고, 앞으로 1달...... 아니, 2달 동안 가장 성과를 크게 거둔 팀에게 슈퍼 팀이라는 정식 명칭과 함께 명예 훈장을 수여하겠습니다."

명예 훈장!

각성자들의 눈이 번들거렸다.

"대통령, 그건......"

합찹의장이 개입하려 했으나 대통령이 뚱한 얼굴로 쏘아보자 얼른 입을 닫는다.

명예 훈장이라면 엄청난 보상. 명예 훈장을 단 사람에게는 대통령 또한 먼저 경례를 해야 한다. 여기에 따라오는 각종 혜택은 엄청나게 많다.

다만 군인에게만 수여되는 훈장이라는 문제가 있고, 하원 투표와 국방부 심사 및 승인이 필요하지만 정말로 큰 공을 세운다면 못 줄 것도 없다.

여기에 훈장만 주고 말 것 같진 않다. 비공식적인 포상과 명성이 뒤따를 터. 성공만 하면 지금 김현의 명성은 가뿐히 뛰어넘을 것이다.

"좋습니다. 팀은 저희 마음대로 꾸려도 되는 거지요? 꼭 이 안에서 찾을 필요도 없고요."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초안을 들고 찾아뵙지요."

"허어, 내일 아침이요?"

"예. 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1주일만 기다리셨어도 펜타곤은 우리 위대한 미합중국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국의 진짜 영웅들에 의해서요."

대통령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뀐다. 다른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각성자들은 달랐다.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기색이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김현은 코웃음을 쳤다.

1주일은 무슨. 원 역사에서는 7월 초에나 팀을 꾸리는 주제에.

역사가 달라졌으니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이번 펜타곤 기갑계는 김현도 죽을 뻔했다. 1주일이 더 지났으면 성숙 세계를 넘어 완숙 세계가 됐을 텐데 그때 들어가면 확정적인 전멸이 기다린다.

"Mr. 김은 제 말이 믿기지 않나 봅니다?"

갑자기 화살이 날아왔다.

어쭈?

김현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아뇨, 믿습니다. 제가 아는 알렉산더 브라운이라면 명단을 작성하고, 팀을 꾸리기는 쉽지요."

"흠, 흠."

알렉산더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김현이 자기를 인정하는 투로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

"그래 봤자 어중이떠중이에, 한 달 내에 깨질 팀이긴 해도요."

"뭐라고?"

알렉산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해?

이건 알렉산더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면서 자아도취가 심각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브라운이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그 성질머리를 못 견딘다.

"장담할 수 있습니까, 미국의 영웅 나리?"

지금도 봐라. 바로 이를 드러낸다.

"장담이 아니라 예지입니다."

"흥, 예지는 무슨...... 고작 힘의 조각 정도로 뭘 한다고?"

이건 무슨 소리지?

김현이 멀거니 쳐다보자 알렉산더가 씩 웃으며 한쪽을 보았다.

빨간 머리,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여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온다. 아까 보았으나 성혼이 겹치고 능력치가 별로여서 힐끗 보고 말았던 각성자.

크리스티나 화이트.

두 개의 성혼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득한 시선(혼돈, 2★)]

[짓무르는 땀(혼돈, 2★)]

짓무르는 땀은 침식형 체액을 생산하는 성혼이니 별 것 없다. 하지만 아득한 시선은 달랐다. 지금 김현이 쓰는 별의 관찰만큼이나 고급 성혼이었다.

'아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크리스티나가 김현을 보고 보유한 성혼에 대해 읽어낸 것이다. 22세기의 개념은 없으니 김현처럼 일목요연하게는 몰라도 예지 성혼이 1성에 불과하다는 건 확인했겠지.

그나저나 이런 여자가 있었나?

원 역사에서는 이름을 못 남기고 죽은 것 같다. 하기야 혼돈 성향이면 오래 살긴 힘드니까. 세기의 대천재, 차오 박사도 아직은 젖먹이일 때고.

"저와 비슷한 성혼을 가진 분이네요."

크리스티나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Mr. 김.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당신, 예지 각성자가 아니죠?"

"음?"

"그게 무슨......"

"예지 각성자가 아니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크리스티나의 성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모양. 정부 관료와 각성자 모두가 그랬다.

대통령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자연히 김현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번역이 잘못됐습니다."

"네?"

"제가 기자들에게 밝혔던 것들 다 확인해 보세요. 전 예지 [능력(talent)]이라고 했지 예지 [성혼(star spirit)]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능력과 성혼의 차이.

그 둘은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르다.

크리스티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다르다고요?"

"네. 아득한 시선으로는 안 보입니다."

크리스티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김현의 성혼을 읽고 혹시나 했는데, 자신의 성혼을 정확히 읽어낸 까닭이다.

이때 김현은 크리스티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모르는 이름인데 각성한 성혼을 살펴보니 떠오르는 지식이 있어서였다.

'알렉산더는 7월 초에 저스티스 팀을 만들었지.'

총 여섯 명의 각성자가 참여한다.

얼음불꽃 리아 테일러, 그리고 신원미상의 네 각성자.

성향만큼은 기억한다. 각자 용왕, 해성, 무형, 혼돈이었다.

처음 두어 번은 무난히 성공한다. 세 번째에서 사달이 벌어졌다. 무형계 각성자와 혼돈계 각성자가 사망하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팀이 깨진 것.

"러시모어 산은 가지 마세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크리스티나.

"예일대학교나 디즈니 월드는 괜찮습니다. 거기까진 무난할 거예요. 러시모어 산은 안 됩니다. 브라운 씨에게 들었을 여섯 명이서 가시면 화이트 양은 죽어요."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죽음의 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알렉산더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러시모어 산? 잘못 짚으셨습니다. 예일대학교? 디즈니 월드? 하하, 다 틀렸습니다! 저와 티나는 거기에 가지 않을 예정이니까!"

"그래요?"

김현은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읽었으니까.

알렉산더는 방금 거짓말을 했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예일대학교, 디즈니 월드, 러시모어 산을 복구하려고 했다.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관심을 집중시키고, 미국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큰 바위 얼굴을 복구함으로써 인기를 타려고 한 것.

표정 관리를 잘하긴 했으나 흔들리는 눈만큼은 못 감춘다. 그것만으로도 김현은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지, 진짠가?"

"실은 예지 능력이 없을지도 몰라."

"에이, 그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예지한 거 다 맞았잖아."

"그야 모르지."

예지 능력자는 이게 피곤하다.

99개를 맞춰도 1개를 틀리면 바로 의심을 받으니...... 특히 이번 건 애초에 알렉산더가 거짓을 말하면 바로 틀린 예지가 되어 버리고.

아무래도 좋다.

김현은 자기 할 말을 했다.

"기억하세요. 천상, 염옥, 용왕, 해성, 무형, 혼돈, 이렇게 여섯 계열 각성자가 러시모어 산에 들어가면 화이트 양이 죽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조합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조심하시고요."

이번만큼은 움찔하는 크리스티나.

한 차례 가졌던 모임에서 김현이 말한 조합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푸하하하!"

알렉산더가 갑자기 쩌렁쩌렁 웃어젖혔다.

"능력도 좋으십니다. 제 팀의 구성도 알아내시고...... 하지만 말이죠, 그걸로는 예지 능력을 증명할 수 없는데요?"

"왜 제가 예지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지?"

"호오, 꼬리를 마시는 겁니까?"

알렉산더가 빙글빙글 웃는다.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귀찮습니다."

이렇게 입씨름을 하는 것 자체가, 앞에 있는 알렉산더의 존재도.

알렉산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자다 보니 파리 쫓듯 뱉은 말에 감정이 상한 것.

어차피 6월 6일만 되어도 증명될 일이다. 굳이 이곳에서 논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

'어쨌든.'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알렉산더는 적이다.

"6월 6일에 봅시다."

홱 몸을 돌렸다.

알렉산더가 김현의 어깨를 잡았다.

"도망가는 거냐?"

어깨를 가볍게 털었다. 간단한 몸짓 같지만 수십 년에 걸친 실전 경험이 이 동작에 녹아 있었다.

와당탕!

아무리 3성 등급 각성자라 해도 그 실체는 평범한 20대 청년. 감당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냉엄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멍한 표정.

곧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듯 굴욕감과 수치심이 얼굴 가득 번져갔다.

푸들푸들 떤다. 이를 악문 채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뿐. 알렉산더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일을 벌일 담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분노와 증오로 범벅이 된 음성이 들려왔다.

"Fucking yellow monkey......"

김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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