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43화 (43/200)

# 43

백악관의 밤 –3-

뒤로 돌았다.

주먹을 꽉 쥔다.

가늘어진 두 눈이 어느새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알렉산더가 입을 다물었다.

성급하고 경박하며 옹졸한 위인이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다. 지금 세상에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다간 단숨에 매장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글쎄, 내가 뭐라고 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죽거리는 눈빛은 그대로. 김현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린다.

입술이 특정한 발음을 흉내냈다.

천천히, 대신 명확하게.

[Yello monkey.]

어쩔 거냐는 시선을 보내는 알렉산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의 잔향이 사라지기도 전, 주먹을 날렸다.

뻐억!

"커헉!"

오른쪽 주먹이 알렉산더의 배에 꽂혔다.

의수로 때리지 않은 게 김현의 마지막 자비. 그걸로 쳤으면 체력 능력치가 11에 불과한 알렉산더의 내장이 갈가리 찢어졌을 테니까.

알렉산더가 허리를 굽힌다. 말간 액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기서 끝낼 수 없지.

마침 딱 좋은 위치. 오른쪽 무릎을 올려 쳤다. 정확히 알렉산더의 얼굴을 갈아 버린다. 걸쭉한 침과 피에 섞여서 하얀 옥수수알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옆에서 누군가 김현의 팔을 잡았다. 누구의 것인지는 뻔하다.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방해할 거야?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더 때려."

대개 김현을 말리려고 했던 김애경치고는 의외.

김애경의 눈이 전에 없이 서늘했다.

"싫으면 내가 때린다."

무릎을 꿇고 신음을 토하는 알렉산더.

김애경이 힘껏 걷어찬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알렉산더가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그만! 그만!"

구경만 하는 각성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이 급히 제지하고 나섰다.

"좋은 날에 왜 그러십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못 이기는 척 물러난다.

알렉산더가 옆구리를 잡고 비칠비칠 일어났다. 양 손에서 새하얀 빛이 타닥타닥 튀고 있었다.

척! 처척!

경호원들이 급히 접근했다. 사방에서 알렉산더를 포위하고 권총을 꺼내 겨눈다. 알렉산더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치료도 못합니까?"

알렉산더의 성혼은 천사검. 발현만 해도 주인을 치료한다.

보고 있던 치유 계열 각성자가 다가갔다. 알렉산더가 얼굴을 찌푸린 채 치료를 받았다. 녹색의 광채가 전신을 훑자 창백하던 피부에 혈색이 돈다.

알렉산더가 천사검을 거두자 경호원들도 권총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을 알렉산더에게 보내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면 바로 총을 쏘겠다는 태도.

"어처구니가 없네요. 피해자는 난데 왜 나한테 이럽니까?"

"풋!"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산더가 입을 열자 듬성듬성 빠진 치아가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가 맹구처럼 변했다.

알렉산더가 이를 악물었다.

"됐고, 법정에서 봅시다. 앞으로는 내 변호사와 얘기해야 할 겁니다."

"마음대로, 인종차별주의자야."

대놓고 비웃어 주었다.

"죽이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

김애경도 거들었다.

조금 전의 응징에서 둘은 성혼을 쓰지 않고 순수한 육체적인 힘만으로 알렉산더를 구타했다. 그래서 경호원들이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혹시나 해서 대통령 옆으로 모여들기만 했지.

알렉산더가 둘을 노려보았다. 이어 몸을 떨며 연회장 밖으로 휙 나가 버린다.

대통령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인종차별주의자라니,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저보고 노랑 원숭이라고 하더군요."

"설마요. 브라운 씨는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습니다."

"사실입니다."

김현의 말에 동조하는 각성자들이 몇 있었다. 아까 김현 근처에 있어서, 그리고 일반인보다 감각이 조금은 깨어난 탓에 알렉산더가 욕하는 소리를 들은 것.

대통령이 인상을 썼다. 기껏 김현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인종차별이라니? 그러다가 겨우 잡은 대어가 날아가기만 하면 어쩌라고?

"으흠, 미국을 대신해 Mr. 김에게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 알렉산더 브라운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양식 없는 자들은 미국에서도 극소수입니다."

"뭐, 알겠습니다. 대신 법적인 도움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요. 그 정도는 도와드려야지요. 아, 혹시 증인으로 나서실 분은 안 계십니까?"

대통령이 미국의 각성자들을 돌아본다.

썰물처럼 소리가 빠졌다. 각성자들은 침묵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인종차별은 싫다. 김현도 싫다. 그런 심리가 그들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하지."

코와 귀, 입술에 피어싱을 줄줄이 한 흑인이 앞으로 나섰다.

악마심의 소유자, 닉 스미스.

눈빛이 묘했다. 마치 유리알 같았다. 닉 주변에는 비슷한 기질을 가진 자들이 몰려 있었다.

"인종차별이라니, 말이 돼? 그런 놈들은 쓴맛을 봐야 해."

이건 핑계. 실은 알렉산더가 그냥 아니꼬워서였다. 이 기회에 엿을 먹이자고 생각한 것.

여기까진 짐작했다. 그런데 김현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끼어들었다.

"저도 들었어요. 필요하면 저도 법원에 출두할게요."

리아 테일러.

금발에 푸른 눈. 당장 헐리우드에 진출해도 될 만큼 빼어난 미모.

김현은 떨떠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테일러 양은 브라운 씨의 팀에 들어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원 역사에서는 둘이 사귀기까지 했다. 깊은 사이가 된 후, 리아의 성벽이 도지는 바람에 헤어졌으나.

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어머, 절 인종차별주의자와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면 곤란해요. 몰랐으면 몰라도 알았는데 그런 사람과 함께할 생각은 없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기만 한 태도.

그러나 뱀과 같은 눈빛이 한순간 일어났다가 스러진다. 그 눈이 김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연달아 옆에 서 있는 김애경의 육체도 한 번 보았다가 점점이 멀어진다.

그것은 식욕. 개구리를 보는 뱀과 같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리아의 행동을 결정한 건 성욕이었다. 김현과 김애경, 둘 다에게 욕정을 느끼는 것. 어쩌면 머릿속으로 같은 침대에서 김현과 김애경을 동시에 품는 자신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역겹네.'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22세기, 사랑은 없이 번식만 남은 시대를 살다 온 아론도, 아직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던 모태솔로 김현도, 둘 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러세요. 참,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말씀하세요."

"혹시 Mr. 김과 Miz. 김의 팀에 남는 자리가 있나요? 저도 기왕이면 믿음직스러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데."

리아가 촉촉한 눈으로 김현의 눈을 들여다본다. 김현이 대답하기도 전 옆에서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거 재미있겠는걸. 나는 어때? 나도 좀 끼워주지."

닉 스미스였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자기 팀을 결성할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김현의 일행에 합류하겠다고 한 것.

리아의 얼굴에 잠깐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닉은 리아에게 흑심이 있었다. 엔젤 팀에는 알렉산더의 거절로 합류하지 못했지만, 김현의 팀에는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오, 그거 멋집니다!"

대통령이 오른손 엄지를 들었다.

"이건 진짜 드림 팀, 슈퍼 팀이 되겠습니다. 새로운 영웅들과 원래 있던 영웅들의 만남! 이것이야말로 전설이 아니겠습니까?"

각성자들이 시기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랬으니까. 김현 일행에, 미국에서도 유명한 닉과 리아가 합류하면 슈퍼 팀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김현은 둘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 팀에 필요한 각성자는 따로 뽑을 생각입니다."

"어마, 그래요?"

리아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렇다면야 뭐...... 저도 응원할게요. 과연 얼마나 대단하신 동료를 뽑을지는 모르겠지만."

푸른 눈동자에 음험한 빛이 스친다.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태도.

김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알렉산더 관련해서도 그렇지만 앞으로 골치 좀 아프게 생겼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연락 달라고."

닉도 리아 없는 김현 일행에는 관심이 없었다. 적당히 손을 흔들고 자기 패거리와 함께 연회장 구석으로 움직였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분위기를 망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사전에 잘 다독이지 못한 제 실수도 있습니다. 편히 쉬시고, 슈퍼 팀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은 아직도 닉과 리아의 합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적당히 달래주고는 연회장을 나섰다. 연회장에서 멀어져서 복도를 한 번 돌자마자 이세희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으아, 힘들었다!"

"넌 뭘 했다고 힘들어?"

"나라고 가만히 있었겠어? 얼마나 긴장했다고. 정말 싸움 나는 줄 알았어."

이세희가 드레스를 살짝 열어 안쪽을 보여주었다. 가슴 부위에 달린 하늘 수정이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휴, 어제처럼 육탄 방어라도 하게?"

"필요하면?"

"좋은 거 배웠다, 아주."

"그건 그렇고 김현 님. 아까 그 사람들 괜찮아 보이던데 왜 거절한 거예요?"

이건 조금 민감한 얘기.

방에 들어온 다음에야 이유를 설명했다. 김애경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양성애자에 가학 성애자, 시체 성애자라고?"

"응. 왜, 관심 있어?"

"미쳤냐? 너나 꼬셔 보던가. 예쁘긴 예쁘던데."

"됐어."

"저기 근데 악마심이라는 거요. 사람 성격까지 바꿀 정도면 저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세희는 본인이 천상계 각성자다 보니 닉의 성혼에 관심이 가나 보다. 천상계와 악마계는 정확히 반대되는 성향이고, 많은 점에서 닮았으니까.

"악마계나 혼돈계는 다른 세계에 비교해서 각성자한테 미치는 영향이 커요. 천상계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악마계보다는 낫습니다. 소환 계열 성혼만 조심하면 돼요."

"소환 계열...... 알았어요."

여담이지만 알렉산더의 천사검도 소환 계열이다. 소환을 거듭할수록 더욱 오만해지고 독선적으로 변한다.

오늘 일도 이것 때문에 생긴 거냐고?

천만에.

아직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하지도 오래되지도 않았다. 알렉산더가 보이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졸렬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원 보충은 어떻게 할 거야? 최소한 두 명은 더 뽑아서 갈 거라며."

"생각이 있어."

"뭔데?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슈퍼 팀은 우리가 따야지. 아까 그놈이 가져가면 열 뻗쳐서 잠도 못 잘 것 같아."

김애경이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그때마다 뿌득뿌득 소리가 났다.

"나한테 맡겨. 나도 인종차별주의자 새끼한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놈은 제대로 팀 운영하기도 힘든 인간이야."

"그건 그렇겠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비밀이에요?"

"비밀은 아니죠."

다른 사람들도 아닌, 운명 공동체인 둘에게라면.

"오디션을 볼 겁니다."

"네? 오디션이요?"

"오디션? 지금 이 시점에?"

"응."

언젠가 언급했듯이 김현은 이 시대 미국의 각성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저 최상위권의 각성자들에 대한 역사적 지식만 있을 뿐.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장 하나의 팀을 꾸리는 데는. 비록 나중에 규모가 커지면 문제가 되겠으나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마침 귀빈 숙소에 세계 전도와 미국 전도가 걸려 있었다. 미국 전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로 가자."

김애경과 이세희의 눈이 집중된다.

미국 동부.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미국, 하면 떠오르는 도시.

뉴욕.

그곳에 미래의 랭커 둘이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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