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오디션 –1-
걷는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걷는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앞쪽에서 연신 터지고 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간절한 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통나무처럼 두툼한 다리가 앞에 쑥 하고 나타나 다리를 걸었다.
"으악!"
나동그라지는 빈약한 육체.
낄낄!
웃음소리가 합창처럼 울렸다.
"야, 피터. 걸음마 하냐?"
"그래서 슈퍼히어로가 되겠어?"
"집에나 가, 등신아! 너 같은 놈이 오디션 보는 건 우리 학교 수치야!"
그 말에 피터도 용기를 냈다.
"나, 나도 오디션 볼 거야!"
"푸하하하!"
"야, 들었어?"
"나, 나도 오디션 볼 거래!"
"푸하하하!"
"야, 너 같은 등신은 괴물을 보기만 해도 오줌 지리고 도망칠 걸?"
"우리 같은 사나이나 괴물들이랑 싸우는 거지, 등신 새끼는 집에 가서 만화책 보고 딸딸이나 쳐."
"무슨 일이냐?"
순찰 돌던 경찰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다들 덩치가 산 만했다. 얼굴도 험상궂어서, 찧고 까불던 운동부 놈들이 다들 합죽이가 된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학교 친구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흠, 그래? 어쨌든 조용히 해라. 여긴 너희만 있는 거 아니니까."
"Yes, Sir."
경찰들이 지나갔다. 피터도 눈치를 봐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건물 복도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우!"
슈퍼히어로는 피터의 오랜 꿈.
특히 같은 이름을 쓰는 마블의 어떤 히어로를 아주 좋아했다. 집의 책장 하나를 그 히어로의 만화책으로 가득 채웠을 정도.
그러던 차에 뉴스를 보았다.
대한민국의 김현이라는 각성자가 미국에 왔고, 펜타곤을 복구하였으며, 앞으로 외계종과 함께 맞설 히어로 후보를 모집한다고.
나이 17세에서 19세까지가 대상. 오늘, 딱 하루 동안 오디션을 봐서 합격한 사람을 각성시키고 동료로 삼는다고 했지.
갑작스레 발표된 내용인데도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디션은 뉴욕에서 열렸지만 미국 서부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초조히 기다렸다. 뭘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 왜 탈락인데!"
"기준이 뭐야?"
"딱 2명 뽑는다잖아. 애초에 기대하면 안 됐어."
"빌어먹을. 꺼지라고 해! 퍼킹 옐로우 몽키!"
탈락한 자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피터도 초조하게 엄지손가락 손톱을 깨물었다.
애초에 큰 기대는 안 했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사람만 거의 수천 명을 넘는다. 과연 이들과 경쟁해서 각성자 김현의 동료가 될 수 있을까?
난쟁이에 어리버리하고, 항상 주눅들어 땅만 보고 다니는 자신이?
자신감이 없어졌다.
"다음 다섯 분 들어가세요!"
드디어 피터의 차례.
적당히 다섯 명이서 한꺼번에 면접실로 들어갔는데, 피터는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을 스쳐 지나간 한 여자 때문에.
별처럼 반짝이는 화려한 금발, 우윳빛 녹아내리는 피부, 불룩한 가슴, 달콤한 샴푸 냄새가 피터의 심장을 뒤흔들어 버렸다.
"안 들어가세요?"
멍하니 그 뒷모습만 보고 있자 안내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드, 들어갑니다!"
허둥대며 면접실로 들어가는 피터.
너무 서두른 걸까?
바닥에 미끄러지며 쾅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면접실에 앉아 있던 세 동양인의 시선이, 그리고 방금 전 그 여자는 물론 면접 보러 온 이들의 눈이 온통 집중된다.
울상을 짓는 피터.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망했다......'
***
<능력>
[이름] 피터 엘렌 [성별] 남성 [나이] 1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7 [체력] 8 [민첩] 9 [감각] 8
[혼력] 13 [의지] 11 [통찰] 12 [위엄] 9
[성향] 광명
[성혼] 없음
'신기한 사람이라니까.'
눈앞의 피터 엘렌은 원 역사에서도 어벙이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미국의 10대 랭커로, 나아가 뉴욕 공방전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불살라가며 외계종 군단을 다 쓸어버리게 된다는 게 신기했다.
이세희가 슬쩍 눈빛을 던졌다. 셋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얽혔다가 떨어진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여자 예쁘다, 라고.
<능력>
[이름] 에일리 켄트 [성별] 여성 [나이] 19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11 [체력] 12 [민첩] 12 [감각] 11
[혼력] 13 [의지] 12 [통찰] 9 [위엄] 15
[성향] 해성
[성혼] 없음
겉보기에는 아름답기만 한 에일리 켄트. 하지만 그 잔혹한 손속과 대범한 돌격으로 유명한 여자였다.
"반갑습니다. 한 분씩 나오셔서 여기 수정구에 손을 대 주세요."
방 중앙에는 작은 책상이 있고, 그 책상 위에 오묘한 빛을 뿜는 수정구가 하나 보였다.
다섯 명 모두 서로 눈치만 본다. 그러다 에일리가 씩씩하게 일어나 수정구로 다가갔다. 수정구에 손을 가져가자 한 차례 맑은 빛이 터졌다.
일반인에게는 그저 매혹적인 빛으로만 보인다. 별의 관찰 등 판독 계열 성혼을 가지고 있어야 수정구의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잠재>
[성향] 해성 [자질] 최상
[계열] 구현, 강화, 돌격
[합치] 소용돌이
김현만 이걸 보고 있지는 않았다. 왼손 의수를 통해 책상에 설치한 금속판에 전기 신호를 흘려보낸다. 그러자 김애경과 이세희의 모니터에도 똑같은 내용이 떴다.
이번 오디션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벌일 확장을 위해 김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스템.
이세희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자질 최상.
이건 인간 중에서도 드물다. 충분히 최상위 각성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 김현의 자질은 뭐냐고?
중급이다.
김애경은 최상, 이세희는 상급이고.
"네, 됐습니다. 다음 분."
에일리가 멈칫했다.
"저, 불합격인가요?"
이걸 지금 말해 줘? 말어?
잠깐 망설이다가 에일리를 보았다. 푸른 호수 같은 눈이 사슴 같은 간절함을 품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 굳이 시간 끌 것 없지. 지금 여기서 다 끝내 버리자.
"합격입니다."
단호한 그 한 마디.
에일리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정말요? 정말이죠?"
"그럼요. 데이지 양, 저 분 좀 대기실로 데려가시겠어요? 몇 가지 확인하고 각성 절차 진행하겠습니다."
"네, Mr. 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일리가 희색이 만면한 채 안내원을 따라 뒤쪽 문으로 나갔다. 그걸 보는 남은 4명의 얼굴에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왜 쟤야? 예뻐서?"
김애경이 짓궂은 얼굴로 묻는다.
김현은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우리한테 필요한 인재라서 그런 거지."
"최상 자질은 몇 명 있었잖아?"
"그 사람들은 성향이 조금 그랬어. 계열이 안 좋기도 했고...... 우린 지금 동료가 필요하지 동업자가 필요한 건 아니야."
"그건 그래."
사실 적당히 끼워맞춘 것이다.
오디션의 원래 목표가 피터 엘렌과 에일리 켄트였으니까. 이 당시에는 이름과 나이, 대략적인 거주지만 알고 있어서 대규모 오디션으로 찾아오게끔 유도를 했지.
그냥 찾아가서 명함 주면 안 되냐고?
단지 둘만 데려오고 말 거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나중 일도 생각을 해야지. 미국인 각성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으니 지금부터 쌓아두어야 한다. 이런 오디션 형식을 빌려서라도.
"저, 저도 검사 받겠습니다!"
덩치 큰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눈앞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까닭에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물론 불합격.
다른 둘도 불합격이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검사한 얍실한 눈매의 남학생이 난동을 피웠다.
"뭐야! 이건 불공평해! 내가 왜 불합격인데?"
"끌고 가세요."
간단히 제압. 이제 피터 혼자 남았다.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김현.
피터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비칠비칠 일어난다. 수정구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자 지켜보던 이세희의 얼굴에 지겹다는 빛이 떠올랐다.
분명히 불합격이겠지. 이런 어리버리한 녀석은.
그러나 그 반대였다. 수정구에 손을 대고, 모니터에 김현이 입력하는 정보를 보자 저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말도 안 돼!"
<잠재>
[성향] 광명 [자질] 최상
[계열] 구현, 발사, 탐지
[합치] 광선 폭격
에일리와 비슷한 수준 아닌가.
자질은 최상, 계열은 세 개에 합치 성혼까지 있으니.
"합격!"
김현의 통보에 피터의 눈이 흔들린다.
"지, 진심이세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피터.
"예, 진심입니다."
"저, 저는 싸울 자신이 없는데......"
피터는 기뻐하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원 역사에서도 그랬다. 3성 등급 광선 폭격을 얻었으면서도 처음에는 그냥 썩히고만 있었다. 끽해야 사고만 몇 번 쳤지. 그러다가 외계종에 의해 부모님을 잃은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각성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김현은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으스스한 웃음을 한 가닥 머금고 피터를 노려 보았다.
"제가 보기에도 그래 보입니다. 뭐, 지금이라도 포기하시겠다면 그냥 돌려 보내드리죠."
"싫어요!"
소리를 빽 지르더니, 자기가 제 소리에 놀라 눈치를 살폈다.
"어......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에이, 뭐 그런 걸로 용서를 하고 말고 합니까. 어쨌든 각성하시고 저랑 같이 싸우실 거면 저 뒤로 가시고, 아니면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저랑 함께 하신다고 하면 엘렌 씨의 정신머리를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개조해드리죠."
김현은 일부러 왼손을 꽉 쥐어 보였다.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며 거친 소리가 울리고, 백호의 힘에서 비롯된 백색 광채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피터가 침을 꿀꺽 삼킨다.
위협적인 태도라 무섭기는 하다. 그러나 저 빛이, 의수에서 어른거리는 저 빛이 도저히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도 저 남자처럼 초능력을 부리며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만화 속 피터처럼 변할 수 있을까?
한 번만 해보자.
용기를 내자.
딱 한 번만......
"하, 할게요."
"좋습니다. 지금 결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뒤로 가세요."
피터가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뒤쪽 문을 통과했다. 김애경이 그걸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야, 괜찮겠어? 차라리 잠재력 없어도 정신력 좋은 애를 뽑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런 애를 어디다 써?"
"나한테 맡겨. 다 계획이 있으니까."
"걱정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피터가 발사 계열 각성자라는 점. 합치 성혼도 광선 폭격이고.
뒤에서 성혼만 잘 써줘도 된다. 물론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치거나 발광하면 문제가 생기지만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은 22세기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세희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으아아! 이제 오디션은 끝이죠?"
"네? 그럴 리가요. 오늘 하루 내내 오디션 볼 건데요?"
"두 명만 뽑는다면서요."
"혹시 아까 둘처럼 뛰어난 사람 있으면 미리 뽑아야죠.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오디션 속행.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자질로 따져서 중급과 상급이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최상급의 자질을 가진 이도 있었다.
그래도 이 시점부터는 추가 신청을 막았다. 따라서 늦게 온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오디션은 해가 떨어진 다음에야 끝이 났다. 간단히 샌드위치를 저녁으로 먹으면서, 새롭게 동료가 될 피터와 에일리를 만났다.
여기서 김현은 미리 준비한 물건들을 꺼냈다.
둘의 합치 성혼인 소용돌이와 광선 폭격. 그리고 한 장의 계약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