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오디션 –2-
"읽어보세요."
별 내용은 없다.
앞으로 1달, 수습 기간 동안 둘은 김현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것. 대신 분배는 똑같다. 어차피 기여도 별 분배인데 굳이 비율을 깎을 필요는 없으니까.
계약서를 보더니 피터가 바짝 얼어붙었다.
"저, 저기 언제부터 괴물들이랑 싸우는데요?"
"사흘 후, 5월 28일부터입니다."
목표는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맨스 와프.
이곳은 도심 한복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범람이 일어날 경우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힐 터였다.
또, 김현은 7월 초에 이뤄진 피셔맨스 와프 세계 공략 기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여기부터 시작하여 최소 네 군데 이상을 복구할 생각이었다.
"후, 훈련 같은 건 안 해요?"
"실전이 가장 좋은 훈련이죠. 내일 하루 간단히 하고 가긴 할 겁니다."
간단히?
그럴 리가.
실제로는 하루도 아니다. 내일을 위해 특별한 훈련용 물건을 구했으니까.
"오 마이 갓......"
피터가 계속 겁을 내자 에일리가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저런 겁쟁이는 빼고 가죠. 도매금으로 얽히기 싫은데."
그러더니 계약서에다 휘리릭 사인을 갈겼다.
"전 동의. 불공정 계약도 아니고 인턴인데 이 정도면 엄청 좋은 조건인데요? 그렇다고 이상한 거 시키면 안 돼요."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역시 화통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에일리답다. 계약서를 한 번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굳이 미적미적 시간 끌 필요가 없지.
김현도 에일리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에일리 양 성혼입니다. 흡수해 보세요."
"아...... 이거에요?"
딸깍.
작은 상자가 열렸다.
은빛 젤리 같은 것이 반들반들 빛을 뿜고 있었다. 에일리가 홀린 듯이 그걸 보다가 서서히 손을 뻗었다.
번쩍!
손이 닿자마자 빛이 터졌다.
"어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
빛이 에일리를 집어삼켰다. 이내 심장 뛰는 것처럼 확장되고 축소되기를 반복한다.
언젠가 본 광경이었다.
이세희가 김현을 돌아보았다.
"김현 님, 이거 예전에 병원에서......"
"맞아요. 합치 성혼이거든요."
김애경도 비슷했지. 그때는 훨씬 더 극적이었지만.
에일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기 두 손을 들여다본다.
"써보세요."
"그래도 돼요?"
"네. 전력으로 쓰면 여기 다 망가지니까 조금만, 주먹 하나로만요."
김현이 왼쪽 손을 활짝 펼친 채 내밀었다.
에일리가 침을 삼켰다. 이어 주먹을 쥐고 단번에 내친다.
푸확!
물줄기가 뿜어진다. 그것이 에일리의 손에 감겨 송곳처럼 변했다. 그걸 금속 의수의 손바닥에 꽂자 둔중한 충격이 가해졌다.
'감각은 있네.'
하지만 틀렸다.
소용돌이 성혼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원 역사에서 그랬던 대로, 의수를 잡은 뒤 쥐어뜯으며 회전력을 발휘해야 했다.
"에일리 양도 내일 저한테 좀 배우셔야겠네요."
김애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 쓴 것 같은데?"
"소용돌이잖아. 회전력이 소용돌이의 정체성인데, 그걸 드릴처럼 써서는 죽도 밥도 안 돼."
"드릴이 아니라고요?"
"네. 해성계 성향이니까요. 바다의 소용돌이를 상상하세요. 아주 거대하고 막강한 소용돌이, 그 어떤 배로도 지나갈 수 없는 거요. 그걸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진짜 위력이 발휘돼요."
에일리가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말만으로는 얼른 감이 오지 않은 탓.
"저, 저기......"
눈치만 보던 피터가 용기를 냈다.
"저, 저도 계약해도 될까요?"
다들 마뜩잖은 기색인데 김현 혼자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요. 대신 앞으로 고생도 하실 거고, 저한테 많이 맞으실 건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계약서에도 적힌 내용.
포기도 못 한다. 그러려면 3성 등급 성혼 2개를 위약금으로 내라고 되어 있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어디서 3성 등급 성혼을 구해온단 말인가.
피터가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홱홱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인하세요."
계약을 마치고 성혼을 흡수시켰다.
이번에도 과녁은 김현의 의수. 피터가 머뭇거리다가 성혼을 발동시켰다. 아주 얇은 광선이 쏘아져 김현의 의수를 두드린다.
"애걔. 그거 가지고 뭐하게?"
퉁명스럽게 비꼬는 에일리.
피터가 머뭇거리다가 반박했다.
"저, 전력으로 쏘면 강해요."
"파리 한 마리 잡으면 다행이겠는데?"
"자자, 각자의 성혼에 대해서는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내일 다시 모여서 간단히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죠. 참, 엘렌 씨?"
"네? 네?"
"성혼 각성했다고 어디 가서 힘자랑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라고 드린 성혼 아니에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성혼 회수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회, 회수요?"
"네."
다른 말로는 성혼 추출.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정말로 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이런 엄포 정도는 해놔야지. 안 그랬다간 피터는 돌아가는 대로 자길 괴롭혔던 친구들에게 복수할 테니까.
"아, 알겠어요."
"켄트 양도 이상한 곳에 힘쓰시면 안 됩니다."
"전 저런 너드 새끼랑은 달라요."
에일리가 코웃음을 쳤다.
너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그 단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난 이제 영웅으로 각성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이후로 김현이 몇 마디를 더 했으나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장밋빛 미래만 상상하고 있었다.
광선 폭격으로 괴물들을 해치우는 자신.
그런 자신을 보는 친구들.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스포츠카를 몰아 떠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기의 미녀, 에일리가......
짝짝!
별안간 들린 손뼉 소리가 공상을 부수었다.
"그럼 내일 다시 뵙지요."
한참 좋았는데......
에일리가 먼저 일어나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 뒤를 쫓아가 보지만,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뭐 어때. 내일이면 또 볼 수 있는데.
에일리가 너드라고 욕했던 건 진즉 잊어버렸다. 생전 처음 보는 미녀. 피터의 공상 속에서 에일리는 자신과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땅만 보면서, 어기적어기적 비틀거리며.
그러느라 늦게 알아챘다.
"야! 피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피터! 이 너드 새끼야!"
그것도 익숙한 목소리가.
누군가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머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퍽!
"아악!"
쇠망치 같은 주먹이 피터의 아랫배에 박혔다.
아무리 각성을 했어도 육체는 달라진 게 없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한참을 꺽꺽거리다가 위를 보니, 각진 얼굴에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 펠릭스......"
"이 새끼, 말이 말 같지 않아?"
펠릭스가 씩씩대며 피터를 걷어찼다. 피터의 몸이 덜컥 들렸다가 나동그라진다.
"펠릭스, 네가 참아."
"저 새끼 또 병원 실려 가겠다."
"하여간 약골이라니까."
"오디션 통과했다는 것도 거짓말 아냐?"
펠릭스가 피터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해롱거리자 뺨을 후려친다.
불같은 통증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왜, 왜?"
"새꺄, 너 정말 오디션 합격한 거 맞아? 어? 그 kim인지 cum인지 하는 새끼 거 빨아주기로 한 거 맞냐고."
kim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울러 새삼 느껴진다. 심장에 깃든 채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이 힘이.
"그래, 맞아."
"와, 이 새끼 게이였네."
"으 더러워."
"그래서 각성은 했냐? 아니면 빨아주기만 했냐?"
다들 조용해진다. 펠릭스도 멱살 잡은 손을 놓았다. 모두 호기심에 차서 피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연히 우쭐해졌다.
"각성했지."
"뭐? 진짜?"
"이 새끼, 구라까는 거 아니야?"
"구라면 뒈진다."
"진짠데."
"그럼 초능력 한 번 써 봐."
순간 김현의 경고가 생각나 몸을 떨었다.
그러나 펠릭스가 주먹을 들이대며 을러대자 김현의 경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대신 어떤 감정이 가슴 한편에서 자라났다.
분노, 오기.
뜨거운 불꽃이 촛불처럼 켜져 머리 위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난 각성잔데......'
욕망이 솟구친다.
이대로 광선 폭격을 눈앞의 펠릭스에게 먹여 버리고 싶다는, 저열한 살의.
"이 새끼, 내 말 안 들려?"
"아, 알았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펠릭스가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자 깨끗이 지워졌다. 수년 넘게 반복 학습한 본능은 각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쿠앙!
성혼을 발현하는 피터.
빛이 쏘아졌다. 통나무 굵기의 광선이 날아들어 저 앞의 가로등을 강타한다. 섬광이 터지며 가로등을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쾅! 삐잉삐잉삐잉.
폭음에 이어서, 주변의 자동차들이 일제히 경고음을 냈다.
잠시 침묵.
이어 요란한 술렁임이 번졌다.
"씨바...... 좆 쩐다!"
"세상은 불공평해!"
"저 따위 너드 새끼한테!"
질투와 시기로 가득 찬 시선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뿐. 예전처럼 주먹을 휘두르거나 걷어차지는 못했다. 오히려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잘못 건드렸다가 폭주라도 하면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인데.
펠릭스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피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흠, 흠, 축하한다. 피터. 난 네가 성공할 줄 알고 있었어. 내일 학교에서 보자."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홱 돌린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걸어가긴 하는데, 그 뒷모습이 꼭 물에 빠진 들개를 보는 것 같아.
"어어?"
"펠릭스!"
"같이 가!"
항상 같이 몰려다니던 패거리도 펠릭스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피터는 멍하니 서서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믿어지지 않는다.
펠릭스 패거리가 더 패악을 부리지 않고 꽁무니를 뺏다는 게.
피터는 자신의 손과 망가진 가로등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예스! 예스! 예스!"
주먹을 쥐고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펠릭스의 표정.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장하고 있었지만 몇 년이나 시달린 피터를 속일 수는 없었다.
겁먹었다.
나한테.
샌드백, 너드, 찐따, 등신이라고 불리던 나를 보고.
어쩜 이리도 황홀한지 몰랐다.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가슴이 하도 벅차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싸늘한 음성이 고막을 관통했다.
"좋냐?"
익숙한 목소리.
피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바로 몇 미터 뒤, 높다란 가로등 위에 한 남자가 앉아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계로 만들어진 왼쪽 팔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여 서늘한 빛을 뿌렸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
남자, 김현이 발을 까딱였다.
"좋냐고."
"그, 그게......"
피터는 말없이 눈만 굴렸다.
그럼 좋지, 안 좋아?
김현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 어쩐지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쫓아왔더니 이 모양이다. 그나마 사람에게 성혼을 안 쓴 건 다행이지만 벌써 공공기물 파손이나 하고 있고, 잘하는 짓이었다.
이해는 한다. 펠릭스 패거리와 피터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됐으니까.
하지만 정신이 이렇게 나약해서야 어디에 써먹겠나. 아무리 원거리 공격수로 키울 거라고는 해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이세희처럼 직접 몸을 던지기도 해야 하는데.
주먹을 꽉 쥐었다.
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오해라, 피터."
"네, 네?"
"내일부터 지옥 훈련 시작이다."
피터의 눈에 빛이 화악 번졌다.
꿈꾸는 얼굴.
만화책에서 나오는 히어로와 사이드킥의 우정 같은 걸 생각하나 본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김현은 22세기를 살던 인물.
지옥 훈련에 대한 개념이 아득히 달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