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48화 (48/200)

# 48

해성계 –2-

시간이 멎은 것 같다.

집중되는 시선 사이에서 에일리의 눈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

쿵!

가녀린 몸이 뒤로 넘어가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Oh, my god!"

그걸 지켜보던 피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김현은 앞으로 돌진하며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적색 광선 같은 게 빛나며 민달팽이를 때렸다.

기이잉.

머릿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또 정신 공격. 이번에는 얼마 전 백악관에서의 일이 재현된다. 다른 것은 다 그때와 같은데 대통령이 꾸무룩한 얼굴로 김현을 보고 있었다.

감히 누굴 속이려고.

단숨에 도달하여 백호검을 휘둘렀다. 백호검이 대통령의 머리를 쪼갠다. 대통령이 뻐끔거리며 김현을 보다가 고개를 꺾고 말았다.

복구되는 세계.

일행이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피터가 에일리를 힐끔거리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정도. 쉬지 않고 광선을 쏘아 조개껍데기를 두드렸다.

잠시 지켜보자 그쪽 전투도 끝.

이세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치료해주세요."

"네, 아, 네!"

이세희는 찰떡처럼 김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눈웃음을 치고는 널브러진 에일리를 향해 다가간다.

가장 먼저 이마를 살핀다. 약간 불그죽죽한 자국이 남아 있으나 그게 전부. 목에 손을 가져간 다음 김현을 돌아본다.

"살아 있어요!"

당연하지.

괜히 김현이 아까 거리를 재고 총을 쏜 게 아니다.

요 며칠 김현은 바쁜 와중에도 총알 개조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지 않으면 수중에서는 유효 사정거리가 수십 센티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중 소총인 APS를 들고 오는 것도 고려했으나 위력이 마음에 차지 않아 기각.

개조한 총알은 탄두는 아예 없이 운동 에너지를 혼력 에너지로 바꾸어 쏘아 보낸다. 사정거리는 약 100미터. 거리가 멀어지면 위력이 급감하지만, 근거리에서는 충분히 효과적이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웠다면 두개골을 뚫고 대뇌를 휘저었을 것이다. 더 멀었으면 기절시키지 못했을 테고. 총알에 대해 잘 아는, 해성계의 혼력 분포까지 염두에 둔 철저한 계산이 빚어낸 한 방이었다.

"으으으......"

치료를 받고 에일리가 눈을 떴다.

김애경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당연하지."

지금은 좀 어설픈 것 같아도 미래에는 랭커가 될 인물이다. 잘 달래고 얼러서 끌고 가야지, 실수 한 번 했다고 죽여 버리면 그 무슨 멍청한 짓이냐?

에일리가 주위를 돌아본다. 자기 이마를 더듬더니, 사태를 파악하고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멍청했어요!"

"멍청하기는요. 이번에 한 번 겪어보셨으니 나중에는 잘하실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어떻습니까?"

"예? 한 번 더요?"

"그럼요. 몇 번 더 해보면 익숙해지겠지요. 혹시 압니까? 정신 공격 방어하는 성혼이라도 생길지."

김현이 으스스한 웃음을 짓는다. 에일리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두 주먹을 쥐며 의지를 다졌다.

"열심히 할게요!"

하고자 하는 의지는 좋다. 너무 과해서 탈이지만.

"야, 나도 한 번 해보자."

"누나가?"

"어. 정신 공격 그거 꽤 무섭던데 지금 익숙해져야지."

"알았어. 죽지만 마. 아, 투구 쓰는 거 잊지 말고."

아까 설명했던 내용을 똑같이 설명했다. 김애경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심 기대를 했다.

그 김애경이니까. 애경 장군이니까.

과연 그러했다.

김애경은 김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민달팽이의 일곱 쌍 눈이 번뜩이는 와중에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주먹을 내리꽂은 것.

"퉤!"

환상으로 무얼 본 건지 걸쭉한 가래침을 뱉었다.

"수고했어."

목이라도 축이라고 생수통을 내밀었다. 김애경이 거칠게 뚜껑을 따서는 500ml 생수통을 단숨에 비웠다.

"언니, 왜 그래?"

"그런 게 있어. 으으, 주태일 그 새끼 진짜......"

옛날 기억을 떠올렸나 보다.

김애경의 성공을 보고 용기를 얻은 걸까. 이세희도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섰다. 에일리가 미쳤다는 눈으로 보았으나 말리지는 않았고.

사실 나쁠 건 없지.

김현은 이세희가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건국대학교에서 이미 겪어본 경험이 있을뿐더러 천상계 성향 각성자들은 다른 세계의 정신 공격에 대해 내성이 강하니까.

정말로 그랬다. 이세희도 성공했다. 공격용 성혼만 있었으면 혼자 민달팽이를 잡고도 남았겠다.

피터도 김현이 강제로 내몰아 도전.

"크악!"

당연히 실패했다.

눈을 까뒤집으며 일행에게 광선 폭격을 쏘려는 걸 급히 저지했다. 총을 쏴서 쓰러뜨린 다음 이세희가 치료한 것.

"아직 멀었어."

"죄, 죄송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도 뭐, 둘은 잘하고 있었다.

최소한 공황에 빠져서 아군을 공격하거나 도망치지는 않았으니까. 그것만 해도 햇병아리치곤 용했다.

이후 쾌속 돌파. 축 지킴이를 만나게 되었다.

[갑각 문어]

3성 등급의 강력한 괴물.

그러나 김현 일행 앞에서는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사멸하는 문어의 사체에서 성혼 두 개가 너울너울 떨어졌다.

[심해 갑각(해성, 3★)]

[소용돌이(해성, 3★)]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성혼을 낚아챈 다음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세희가 관심을 드러냈다.

"무슨 성혼이에요?"

"3성 등급 심해 갑각이랑 3성 등급 소용돌이입니다."

"또 소용돌이요?"

사실 여태까지 오면서 소용돌이 몇 개를 얻었다. 모두 2성 등급이었지만.

그 때문인지 에일리가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해성계에서는 꽤 흔한 성혼입니다. 그래도 갈고 닦으면 무시무시하니까 실망하진 마세요."

남은 것은 축 두 개와 중심점 하나.

잠시 기다렸다.

곧 기다리던 일이 벌어진다.

두두두두두.

콩 볶는 듯한 소리.

해저 지면이 들썩인다. 누군가 망치로 마구 때리는 것처럼 흙먼지가 비산한다. 그러면서 구멍이 무수히 뚫려서, 채 몇 초 만에 지면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어? 어어?"

"엄마야!"

졸지에 물속에 붕 뜬 신세가 된 일행.

저마다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서 몸이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세요. 안 위험합니다."

"괘, 괜찮아요? 진짜?"

"진짜 괜찮습니다."

김현의 말 그대로.

일행은 잠깐 부산을 떨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바닥이 사라지긴 했는데 낙하하는 속도가 매우 느렸으니까.

대신 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시커먼지 두 손조차 안 보이게 된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손전등을 켰다.

"너무 어둡다."

"축이 무너졌으니까."

"그게 왜?"

"완숙 세계는 완전히 이계에 가까워. 바닷속인데 수압이 안 느껴지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아?"

축을 부술 때마다 침식 세계는 지구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심해의 환경이 지구의 바다를 닮게 된다.

칠흑 같은 어둠, 무한한 압력, 존재하지 않는 혼력 등등.

지금은 어둠만 내린 것 같지만 수압까지 몸을 짓누르면 곤란하지. 대비하긴 했지만,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30분 가까이 낙하한 다음에야 몸이 정지했다. 그리고 단단한 바닥 대신, 유독 차갑고 따가운 액체 같은 게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해성계의 심층천중수입니다. 안 들어가게 조심하세요. 압력이 보통 바닷물의 열 배 이상이에요."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여기가 심해니까 문제죠. 10기압이 아니라 기본이 1000기압 이상입니다. 이건 해성계 영향을 받고 있어도 마찬가지예요."

"으아......"

이세희가 가장 먼저 말뜻을 알아듣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들어가는 순간 어떻게 변할지 눈에 선연하게 보여서.

문제는 이 심층천중수가 지상의 땅처럼 굴곡을 이루며 흐른다는 점. 거기다가 해류의 영향으로 조금씩 변화하기까지 했으니. 이걸 조심해서 세계의 중심까지 나아가야 한다.

슬슬 손전등만으로는 주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백흔귀를 통해 구입한 태양의 돌을 꺼냈다. 희미한 빛이 정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반쯤은 수영을, 반쯤은 보행을 해가며 나아간다. 김현은 신중하게 일행을 인도했다. 중심점이 어느새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끔은 괴물들이 덤벼들었다.

심해 아귀, 왕관 오징어, 암흑 해파리, 미끼 뱀장어 등등.

산호 벽이 있을 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는 2성 등급 소형 괴물들이 떼로 덤볐다면 이제는 한두 마리가 공격해 오는 게 전부였다.

대신 그만큼 강력했다. 농익은 2성을 넘어 2.5성이라고 해야 할까. 발밑이 불안한 까닭에 움직이기 힘들어서 더 그렇기도 했고.

"죽어!"

김현이 백호검을 내리쳐 귀신 상어를 끝장냈다.

유형과 무형의 육체를 섞어 가진 괴물. 귀신 상어가 푸른 피를 토하며 서서히 무로 돌아간다. 떨어지는 성혼을 회수하며 전면을 확인했다.

거대한 광점이 저 앞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거리는 기껏해야 수십 미터. 이제 고지가 눈앞이다.

"잠시 쉬죠."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현이 말을 하자마자 적당히 드러눕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중에서 둥둥 떠다니는 모양새라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여기 지킴이는 어떤 놈이야?"

"글쎄......"

원 역사에서는 거대 산호가 출현했다. 이 작은 세계를 다 뒤덮을 정도의 크기라 당시 도전했던 알렉산더도 고생했었지.

과연 지금은 어떤 괴물이 나올까.

김현은 일행 전원에게 작은 약을 돌렸다.

극혼약.

일종의 각성제로, 복용 후 3시간 동안 인체를 최상의 상태로 고정하는 물건이었다.

"지금 바로 드세요. 5분 뒤에 출발합니다."

"더 쉬면 안 돼요? 예전에는 몇 시간씩 쉬고 그랬잖아요."

"여기선 힘듭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요."

김현은 세계에 가득 찬 혼력을 느끼며 대답했다.

혼력.

이것 때문에 침식 세계에 진입한 각성자는 자극을 받아 성혼을 진화시키기도 쉬워지고 능력치 성장도 빨라진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곳은 어쨌든 이계. 세계에 가득 찬 혼력 또한 이질적이다. 체류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을 소모했다.

모두 주섬주섬 일어났다. 약을 먹은 탓에 다들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불콰했다.

"가죠."

얼마간 전진한다.

기이이잉......

귀가 따끔거렸다.

혼력의 농도가 급상승하면서 인체에 부담을 주는 것. 휘젓는 손이 벌써부터 무거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언뜻, 비릿한 냄새가 코로 스며든 것 같았다.

김현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해성계에서 이런 냄새를 풍기는 괴물이 뭐가 있지?'

거의 없다. 특히 성혼 출현 초반, 고작 3성 등급 괴물들이나 나오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김현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저 수면 위에서 빛나는 광점은 물론, 스치듯 지나가는 어둠 너머와 심층천중수 아래에서 일렁이는 불길한 반딧불까지 모두 확인했다.

응? 반딧불?

해성계에 무슨 반딧불이 있어?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떠돌이.

거대 물뱀처럼 기존에 작은 차원계를 유영하며 돌아다니던 괴물이 지킴이의 자리를 꿰찼다면 가능하지.

잠깐만.

어째 꺼림칙한 느낌이 김현의 육감을 간지럽혔다. 뭔가 아주 중대한 것을 놓친 것 같았다.

그렇지.

떠돌이, 떠돌이라고?

첫 번째 범람 때 인류는 큰 피해를 보았지. 전혀 대비하지 못했으니까.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준 게 세 번째 범람. 이때는 일곱 괴수가 튀어나와 세계 각지를 망가뜨렸으니.

그중 하나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주로 하고, 해성계와 시원계에 주로 침입하며 태평양의 해안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괴수가.

"설마!"

저절로 화들짝 놀라게 된다. 지금 일행의 전력으로는, 준비해 온 상태로는 절대 그 괴수를 당할 수 없으니까.

의아한 눈빛이 쏟아진다.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 이변이 벌어졌다.

기이이잉.

이명이 강해졌다.

어스름한 광원 너머에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칠채홍광.

무지개 같은 그것.

그러나 이상하다. 빛은 빛인데 밝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인간의 인식을 교란하며 어릿한 공포를 스멀스멀 일깨우고 있었다.

"저, 저거 뭡니까?"

피터가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그걸 배경 삼아 어떤 존재가 머리를 내밀었다.

역사서에는 해운의 종말이자 폭식의 괴수, 바다의 공포라고 기록된 존재.

4성 등급 괴물.

혼광 악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