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혼광 악어 -2- [2권 끝]
정말로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 없다.
방어도 회피도 불가. 이곳에서 고를 선택지는 딱 하나. 저걸 뒤집어쓰고 영겁에 가깝게 고문당한 끝에 존재 자체가 변형되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혼돈괴.
김현에게 참살당했던, 그러나 조만간 부활하여 고통받아야 할 그들이 김현의 미래 모습이었다.
빛을 보며 결정했다.
'계획을 바꾼다.'
본래 김현의 계획은 이랬다.
초기에는 환수 성향과 요정 성향의 성혼을 모은다. 그것을 기반으로 몸을 개조하고 장비를 만든다. 나중에는 자신이 가장 능통한 기갑 성향과 충왕 성향으로 완전히 교체한다.
그러나 계획은 상황에 따라 바꾸어야 하는 법.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여기서 죽어 자빠져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천천히 두 팔을 벌리는 김현.
완벽한 무방비 상태.
이윽고 찬란한 죽음이 서서히 강림했다. 아니, 시야 저편에 펼쳐지는 순간 이미 김현을,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어떤 고통이 밀려오는지......
인체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다음에야 영혼을 불사르는 통증이 대뇌를 관통했다.
살점을 하나하나 발라내면 이럴까?
전신에 대못을 수천 개도 넘게 박아버린 것 같다.
어쩌면 용암에 빠졌을 수도, 빙하 속에 갇혀 숨조차 멎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육신을 쥐어짠다.
영혼을 짓누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관념조차 떠올리는 순간 그대로 미쳐버릴 아픔이 척추를 관통하며 김현을 옥죄었다.
범인이라면 당장에 정신이 나갔을 터.
그러나 웃었다.
얼굴이 녹아내리고, 성대가 얼어붙으면서도 어릿한 웃음을 이 혼돈의 빛으로 흘려보냈다.
까맣게 경고하던 예지마저 픽 꺼져버린다.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선고한 것.
사실은 아니다.
김현은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방책을 한 가지 알고 있었다.
원 역사대로라면 5년은 더 지나고 나서야 러시아의 한 각성자에 의해 개발되는 비기.
마음을 활짝 열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 아니, 혼돈을 품는다. 체화하며 영혼에 새긴다. 혼력을 운용하는 것처럼, 혼돈의 빛을 피부 호흡하듯이 빨아들인다.
연약한 육체가 망가진다. 손끝에서부터 닳아 없어진다. 그냥 손상되는 수준이 아니고, 거의 원자 단위로 분해되고 있었다.
그렇게 빚어내는 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인공 인간. 혹은 에너지체 인간.
혼돈인.
혼돈괴와는 한 끗 차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그 즉시 혼돈괴가 된다. 요컨대 이성을 유지하냐 마느냐, 또 육체를 인간과 흡사하게 유지하냐 마느냐의 차이.
어려웠다.
지난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혼돈인은 5성 등급 이상의 혼돈 성향 각성자나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턱없이 부족한 혼력과 성혼 등급.
그걸 만회할 것은 밥 먹듯이 혼돈계 괴물을 상대했던 전생의 경험과 혼력을 다루는 특출난 기술뿐.
빚는다.
응축하고 또 응축한다. 육체가 붕괴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돈의 빛으로 아주 작은 그림을 그렸다. 좁쌀은커녕 분자보다 작은, 오직 자신의 심상으로 보았을 때만 살짝 보이는 인간을.
팔도 다리도 사라졌다. 의수도 마찬가지다. 허리 아래도 소멸한 것 같다. 남은 것은 생존에 필수인 내장이 모여 있는 복부와 흉부, 그리고 머리뿐.
고통스러웠으나 그 고통마저 받아들였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괴물 같던 얼굴에 분홍빛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안정되고 있었다.
김현의 입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심상 세계 속 작은 인간이 김현을 올려다보며 함께 미소짓고 있었다.
댕......
종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리고 벼락 치듯 빅뱅이 일어난다.
김현의 내부 세계, 무의식에서도 가장 깊은 곳, 어쩌면 영혼의 영역에 걸쳐 있을 그곳이 새하얗게 변하며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아울러 김현의 정체성을 이루던 글자들에 균열이 갔다.
[성혼] ㅂㅕㄹㅇㅡㅣㄱㅗㅏㄴㅊㅏㄹ
[성혼] ㄱㅣㄹㅣㄴㅇㅡㅣㅅㅐㅇㅁㅕㅇ
이런 식으로.
더구나 [성향] 란이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다. 방금 전까지 수놓아져 있던 환수도, 요정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워졌던 글자들이 저마다 이합집산하더니 전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낸다.
[혼돈]
이제 김현은 더 이상 환수 및 요정 성향 각성자가 아니다.
혼돈 성향 각성자다.
그에 따라 기존의 성혼들도 급격히 변모했다.
[아득한 시선(혼돈, 3★)]
[혼돈의 주사위(혼돈, 3★)]
[혼원(혼돈, 3★)]
혼돈의 힘은 실로 거대하고 장엄했다. 고작 1성에 불과하던 예지 성혼을 3성 등급으로 진화시켰으니.
그리고 혼원.
기린의 생명과 백호의 힘이 합쳐지고 혼돈의 빛에 감화되어 탄생한 성혼.
혼돈계 성혼으로는 최상급이다. 가장 근원되는 힘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힘이니.
다만......
'앞으로 힘들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혼돈계는 아득한 이계, 온갖 기이하고 괴상한 존재들이 활개 치는 세계다. 생명체에게는 가장 위협적이고 두려운 세계이기도 했다. 어떤 혼돈 성향 각성자들이든 까닥 잘못하면 혼돈에 먹혀 괴물이 되곤 했으니.
앞으로 머리가 조금 아프겠다. 환상과 환청을 겪을 테고 인간의 육체를 조금은, 아니 어쩌면 많이 벗어나야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낫다.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안광이 뿌려진다. 기이하게도 그 안광이 저 앞 세계의 끝에서 뿌려지는 혼돈의 빛을 똑 닮아 있었다.
두 손을 쥔다.
혼돈의 힘이 재구성된다. 육체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전과 다를 바가 없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형태로.
"으음......"
나직이 신음을 흘리는 김현.
머리나 몸통은 그럭저럭 재생되었다. 문제는 팔과 다리.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만드는 까닭에 인간의 것이 아닌 기괴한 괴물의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럼 안 되지.
생각 끝에 빛 속으로 녹아 사라진 의수의 정보를 불러온다. 그것을 똑같이 적용했다. 의수 한 쌍이 혼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오호갑의 정보를 덮어씌웠다.
충격의 손과 오호갑이 뒤섞인다. 혼돈의 빛 아래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무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부터 시작하는 유려한 형태의 의수.
다소 두툼한, 하반신을 완벽히 대체하는 의족.
그리고 이 둘을 이어줄 하나의 흉갑.
[혼원의수(3★)]
[혼원의족(3★)]
[혼원흉갑(3★)]
오호갑의 특징이던 근육 섬유는 사라졌다. 대신 혼돈의 힘이 갑옷 내부를, 의수와 의족 내부를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기존 오호갑보다 배는 강력한 증폭 효과를 뽐내겠지.
다만 백호검만큼은 재생할 수 없었다. 혼돈의 세계에 녹아 사라진 백호검이 새 보물을 만드는 자원으로 쓰였으니까.
의수로 얼굴을 쓸어본다.
감각신경은 없는 탓에 차가운 감촉만 얼굴에 느껴졌다.
'과연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인간을 벗어나는 것, 22세기의 아론으로서는 별로 두렵지 않은 일이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유전자 조작이 이뤄졌고, 조금 자라서는 곤충형 강화 인간, 나중에는 장갑 기사까지 되었으니.
반면 김현이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21세기의 인간들은 인간을 벗어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좋다.
살았다.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쿠콰콰콰!
두 팔, 두 다리로 충격파를 내뿜었다. 겹겹이 중첩되면서 김현의 몸을 쭈우욱 밀어냈다.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눈.
더한 혼돈의 빛이 쏟아지지만 뭐 어쩔 수 있나. 김현이나 저 눈이나 동류의 족속인 것을.
오른 주먹을 뒤로 당긴다. 전력을 일점으로 응축했다. 눈이 화악 다가오는 순간, 그걸 하나로 모아 단번에 내쳤다.
우르르릉.
천둥이 쳤다.
일순, 모든 법칙이 정지했다.
세계가 멈췄다.
눈의 표면에 금이 간다. 붉디붉은, 어찌 보면 창백한 균열이 사방으로 느리게 질주한다. 아니, 이미 전체를 휘어 감는다. 심지어 눈을 넘어 세계 전체에 뻗어 나갔다.
부서지는 세계, 깨어지는 세상.
빛과 색이 모호하게 흐려진다. 오직 어둑한 어둠 속, 광점 몇 개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익숙한 광경.
심해, 조금 전까지 일행과 함께 헤매던 그곳이었다.
"어?"
누군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세희가 쓰러진 김애경과 에일리를 치료하고 있었다.
[상태] 부상
둘 다 이 상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빈사 상태도 아니고, 죽지도 않았으니 조금만 정양해도 털고 일어날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여유롭게 한 번 둘러본다. 다들 건강했다. 눈을 똘망똘망 뜨고 김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괴, 괴물이다!"
피터가 기겁하여 소리친다. 급기야 광선을 쏘아 보내려고 하나 혼력이 바닥나 빛만 깜빡이자 절망한 얼굴을 했다.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이거 많이 변형되었구나 싶어서......
"아니, 잠깐만요. 이상해요."
이세희가 김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묻는다.
"설마, 김현 님?"
"예? 저 괴물이요?"
말도 안 된다는 듯 반응하는 피터.
아직 오해를 풀 겨를이 없었다. 등 뒤에서 나직한 울음이 들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기 때문.
혼광 악어.
두 눈이 뻥 뚫렸다. 초록빛 악취 나는 체액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런데도 그 기세만큼은 여전했다. 음울한 위압감으로 김현을 짓눌렀다.
가소로울 뿐이다.
당장 혼광 악어의 몸만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가지각색으로 물들어 있던 가시가 거무튀튀하게 변하지 않았나. 내부의 혼돈을 잃어버린 혼돈계 괴물은 그냥 괴물에 불과하다. 단지 덩치 큰 괴물 따위, 지구 군대만 와도 쉽게 잡을 터.
"죽어라!"
돌진하여 주먹을 꽂았다. 뻥 뚫린 눈에다가 충격파를 쏘자 혼광 악어가 흉험한 괴성을 지른다.
반격하며 몸을 뒤집는 혼광 악어.
여전히 강력하긴 하다. 지느러미에서 일어나는 와류가 거세게 김현을 때렸다. 그러나 지금 김현에겐 혼원의수와 혼원의족이 있다. 혼돈의 주사위를 굴려, 천변만화하는 미래를 예지하여 정확한 순간에 충격파를 날리면 어떤 와류라도 헤쳐나갈 수가 있다.
"으아아아!"
피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젖먹던 힘까지 짜낸 공격. 노란 광선이 줄을 지어 솟구쳤다. 비록 급소는 못 맞췄어도 조금씩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김현 님! 이거 받아요!"
그리고 날아드는 황금색 빛줄기. 축복, 치유, 보호가 차례대로 김현에게 내려앉았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광 악어는 열원을 상실한, 하얗게 변한 연탄과 같았다. 조금 괴롭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침몰하게 된다.
과연 그러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5분? 10분?
겨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시는 예리함을 잃었고 지느러미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나중에는 입조차 제대로 벌리지를 못한다.
충격파를 쏘아 위로 상승했다. 혼광 악어의 머리 위에 올라타자 죽음을 직감했는지 음울한 파장을 터뜨린다.
기이잉......
머리가 울렸다.
마지막 발악이 겨우 이따위 정신 공격이라니.
짧게 비웃는다.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다. 꽉 쥐고 그대로 내리쳤다.
꾸앙!
내리친 건 주먹인데, 무슨 범종 울리는 소리가 난다.
혼광 악어의 머리가 크게 들썩였다.
당연하지. 주먹에서 터진 충격파가 두개골을 통과하여 뇌를 정확히 흔들었을 테니까.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다.
거듭 내리쳤다.
열 번, 스무 번, 심지어 백 번을 넘어 이백 번 가까이.
이토록 두들겨 대는데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견딜 수 있을까. 전신에서 힘이 빠져서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한다.
저 아래, 심층천중수를 향해.
"성혼 수거하세요, 얼른!"
혼광 악어가 떨어뜨린 성혼은 네 개. 그것도 모두 4성 등급이었다. 원 역사에서 4성 등급 각성자가 언제 출현했는지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잃은 것도 있었다.
마침 깨어난 김애경이 김현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너...... 현이 맞아?"
도대체 왜 그래?
그렇게 묻고 싶었다.
곧,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무너지는 세계. 유리창처럼 깨지는 공간.
그 사이로, 시야가 굴절되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살짝 비친 김현......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