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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52화 (52/200)

# 52

범람 –1-

스스로를 확인한다.

괴물 같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머리를 만져보니 짧은 터럭이 나 거칠거칠했다. 이질적인 부분은 가슴에 박힌 수레바퀴와 의수, 의족이 전부.

아니......

어쩔 수 없이 변한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두 눈.

여전히 혼돈의 불꽃이 타올랐다. 혼력을 집중한다면 안광을 쏘아 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김현은 두 눈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선글라스 하나 만들어야겠다.'

안광이 노출되면 좋을 게 없으니.

<능력>

[이름] 김현 [성별] 남성 [나이] 2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18 [체력] 20 [민첩] 19 [감각] 20

[혼력] 28 [의지] 25 [통찰] 24 [위엄] 25

[성향] 혼돈

[성혼] 혼원(혼돈, 4★), 아득한 시선(혼돈, 3★), 혼돈의 주사위(혼돈, 3★)

[보물] 혼원의수(3★), 혼원의족(3★), 혼원흉갑(3★)

많이도 성장했다.

이 정도면 원 역사의 어설픈 5성 각성자와 비견할 정도. 꾸준히 수련하여 모든 성혼을 4성으로 맞추고 장비도 강화하면 말 그대로 국가보다 강한 개인이 탄생한다.

초인의 경지가 눈앞에 있었다.

휘우웅......

구석에 던져둔 백흔귀의 향에 저절로 불이 붙었다. 이내 허공에 불의 구멍이 뚫리며 해골바가지 하나가 튀어나온다.

[놀랍군, 선지자여.]

"내가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

[솔직히 믿지 못했네. 시간, 공간, 차원의 선지자란 이리도 대단한 것이었군...... 선지자의 기술에서 심원한 체계와 위대한 사유가 엿보이던데, 어느 유망한 종족이 만든 것인가?]

잠깐 웃었다.

당연히 이계의 종족이 만들었을 거라고 보는 게 괘씸해서. 혹은 불세출의 천재, 차오 박사의 얼굴이 생각나서.

"지구에서 50년 뒤에 개발되는 기술이다."

[뭐라고? 지구에서?]

"그래. 너희 유령들은 우릴 육체 가진 고깃덩이이자 성혼의 원천 정도로 보겠지만 우리 지구인은 너희 생각처럼 하등한 종족이 아니야. 우주의 성혼이 어째서 이 지구에 맺혔겠어? 우리의 잠재력은 무한하고 강력하다. 기억해 둬."

나름 승부수.

김현의 말처럼, 또 전생에서 겪은 것처럼 외계종들은 인간을 고깃덩이, 혹은 유용한 자원 정도로 생각한다. 동맹을 맺거나 협력할 대등한 상대로는 보지 않는다.

백흔귀도 김현이 선지자라고 해서 이리 협력적인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대충 이용해먹고 버렸을 터.

[과연 선지자인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선지자가 지금까지 만든 무구들, 그것들은 그대 종족의 미래 기술을 응용한 건가?]

"맞아."

[본래는 미래에 개발될 기술을 당겨 개발한 셈이 되었군. 선지자여, 그 의미를 알고 있나?]

타임 패러독스에 대해 말하는 걸까.

아쉽게도 모른다. 22세기에서도 시간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고, 지구에 도래한 열여덟 세계도 마찬가지였으니.

잠깐 고민이 되었다. 허세를 떨어서 우월한 척을 할지, 아니면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나을지 싶어서.

"아니, 모른다."

김현의 선택.

[역시 그런가......]

"그래. 난 그저 주어진 책무에 충실할 뿐이야."

[책무?]

"그래. 별이 내게 부여한 책무. 그 외의 건 관심 없어."

진심을 담아 토로한 말.

그래서였을까. 갑자기 공기가 달아오른다.

공기?

아니었다. 김현의 체온이 수직 상승했다. 그러면서 혼력이 한 번 거세게 요동치고, 김현의 전신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리다가 스스로 가라앉았다.

[호오......]

감탄하는 백흔귀.

[그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었군. 별의 챔피언이라...... 이 나도 듣기만 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일세.]

별의 챔피언?

처음 듣는 단어.

'혹시?'

짐작가는 게 있었다.

2218년, 다나카의 배신으로 세 세계가 동시에 저항군을 쳐들어 왔을 때.

최후의 발악으로 시공의 문을 폭주시켰다. 그저 자폭 공격에 불과했으나,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정말로 시공 회귀가 일어났지.

그게 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면?

성혼을 품은 별은 필연적으로 영성을 얻는다. 그 거대한 힘이 휘몰아친다면 시공 회귀도 가능할 터였다. 2118년에서는 인류가 이미 가축화된 까닭에 완벽하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가슴속에서 격랑이 휘몰아친다.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나도 어렴풋하게 생각은 했지만 공인받는 건 처음이야."

[부럽군. 난 고작 귀급에서 아등바등하는 신세인데.]

"훗. 그것도 얼마 안 남았잖아? 백흔귀. 그대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앞으로 잘해보자고. 나는 지구를 지키고, 그대는 천주가 되는 거야. 일단 천주가 되면 공(公)은 식은 죽 먹기니까, 어쩌면 수백 년 후에는 왕도 될 수 있겠지."

[허허, 왕이라!]

백흔귀의 눈두덩에 웃음 짓듯 옅은 빛이 어렸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세. 이 고달픈 귀급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거늘 왕이라! 그래, 별의 챔피언과 함께하면 충분히 가능하겠네. 챔피언, 앞으로 잘 부탁하네.]

김현은 보았다.

처녀의 웃음처럼 일렁이는 옅은 빛 아래에서 스치듯 지나는 차가운 불꽃을.

백흔귀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흉중에 칼을 품고 있었다. 저자세로 나온다고 방심하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야말로. 그리고 그냥 선지자라고 불러. 괜히 새어나가면 우리 둘 다 곤란해."

[으흠, 하긴 챔피언을 반가워하는 세계는 별로 없지. 그러세나. 선지자여, 그대와 거래하게 된 건 내 만생의 축복일세.]

"나도. 제일 먼저 찾아온 게 그쪽이라 다행이야. 솔직히 믿을 놈이 없거든."

[잘 아는군. 참, 내가 선지자에게 성공하면 선물을 준다고 했었지? 원하는 거 있나?]

기다렸던 말이 나온다. 김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매만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둘 다 값어치가 만만치 않은 물건이라 선물로 선뜻 주겠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질러보자.

"흑룡정이 필요해. 주먹 크기로."

[흑룡정이라...... 좋네. 구해주지. 그 정도는 가능해.]

"하나가 더 필요한데."

[음? 하나 더?]

"천리안. 성혼이 아니라 요정계의 것으로, 세계수 꼭대기에 사는 천리조의 눈알 말이야."

[허, 선지자여. 그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아니까 필요하다는 거지. 힘들어?"

[음......]

흑룡정은 그나마 용왕계의 깊은 동굴에서 많이 나온다. 반면 천리안은 꽤 희귀했다.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많아 값은 많이 나가지 않지만, 물량 자체가 없기 때문.

그런데도 김현은 이걸 요구했다. 2차 대침식을 대비하는데 가장 용이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또, 원 역사에서 백흔귀의 후원을 받았던 박준이 얻은 물건이기도 했고.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 백흔귀는 천리안을 얻을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백흔귀가 한참이나 고민에 잠겼다. 기다려주었다. 자신이 별의 챔피언임을 확신한 순간부터, 백흔귀가 내릴 결론은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필요한가?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라면?]

"고르라면 고르겠지만...... 백흔귀, 내가 해낸 일이 그 두 물건을 합한 가치만큼도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 두 물건을 다 합친 것의 100배 이상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정도 선물도 못한다고? 음......"

거만하게 팔짱을 끼자 백흔귀가 부르르 떨었다.

지금 둘은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 동업자이자 협력자. 상대에게 능력을 의심 받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도 없다.

김현이 백흔귀에게 내준 시험이라고 해야겠지.

백흔귀 또한 직감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후후,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자로군. 그래, 그 정도는 해야 자격이 있지. 좋아. 요구한 두 가지를 모두 선물로 주겠네.]

"고마워. 잘 쓸게."

[그리고 한 가지 정보를 주지. 선지자여, 떠돌이들 사이에서 지구의 정보가 퍼지고 있다.]

"뭐? 벌써?"

[최근에 혼광 악어 한 마리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이들 사이에서 퍼진 모양이다. 아직 차원의 벽이 굳건하지만, 충분히 얇아진다면 적어도 10마리 이상은 유입될 것이다.]

"쯧......"

난감한 일이다.

지구는 아직 4성 등급 괴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재래식 무기로는 마법적 방어를 뚫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각성자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4성 등급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김현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나마 지원을 받았을 때 가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떠돌이들이 유입되는 건 8월 15일에 있을 3번째 대범람 때였다.

그때 10마리를 잡으면 4성 등급 성혼 30개 정도는 얻을 것이다. 이걸로 훈련 시설을 짓고 각성자들을 육성하면 수개월 내에 4성 등급 각성자 열 명 이상을 찍어낼 수 있다.

"정보 고마워. 이 신세는 풍족한 성혼 거래로 갚지."

[후후, 기대한다. 다음에 거래할 때 보지. 선물은 지금 놓고 가겠다.]

백흔귀가 허공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거기서 까만 수정 하나와 접시처럼 납작하고 커다란 유리판 같은 게 떨어졌다.

김현이 요구한 흑룡정과 천리안.

먼저 흑룡정부터 손을 보았다. 아까 99륜을 만들면서 남은 용각액을 흑룡정에 묻히고 주물렀다. 주먹 크기이던 것을 최대한 널찍하게 폈다. 길고 네모나게 형태를 잡은 다음 뒤쪽으로 지지대를 만든다.

선글라스.

형체가 투박하지만 나름 멋은 있었다.

여기에 기체인 용루흔을 뿌려 마무리. 눈에 쓰자 딱 맞았다. 다만 혼돈의 불꽃을 완벽히 가리진 못해서, 까만 수정 밖으로 아주 희미하게 불꽃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디야.'

적당히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나 저제나 서성이던 김애경이 김현을 보고 반색했다.

"현아! 괜찮아 진 거야?"

"보면 알잖아."

"세상에......"

김애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김현의 얼굴을 만져보고, 동자승처럼 까까머리가 된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만 만져."

"너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안 죽는다고 했잖아."

"회복되셔서 다행이에요."

이세희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자 그걸 보고 또 운다. 왜 그러나 했더니 의수와 의족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다, 다행입니다. 마스터!"

"마스터는 무슨."

피터가 상기된 얼굴로 말하자 가볍게 어깨를 건드려 주었다. 에일리가 다가오더니 김현을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에요."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가벼운 입맞춤.

원판 김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스킨십이지만 아론은 다르다. 중남미 태생이었으니까. 김현도 웃으며 답례를 했다.

꾸욱.

김애경이 옆구리를 찔렀다. 짓궂은 웃음이 눈가에 매달려 있었다.

분홍빛 기류라도 상상하는 걸까?

김현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정신적으로는 연애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고, 이번에 하반신이 사라지면서 육체적으로도 연애할 이유가 사라졌다. 언젠가는 복구하겠지만 지금은 여자에 관한 관심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완벽히 회복하셨다고요?]

대통령의 목소리가 기꺼웠다.

"예. 그리고 조금 더 강해졌습니다."

4성 등급 성혼 혼원, 여기에 새롭게 얻은 의수와 의족, 흉갑까지. 보수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3배 이상은 강해졌다고 봐야 했다.

[허허, 역시 대단하십니다.]

"운이 좋았죠. 6월 6일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세 군데 정도 더 복구할 생각입니다. 빠듯하겠네요."

오늘은 5월 30일.

하루 공략하고 하루 쉬고 하면 세 군데까진 복구할 수 있다. 그만큼 힘들긴 하겠으나 얻는 것도 많을 터.

대통령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미국의 영웅다우십니다. 다른 분들도 Mr. 김처럼 헌신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 글쎄.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이 만들어졌는데 당분간은 손발 맞추느라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지 뭡니까? Mr. 김 팀은 벌써 샌프란시스코를 복구하고 나왔는데?]

대통령이 흥분해서는 떠들었다.

저스티스 팀은 알렉산더 브라운의, 가디언 팀은 닉 스미스의 팀이었다.

김현은 내막을 짐작했다.

후원자들.

그들이 개입한 게 분명했다. 설익은 3성 등급 각성자들이 완숙 세계에 들어갔다간 전멸하고 말 테니.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저희 팀 말고 다른 팀이 침식 세계에 들어가면 100% 전멸이에요."

[그, 그렇습니까?]

"네. 그건 그렇고 6월 6일 얘기를 하지요. 제 예지가 조금 빗나갈 것 같습니다만,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2차 대침식에서 침식되는 곳은 총 120곳. 1차 대침식보다 20곳이 더 늘어난다. 그리고 미국에서만 11곳이 침식된다.

[11곳이라고요?]

"예."

원 역사에서 침식된 곳을 모두 불러주었다.

[침식을 방지할 방법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도 예측할 수는 있지요."

다름 아닌 천리안의 존재 때문에.

천리안은 성혼의 밀도를 직접 보게 해준다. 높은 곳에 올라 지상을 살피면 어디서 세계 침식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는 뜻.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원 역사를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 둘을 참고하여 살피면 오차가 최소한으로 줄어들겠지.

"가격만 맞으면 천리안을 대여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있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과연 Mr. 김은 미국의 영웅입니다!]

대통령이 뛸 듯이 기뻐했다.

천리안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무인 운용은 불가능. 각성자가 반드시 따라붙어야 한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쓸수록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호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Mr. 김. 우주여행 갈 생각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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