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범람 –2-
"아뇨, 없습니다."
단호한 거절.
[음......]
의외였는지 낮은 신음이 스마트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입맛을 다시는 김현.
우주여행이라니.
아이디어 자체는 좋다. 지금 천리안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건 바로 김현이니까.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2차 대침식이 코앞이다. 한 군데라도 더 침식된 곳을 복구해야 한다는 뜻. 이 시기에 김현이 자리를 비우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겠는데 제가 직접 하기는 어려워요."
[그렇습니까...... 아깝습니다. 실은 사흘 뒤에 NASA에서 유인 우주선 발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Mr. 김을 태워 올려 보내려고 했지요.]
"우주여행이라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건데요? 배울 것도 많고, 훈련할 것도 많고요."
[그건 그렇지요.]
기갑계의 우주선을 운용하는 거라면 그냥 쓰면 된다. 그러나 지구의 우주선은 다르다. 김현의 기억에서 보면 알아야 할 게 엄청나게 많은데 며칠 사이에 익히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우주 비행사들을 각성시켜서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엇, 우주 비행사들을요?]
"예. 각성하기만 하면 천리안은 쓰기 쉬우니까요."
원래 김현은 천리안을 비행기 조종사에게 쓰자고 하려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제안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이곳은 미국이고 대한민국과는 차원이 다른 국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뭐하러 비행기에 달아서 이리저리 왕복을 해? 그냥 우주로 쏴 버리면 그만이지. 천리안의 사정거리는 이름보다 더 뛰어나서 1천 킬로미터 정도 된다. 중궤도까지는 못 올라가도 저궤도를 돌면서 지구 표면을 확인하면 된다는 뜻.
[아! 그 방법이 있겠습니다! 하하, 저는 그것도 모르고 다른 각성자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지금은 대침식에 대처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비행사들에게도 다른 임무가 있겠지만, 우주에 있는 동안은 성혼 분포 감시에 가장 신경을 써달라고 하세요. 혹시 교대하게 되면 교대할 분들을 저한테 잠깐 보내주시고요."
[감사합니다, Mr. 김. Mr. 김이야말로 우리 미국의 보배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성혼 분포와 대침식에 대한 정보는 조건 없이 모든 인류와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크흠.]
김현으로서는 당연한 사항. 동반자로 미국을 선택했다고는 하나, 미국이 자신의 예언을 독점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제가 미국에 귀화하는 것으로 모자랍니까? 열흘도 안 되어서 두 군데가 복구했는데요."
[그래도 말입니다......]
"약속은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크흠!]
애초에 김현이 귀화하면서 건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정보는 모든 나라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 대신 김현의 활동은 미국의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겠노라고 했었지.
대통령이 얼마간 말이 없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휴, 알겠습니다. 약속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이번 유인 우주선 발사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다는 것만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알지요. 그래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성혼 분포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는 것, 제 예지 정보를 대신 발표하는 것의 의의는 대통령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크흠! 그렇지요.]
물론 그런 것 없이도 미국은 초강대국이지만, 그 위상을 한 차원 높게 가져갈 수가 있었다. 그것도 깡패 국가니, 악당 국가니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인류의 수호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실 김현이 옮겨 오기 전의 대한민국이 그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 김현이 남아 있었다면 동북아의 주도적인 위치 정도는 쉽게 차지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지나간 이야기다.
"내일 바로 휴스턴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우주 비행사들을 각성시킬 테니 대기시켜 주세요. 그 다음 올랜도로 이동해서 디즈니 월드를 복구하고, 시카고를 들렀다가 예일대학교로 향하겠습니다."
[시애틀이 아니고요?]
"네. 휴스턴이 더 시급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 시간이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휴스턴까지만 6시간이 걸린다. 휴스턴에서 시애틀까지 가는 시간도 비슷하다. 서부에서 중부로, 중부에서 서부로 돌아가는 셈이니 이만한 시간 낭비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시애틀로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주 비행사들도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태워 시애틀로 보내겠습니다.]
"시애틀이라...... 그래도 4군데를 복구하기는 힘듭니다."
[디즈니 월드를 빼지요. 거긴 저희가 대처할 수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윌리스 타워나 예일대학교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김현이 이번에 복구하기로 한 곳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도심에 위치해 있다는 것.
피셔맨스 와프는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코앞이었다. 시애틀은 랜드마크인 스페이스 니들이 침식되었고 윌리스 타워는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였다. 예일대학교? 미국인들의 감각으로는 뉴욕에서 지척이다. 고작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으니까.
반면 디즈니 월드는 거대한 놀이공원이다. 올랜도 교외에 위치했고, 저지선만 잘 짜면 얼마든지 방어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좋습니다. 시애틀로 우주 비행사들을 보내주세요."
[고맙습니다. Mr. 김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공치사는 나중에 하시고, 대침식이 지나간 후에 뵙겠습니다."
[허허, 그럽시다.]
다음날 시애틀에서 우주 비행사들을 만났다.
장황하게 소개를 받았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 기억해서 뭐하게?
"저희를 초능력자로 만들어 주신다고요?"
"네."
필요한 성혼은 미국에서 대주었다. 급한 대로 성혼이 깃든 잡동사니 수십 개를 가져다준 것.
다행히 그 중 우주 비행사들에게 맞는 성혼이 있었다. 셋을 각성시키고 나머지는 김현이 챙겼다. 귀중한 지식을 나눠주는데, 이 정도 푼돈은 챙겨야지.
"자, 여기에 손을 얹어보세요."
김현이 내민 건 유리 접시.
우주 비행사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유리 접시에 손을 댔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뗀다.
"왜 그래, 존?"
"어,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김현이 묻자 우주 비행사가 입을 우물거렸다. 이세희가 이쪽을 힐끔거리다가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가왔다.
"어머나!"
역시나 손을 댔다가 바로 떼는 이세희. 이쯤 되자 김애경도 유리 접시를 본다.
"대체 뭔데 그래?"
"모르겠으면 한 번 만져 봐. 백문이불여일견이잖아."
김애경은 물론 피터와 에일리도 한 번씩 손을 댔다.
다들 얼굴이 야릇해진다.
하기야 지상에서는 천리안의 효능을 제대로 보기가 힘드니까. 그저 세상이 다 파랗게 보이겠지.
"자,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지금 김현 일행이 있는 곳은 시애틀에서도 상당히 고층에 자리 잡은 고급 호텔. 자연히 시애틀의 정경이 다 내려다보였다.
"유리 접시에 혼력을 주입하면서 밖을 보세요. 그냥 보기만 해서는 잘 안 보입니다. 전체를 다 조감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훑어보셔야 하고요."
처음에는 다들 유리 접시에 손을 얹고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김애경이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현아, 이거......"
"뭐가 보여?"
"거의 다 파란색인데 보라색으로 보이는 곳이 있어. 그 중심은 옅은 빨간색이고."
"정확해. 노란색은 안 보여?"
"노란색은 없어."
그럴 테지. 성혼 수십 개가 공명하여 폭주한 결과가 침식된 스페이스 니들이니까.
김현은 우주 비행사들을 불렀다.
"다시 사용해 보세요. 여러분이 힘을 쓰셔야 다가오는 재앙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의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변했다. 너무 거창한 말이라 얼른 와 닿지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시애틀에 오면서 들은 게 있는 터라 김현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이번에는 성공.
우주 비행사들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보입니다!"
"아, 이런 거였네요!"
"이제 알겠어요!"
그냥 유리 접시, 즉 천리안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혼력의 미세 조종을 통해 조금은 제어를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코앞의 대기에 퍼진 성혼의 분포만 보게 되니까.
"우와! 이거 신기해요!"
피터가 뒤늦게 천리안에 손을 대고 탄성을 질렀다. 에일리도 슬쩍 다가와 시애틀의 정경을 구경했다. 천리안의 확대 축소 기능도 깨달았는지, 둘의 동공이 수축했다가 확대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이 파랑, 빨강, 노랑으로 보일 겁니다. 노랑이 위험 지역입니다. 특히 샛노래서, 거의 황금색으로 보이는 곳은 반드시 대피시켜야 하고요. 기억하셨죠?"
"네. 노랑이 위험, 황금이 대피."
"우주에서 보면 작게 보이니까 잘못하면 놓칠 수도 있어요. 위험 지역은 미리 알려 드릴 테니 거길 중점적으로 보시고, 세 분이 교차 감시하면서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천리안에 대한 수업은 여기서 종료.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게 천리안이다. 미군 부대가 우주 비행사들을 경호하여 휴스턴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김현 일행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후 침식된 스페이스 니들로 진입했다.
기이하게 생긴, 흡사 UFO를 얹은 바늘 형상을 한 탑.
외형이 그래서인지 침식된 세계도 기갑계였다. 이미 완숙 세계로 접어들었으나 펜타곤보다 오히려 쉬웠다. 이유는 하나. 전자 괴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시카고와 뉴욕을 차례로 들렀다. 뉴헤이븐의 예일대학교를 복구하고 돌아오자 뉴욕 시민들이 열광하며 일행을 반겼다.
"슈퍼 팀이다!"
"최고다, 슈퍼 팀!"
"여기 좀 봐줘요!"
"내 팬티 가져가!"
슈퍼 팀이라니.
김현은 살짝 웃음을 흘렸다.
사실 김현의 팀은 아직 정해진 이름이 없다. 일행이면 일행이지, 굳이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지 싶어서였다.
이세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슈퍼 팀이라니,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멋있는 것 같은데요."
"최고죠."
피터와 에일리가 차례로 이세희의 말을 받았다. 듣고 있던 김애경이 한숨을 폭 쉬었다.
"미국인들이란."
솔직히 미국인들이 다 슈퍼 팀이란 이름에 열광하는지 어쩐지는 모른다. 피터와 에일리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미국에 15곳의 침식지가 남은 시점에서 6월 6일이 왔다.
한국 시간으로는 저녁 8시, 미국 동부 시간으로는 오전 7시.
그 일이 벌어졌다.
정확히 120곳.
김현의 예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다만 그 장소는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롯데 월드가 침식될 거라고 했는데 롯데 월드 호텔이 침식되고, 미국에서 LA의 헐리우드가 침식될 거라고 했는데 비버리 힐즈가 침식되는 식.
그러나 결과적으로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빗나간 곳은 고작해야 십여 곳에 불과했고, 그나마 우주 비행사들이 보내온 자료를 참고하여 수정했다.
결과적으로 2차 대침식의 인명 피해는 제로. 단, 김현의 경고를 현실로 받아들인 국가에서만.
미국, 대한민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호주 등등......
그러나 반응하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사실. 설령 대처했더라도 피해가 분명 있었다는 점도 사실. 2차 대침식을 맞이하여 세계가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래도 좋았다.
원 역사와 비교하자면 그 피해가 이미 1/100 이하로 줄어들었으니까.
그만하면 됐지.
앞으로도 이렇게 피해를 줄여나간다면, 그리고 각성자 증가 속도를 더 늘린다면 성혼의 생산이 가속화되면서 김현의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김현은 지금, 올랜도 외곽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