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범람 –3-
투타타타타!
쾅! 쾅! 쾅!
총성과 포성이 메아리친다.
올랜도 외곽에 위치한 디즈니 월드. 그곳을 미군 1개 사단이 포위하고 있었다. 참호를 파놓고 거기 숨은 채 온갖 화력을 뿜어낸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은빛 돔.
아니, 거기서 뛰쳐 나오는 괴물들.
허리 께까지 오는 도마뱀이었다. 기이하게도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붉은 화염이 일렁였다가 사그라들었다.
[불도마뱀]
덩치가 크고 불길을 토한다는 게 특이할 뿐 사실은 별 볼 일 없다. 느려 빠진데다 힘도 맷집도 약하니까. 권총 한 자루만 있어도 처리할 정도.
그러니 미군이 기관총 세례를 퍼붓자 삽시간에 쓸려나갔다. 은빛 돔에서 뛰쳐나온 수백 마리 전부 다.
"이거 쉽겠는데요?"
"1성 괴물입니다. 진짜는 3성부터죠."
더 정확히 말하면 4성부터지만 굳이 지금 그걸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투투투투.
로터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헬기가 조금 더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살짝 선회하여 김현이 앉아 있는 왼쪽 측면을 은빛 돔을 향해 맞춘다. 옆에 앉은 미군이 20밀리미터 기관포를 은빛 돔에 조준했다.
은빛 돔이 한 차례 일렁였다. 이어서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났다.
도마뱀 인간, 얼음뱀, 대지 거북, 전기 악어.
하지만 뭐, 이것들도 기관총 앞에서는 금세 몸이 찢어졌다. 2성 괴물 정도 되면 소총탄은 견디지만 그 이상은 못 견디는 것. 펜타곤에서 유탄 세례에 쓸려나갔던 장갑병들을 생각하면 되겠다.
"후우웁."
김현은 심호흡을 하며 일어섰다.
"그냥 저희한테 맡기지 않고요?"
"저도 밥값은 해야죠. 그리고 괜히 도로 부수면 아깝잖습니까?"
디즈니 월드에서 나타나는 3성 괴물들은 김현이 처리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덤으로, 일시적 탈력 상태에 빠질 디즈니 월드를 복구하는 것까지.
백 미터 이상의 고공이라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바람이 옷깃이 나부끼며 흉갑과 의수, 의족이 드러난다. 그걸 느끼며 씩 웃었다.
디즈니 월드에서 나올 3성 괴물은 9마리. 1차 대침식에서 가장 많은 3성 괴물이 출현하는 곳이 이곳, 올랜도였다.
그래서 김현이 여기 온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3성 괴물 7마리가 나오는 곳으로 보냈고.
"쿠오오오!"
광량한 울음.
거대한 괴물이 기어나온다.
이구아나를 그대로 확대한 것 같은, 다만 눈이 네 개 달리고 꼬리 끝이 V자로 갈라진 형태의 괴물이었다.
[돌연변이 이구아나]
"인사 한 번 해볼까요?"
미군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
오렌지빛 예광탄이 줄을 지어 날아간다. 돌연변이 이구아나의 앞쪽 지면을 훑더니, 이내 그 거대한 몸을 직격했다.
"크아아앙!"
피가 튀었다.
그러나 얕았다. 돌연변이 이구아나는 몸을 뒤틀면서 신경질적인 비명을 질렀다.
기관포를 쏘던 미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랍쇼?"
대구경 기관포라면 모를까 20밀리미터로는 3성 괴물을 상대하기 힘들다.
돌연변이 이구아나가 이쪽을 주시했다.
네 개의 눈이 꾸물거린다. 왼쪽은 왼쪽끼리, 오른쪽은 오른쪽끼리 합쳐지더니 초록색 눈에 맑은 섬광이 맺혔다.
"회피! 회피!"
김현이 크게 소리치자 조종사가 반사적으로 조종간을 틀었다.
헬기가 옆으로 크게 기울어지고, 돌연변이 이구아나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팟!
노랏빛 광선.
그것이 조금 전만 해도 헬기가 체공하고 있던 곳을 스쳤다.
"으악! 이거 뭐야?"
"어떻게 여기까지 공격하는 거지?"
미군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그 와중에도 헬기가 안정을 되찾고 빠르게 전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김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낙하산 안 챙기셨습니다!"
낙하산?
그런 건 필요 없다.
스카이 다이빙 하듯이 몸을 펼쳤다. 팔을 뻗어 손바닥을 뒤로 향한다. 그리고 혼원의수와 혼원의족에서 충격파를 뿜어냈다.
단발성이 아니다. 연발성도 아니다. 그냥 길게 뿌렸다. 자연히 강력한 추진력이 김현을 밀어붙였다.
의수 하나만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비록 비행은 불가능해도 활강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낙하산을 챙기지 않고 뛰어내린 거였다.
쉬웅! 쉬웅!
그 와중에도 이구아나는 헬기를 노리고 광선을 날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제법 정교해지는 게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될 것 같다.
김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기관총을 들었다. 비록 거리가 멀긴 하지만, 단단히 견착한 후 이구아나에게 겨누었다. 이내 총성과 함께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크앙!"
물론, 7.62밀리미터 기관총으로는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가 없다. 이구아나가 성가시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이어 김현을 주시.
쭈앙, 하는 소리와 함께 광선이 날아온다.
"흥!"
슬쩍 몸을 틀었다.
그 가벼운 몸짓에 광선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다시 저격.
이번에는 왼쪽으로 회피. 다시 오른쪽으로 회피. 세 번째에는 살짝 몸을 기울여 아래쪽으로 피했다.
"크아앙!"
성질이 났는지 짧게 포효한다. 그리고 몸을 낮추며 V자형 꼬리를 바짝 들었다.
입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저 자세, 잘 안다.
고유의 3성 성혼을 쓰려는 준비 자세였다.
그렇다면 쓰지 못하게 하면 그만.
기관총을 내던졌다. 두 팔을 몸에 바싹 붙였다. 혼원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전신에서 어둑한 천연색 불꽃이 피어오르며, 흉갑이 웅웅거리며 덜었다.
힘의 증폭, 그리고 전달!
푸확!
막대한 힘이 분출된다. 김현이 더욱 빠르게 날아간다. 바람이 김현을 때린다. 뺨이 따갑고, 심장이 크게 뛴다. 미칠듯한 속도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구아나가 가까워진다.
200미터, 100미터, 50미터, 그리고......
도달!
콰아앙!
김현의 오른 주먹이 이구아나의 이마를 강타했다.
수백 미터를 날아온 힘을 몽땅 때려박은 일격이다. 인간의 몸이었으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김현의 오른팔도 혼원의수로 대체된 상태. 몸통에 가해지는 부담도 혼원흉갑이 대신 감당했다.
굉음이 터졌다. 이구아나의 단단한 두개골이 단번에 으깨진다. 뇌가 박살나면서 피와 뇌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쿠웅!
거대한 몸이 쓰러지며 땅이 울렸다.
"후우우."
심호흡을 하는 김현.
그것을 보고 있던 미군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오 마이 갓!"
"슈퍼 히어로 랜딩이다! 슈퍼 히어로 랜딩!"
"저게 사람이야?"
귀에 꽂은 통신기를 통해서 그들이 법석을 떠는 게 들렸다. 김현은 싱긋 웃으며 은빛 돔을 주시했다.
은빛 돔이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다음 괴물을 토해낸다.
두 마리.
하나는 이족보행의, 키가 5미터에 달하는 공룡.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웅장한 날개를 가진 익룡.
[원시 포식룡]
[원시 비룡]
확인하자마자 달렸다. 땅을 박찰 때마다 혼원의족이 충격파를 토해내며 김현을 앞으로 내던진다.
따라서 그 속도는 발군. 단거리 질주 지구 최강인 치타를 가볍게 능가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괴물의 코앞에 도달했다.
"쿠오오!"
"키야악!"
두 괴물이 김현에게 반응했다.
포식룡이 몸을 튼다. 거대한 기둥 같은 꼬리가 횡으로 김현을 쓸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솟구쳤다. 꼬리가 바로 발 밑을 지나간다. 오른발로 꼬리를 밟았다. 충격파가 터지며 김현을 높이 띄웠다.
긴 도약.
비룡의 정면이었다.
파충류의 눈에 교활한 빛이 돈다. 비룡이 입을 쩍 벌렸다. 톱니 같은 치아와 함께 시커먼 동굴이 드러났다.
멍청이.
짧게 비웃으며 수류탄을 까넣었다. 아울러 두 발에서 힘을 쏘아 비룡의 입을 오른쪽으로 벗어났다.
어떻게 보면 새의 얼굴을 닮은 비룡.
자연히 왼쪽 눈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왼손을 뻗었다.
퍼억!
금속 의수가 안구를 짓뭉갰다. 아울러, 회색 혼돈의 불꽃이 터져나오며 비룡의 얼굴을 불태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쾅!
비룡의 목구멍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이 또한 치명상. 비룡의 목에 구멍이 뻥 뚫리고 피가 줄줄 흘렀다.
"끽, 끼익, 끼익."
비명을 지르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
몸을 날려 비룡의 머리에 올라탔다. 두 다리로 비룡의 머리를 꽉 죄며, 연달아 주먹질을 했다.
뻑! 퍽! 뻐어억!
맞은 자리가 푹푹 함몰된다.
비룡이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든 김현을 떨쳐내려고 하나 헛수고. 대신해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김현이 기다리던 순간.
뛰어내렸다. 그 뒤를 거대한 괴물이 덮친다. 포식룡이 입을 벌려 비룡의 머리를 깨물었다.
와그작.
소름끼치는 소리.
비룡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식룡은 비룡을 깨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수류탄이 터지면서 목이 약해진 상황. 그 부위가 끊어지며 비룡의 머리가 몸에서 뜯어졌다.
"쿠오오오!"
포효하는 포식룡.
동족을 죽여놓고 뭘 잘했다고 포효냐, 포효가?
그새 김현은 포식룡의 배 아래로 들어갔다.
포식룡은 용왕계의 3성 괴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과 맷집을 자랑한다. 그냥 때려죽이기에는 김현으로서도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노려야지.
역린을.
용왕계의 괴물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그 약점을.
뻐억!
"쿠아아아악!"
으스대며 내지르던 포효가 순식간에 단말마의 비명으로 바뀐다.
포식룡의 역린은 아랫배, 사람으로 치면 배꼽에서 세 치 아래에 있었다. 명색이 3성 괴물이라 꽤 두툼한 비늘로 보호 받지만, 일단 그것만 뚫으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포식룡이 악다구니를 치며 쓰러졌다. 대지가 둔중하게 울리며 먼지가 일어난다.
달려들었다.
재차 역린을 가격.
포식룡이 뻣뻣하게 굳었다. 심대한 충격에 혼백이 달아난 것 같은 모습이다. 이내 발광하며 사방을 때려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입으로 마구 깨물고,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때리고.
난잡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포식룡의 재생력은 엄청나서 보고만 있으면 역린의 손상조차 재생하고 마니까.
김현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른다. 혼돈의 화염이 흑룡정 선글라스를 뚫고 이글거렸다.
전신의 신경계가 깨어났다. 워낙 많은 전기 신호가 오가는 탓에 신경 다발이 그대로 불타 없어질 것만 같다. 소름끼치는 명징 속에서, 김현이 땅을 박찼다.
내리꽂히는 꼬리.
피했다.
벌어지는 아가리.
뛰어넘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린아이 주먹 크기 밖에 안 되는 비늘 하나!
주먹을 꽂아넣는다.
발차기를 날린다.
몸을 던지며 혼돈의 힘을 터뜨렸다.
가히 폭풍 같은 연격.
비록 전생에서 썼던 전투 방식과는 다르지만, 차오 박사의 수제자인 전전전대 저항군 사령관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 결과 거대한 공룡이 경련하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만다.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은빛 돔이 출렁이며 세 마리의 괴물을 토해놓았기 때문이다.
손바닥 크기의 무지개색 요정용.
입에 불을 문 거대 불도마뱀.
그리고 처음에 나왔던 돌연변이 이구아나까지.
'요정용만 먼저 처리하자.'
요정용은 약하다. 어린아이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치명상을 입는다.
대신 마법을 쓸 줄 안다.
용왕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법이었다. 마법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을 정도이니 가만히 놔두면 고달파진다.
번개처럼 쇄도하는 김현.
"삐이익!"
요정용이 위험을 감지하고 섬광을 터뜨렸다.
역시나 특유의 습성은 어딜 가지 않는다. 흑룡정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 무슨 섬광이란 말인가.
가뿐히 무시.
전신으로 요정용을 들이받았다.
휘잉.
그러나 허공을 가를 뿐.
'환상?'
요정용이 흔히 쓰는 속임수 중 하나.
허리에 꽂아둔 권총 두 자루를 꺼냈다. 몸을 돌리며 쏘아댄다. 총알이 요정용이 있던 자리의 좌우 정확히 1미터 지점을 훑었다.
"삐이익!"
요정용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보석 같은 왼쪽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퍽!
강하게 짓밟아 끝을 보는 김현.
"쿠오오!"
"크아앙!"
불도마뱀이 불을 뿜고, 이구아나가 광선을 쏜다.
그래 봤자 3성 괴물. 둘을 상대하는 건 쉽다.
김현은 적당히 공격을 피해 다니며 은빛 돔이 마지막 괴물들을 토해내는 것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세 마리가 추가되었다.
원시 폭식룡, 원시 비룡.
그리고 마지막 하나.
반룡인.
"네가 세계 지킴이였나 보구나?"
드래곤과 인간을 섞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힘과 맷집은 물론 민첩도 준수하다. 요정용만큼은 아니어도 하급의 마법을 쓸 수 있다. 원 역사에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도망 다니며 큰 피해를 줬지.
"네놈......"
반룡인이 노릿한 눈으로 김현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오만한 기색이더니 점차 놀라움으로, 경악으로 변해간다.
"어떻게 하등한 원숭이 따위가 천품(天品)을 얻었는가!"
천품, 용왕계에서 말하는 4성 등급 성혼.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돌진, 후려친다.
반룡인이 대응하려고 하나 이미 손발이 어지러워진 다음이다. 집요한 공격에 심장이 찢어지고 말았다.
다른 괴물들이 반룡인을 도우려고 했으나 오히려 방해만 됐다. 피를 토하는 반룡인을 포식룡이 휘두른 꼬리에다가 던졌다. 결국 마법 한 번, 성혼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절명했다.
이후로는 김현의 독무대.
3성 괴물 다섯 마리?
누워서 떡 먹기였다. 미군의 지원을 받지 않았어도 그랬다. 9마리 전부가 모였어도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승리는 김현의 것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괴물......"
누군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