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55화 (55/200)

# 55

각성소 –1-

널찍한 회의실 안.

대형 모니터를 통해 어떤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느릿느릿 기어나오는 괴물들. 하나 같이 흉악하게 생겼다. 어떤 놈은 영화 속 공룡을 닮았고 어떤 놈은 지구의 도마뱀을 크게 키워놓은 듯하다.

괴물들은 기이한 힘을 사용했다. 불을 뿜기도 하고,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했다. 현실에 나타난다면 커다란 재앙이 됐겠지.

하지만 한 남자에 의해 모조리 격파당하고 만다.

기계 의수와 의족을 차고, 비슷한 재질의 흉갑을 걸친 남자.

압도적이었다. 몸놀림은 표홀했고 뿌리는 일격은 무지막지했다. 거대한 괴물들이 한 방 얻어맞을 때마다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깊이 팬 상처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허, 참!"

"세상에!"

"엄청나군!"

모두 숨죽여 영상을 보는 가운데,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은 남자가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 번만 본 것도 아니다.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통령이 헛기침했다.

"험, 험. 대통령. 회의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아, 그래야지요. 우리 피해가 얼마나 된다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사망자 0명, 부상자 7명입니다. 다만 이번에 소모한 탄약이......"

"그것 보세요!"

대통령이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Mr. 김을 미합중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했지요? Mr. 김이 없었으면 과연 오늘 같은 성과가 가능했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야 그렇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관료들 대부분이 동의했다.

사망자 0명, 부상자 7명.

그나마 부상자들도 조금만 치료를 받으면 복귀할 경상자에 불과했다.

가히 압도적인 승리.

당연하다. 미리 대비하면 3성 괴물들도 처리할 수 있으니.

"Mr. 김의 귀화 절차는 다 끝났지요?"

"예. 이름은 그대로 현 김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영문 이름을 권유했습니다만 싫다고 해서요."

"굳이 이름까지 바꿀 필요는 없죠. Mr. 김의 가족들이 다 미합중국의 품에 있는데요. 자, 이렇게 합시다."

대통령이 앉아 있는 관료들을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한 번씩 사고를 칠 때 보여주던 그 표정.

"Mr. 김을 우리 미군의 명예 소장으로 임명하고 의회 명예 훈장을 수여합시다. 내 아이디어가 어떻습니까?"

다들 얼어붙는다.

명예 훈장이야 슈퍼 팀 관련해서 한 말이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명예 소장은 또 뭐냐. 애초에 미군 복무를 한 적도 없는 사람에게 소장 직위 부여는 너무 나간 거였다.

"말도 안 됩니다!"

"지나친 처사입니다."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아, 그 두 팀 얘기는 하지도 마세요. Mr. 김의 팀이 다섯 군데, 아니 일곱 군데를 복구하는 동안 그 사람들은 고작 한 군데씩 복구하고 생색이나 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도 미국의 영웅들입니다. 지금도 침식 세계에 들어가 있고요."

대통령이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현재 김현 일행은 휴식 중.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은 두 번째 세계 복구에 들어갔지만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김현 일행이 복구한 곳은 대부분이 완숙 세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반면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은 막 침식된 곳만 골라 들어갔다. 난이도 낮은 곳만 복구하고 있다는 뜻.

"Mr. 김의 팀에게 상과 훈장을 주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 하지만 명예 훈장과 소장 직위는 너무 과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과한 것을 주면 결국 그 가치가 낮아지지 않겠습니까?"

"으음......"

"안 그래도 Mr. 김이 요청한 사항이 있으니 그걸 신경 써주는 게 나아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대통령?"

"Mr. 김이 요청한 게 있다고요?"

다행히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화면에 수많은 요청 사항이 빼곡이 나타난다. 대통령은 거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왜 이런 걸 요구하는지 궁금해하면서도, 몇 가지를 추가로 얹었다.

그때, 어둑한 시선을 모니터로 던지는 이가 있었다. 모니터에는 글자 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시선은 아까 재생되던 영상을 더듬고 있었다.

시선의 주인이 생각했다.

'너무 위험해.'

9마리의 3성 괴물을 단신으로 쳐부수는 힘......

일개 개인이 갖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그것도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미합중국의 시민이 아니라, 시세에 떠밀려 굴러들어온 승냥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목줄이 필요했다.

아주 치명적이고 질긴 목줄이.

시선이 더욱 음험해졌다.

***

뜨끈하다.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뜨거운 물이 전신을 어루만졌다. 달콤한 향이 코로 스며들며 뇌를 이완시켰다.

"후으음."

김현은 의식적으로 몸을 더욱 욕조에 묻었다.

미국 호텔의 욕조는 작다.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주었는데도 그랬다. 김현이 몸을 묻자 욕조가 넘쳐 흐르며 화장실이 아예 물바다가 되었다.

"야! 넘친다, 넘쳐!"

김애경이 밖에서 소리쳤다.

서구권 호텔의 화장실에는 욕조밖에 배수구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목욕을 즐기다 보면 넘쳐서 카펫까지 침범하기 일쑤인데, 김현은 그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호텔이 영업을 중단한 지 벌써 한 달째. 그걸 해결한 게 김현 아닌가. 이 정도쯤은 호텔에서도 웃어넘길 것이다.

적당히 목욕을 즐긴 후 가운만 걸치고 나왔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삼촌! 삼촌! 이거 맛있어!"

"하하, 그러니?"

하은이가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히고 손을 흔들었다. 김현은 선글라스를 끼며 가까이 다가갔다.

"나도 선글라스!"

누구에게 선물로 받은 것일까.

미키마우스 선글라스를 끼고는 으스댄다. 그게 예뻐서 한 번 웃고 말았다.

"디즈니 월드 간다! 디즈니 월드!"

물론 당장은 아니다.

침식됐던 디즈니 월드 곳곳에 시체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걸 수습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린다. 디즈니 월드 인근의 도로 사정도 말이 아니고.

다만 김현은 디즈니 월드가 재개장할 때의 첫 손님으로 하은이와 부모님을 받아줄 것을 디즈니사에 요구했다. 당연히 요구가 받아 들여졌다. 어제, 6월 6일에 일어난 범람을 해결한 직후 디즈니 월드를 복구한 게 바로 김현이었으니까.

"이거 이런 거 받아도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양주병을 들어보이며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발렌타인 40년산......

디즈니에서 감사를 담아 보내온 선물이었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선물이 더 있었는데 모두 부모님에게 선사했다.

"한잔할래?"

"네, 주세요."

아버지는 얼음과 함께 마시고 있었지만 김현은 그냥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들이켰다.

싸한 불꽃이 뱃속을 감도나 싶더니 금세 흩어져 버린다. 4성에 달한 혼원 성혼이 이물질을 감지하고 해독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극독이라도 김현을 어찌할 수는 없을 터.

조금 아쉬웠다.

술 한 잔 후의 알딸딸한 기분, 그걸 더는 못 느끼겠구나 싶어서.

"현아, 괜찮은 거지?"

어머니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묻는다. 그 눈이 김현의 팔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이거, 한 몇 달 뒤에는 되돌릴 수 있어요."

"그럼 다행이다."

사실 이건 고민 중이다.

5성이 되면, 그리고 충분한 재료를 수집한다면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는 99륜을 뽑아도 좋고, 계속 달고 다녀도 좋다.

다만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면 전력이 급하강한다는 게 문제.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는 고위 성혼을 감당하기 힘드니까.

"삼촌, 아~"

"아~"

배가 불렀나 보다.

하은이가 포크에 케이크를 꽂아 내밀었다.

김현이 그걸 받아먹자 하은이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삼촌, 나 선물은?"

"인형 사줬잖아?"

"젤리 줘! 젤리!"

먹는 젤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성혼을 말하는 거였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미국의 선물을 봤을 때부터 계속 달라고 했었지.

자연히 김애경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 성혼 각성, 그건 역시 김애경과 상의해야 할 문제니까.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쁜 건 아니지?"

"응. 오히려 더 낫지. 우리가 항상 보호할 수는 없는 거잖아."

"하아아."

이미 몇 번이나 상의한 적이 있었다. 김애경은 하은이의 각성을 꺼려 했지만 지금은 설득된 뒤. 급변하는 세상에서 성혼이라도 있어야 만약의 사태에 대처할 테니.

김현은 어제 디즈니 월드에서 얻은 3성 성혼 20개를 모두 꺼냈다.

"많다, 만세! 삼촌 최고!"

하은이가 포동포동한 팔을 들며 만세를 부른다. 이걸 다 자기 줄 걸로 생각했나 보다.

"하나만 줄 거야."

"응? 싫어! 다 줘!"

"안 돼."

"부우웅!"

하은이가 볼을 부풀린다. 김애경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주하은."

"에헤헤, 삼촌이 최고야!"

하은이가 김현을 끌어안았다. 덕분에 가운이 흘러내리며 흉한 접합부가 드러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기색이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늘어놓은 3성 성혼들을 살폈다.

'이게 좋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성혼을 골랐다.

[용의 장막(용왕, 3★)]

방어 계열 성혼이다. 자유자재로 범위와 강도를 설정할 수 있어 좋다. 단일 방어로도 광역 방어로도 손꼽히는 기술.

그리고 숨겨진 사실 하나.

몇 가지 성혼과 조합하여 상위 성혼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용의 비상(용왕, 3★)]

[용의 포효(용왕, 3★)]

거기 필요한 성혼도 이미 갖춰져 있다. 하은이의 능력치가 올라가고, 4성 등급 각성자가 될 자격을 갖춘다면 아낌없이 먹일 것이다.

"자, 하은이 선물."

"엄마야!"

하은이가 성혼을 받더니 깜짝 놀라 떨어뜨렸다. 그걸 집으려고 하더니 또 놀라며 손을 뗀다.

보통 적합이구나.

"하은아, 그냥 먹으면 돼."

"괜찮은 거니?"

"괜히 이상한 거 먹이는 것 같다만......"

"걱정하지 마세요. 하은이가 특별해진 건 다 아시잖아요."

"그야......"

하은이가 괴상하게 변한 건 부모님도 안다. 힘이 세진 것은 저번에 보았고, 미국에 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영어를 곧잘 하고 있으니까.

빙의되었다가 풀렸으니 자연스러운 일. 21세기의 상식이 아직 못 따라올 뿐이다. 김애경이 몇 번 더 격려하자 하은이가 망설이다가 성혼을 삼켰다.

발작 시작.

하은이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눈이 돌아가며 거품을 물려고 했다. 김애경이 그런 하은이를 꽉 껴안으려는 순간, 하은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끄어어억."

긴 트림.

하은이가 자기 입을 닦고는 헤헤거렸다.

"꺼억 했어!"

웃는 눈에 언뜻, 보라색의 빛이 흘러나오다가 꺼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보통 적합이라면 몇 분 정도는 경련해야 한다. 예전에 이세희가 성스러운 축복을 얻었을 때 그러했듯이.

"하은이니까. 누나도 알잖아?"

"아......"

오디션 때 썼던 수정구. 지금도 잘 써먹고 있다.

그걸로 파악한 하은이의 잠재 능력은 다음과 같았다.

<잠재>

[성향] 용왕, 유명, 거신 [자질] 극상

[계열] 강화, 이동, 구현, 정신, 소환.

[합치] 용왕, 명왕, 신왕

처음 보고 수정구가 잘못된 줄 알았다. 원 역사에 기록된 어떤 각성자도 이 정도 잠재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으니까.

하은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내민다.

보랏빛 방어막이 손끝에서 일어난다. 거품처럼, 혹은 비눗방울처럼, 하은이의 전신을 뒤덮었다.

"엄마! 이거 봐!"

하은이가 방방 뛰었다.

그 와중에도 방어막이 하은이를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김애경은 물론 부모님도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하은이, 잘하네!"

"방어막이니 이거?"

"네. 총알...... 아니, 대포알도 충분히 막을걸요. 교통사고 나서 죽을 일도 없어요."

"잘 됐다, 잘 됐어."

부모님도 솔직하게 기뻐했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총기 난사 사고 아닌가.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겨도 이것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남는다. 미국에 따라오면서 걱정했던 일 중 하나가 해결된 셈.

김현은 가방에서 성혼 두 개를 꺼내 부모님에게 내밀었다.

[청동 피부(거신, 2★)]

[빛무리 환상(요정, 2★)]

부모님의 혼력 능력치가 7, 8밖에 안 되니 아쉽다. 10만 넘었어도 3성급으로 준비하는 건데.

"아버지랑 어머니도 이거 드세요."

"너나 먹지 그러니."

"전 잘 먹고 있어요. 어서요."

김현의 강권에 부모님도 성혼을 흡수하고 각성했다.

딱히 좋은 성혼은 아니지만, 최소한 길 가다 총 맞아 죽을 일은 없을 터.

그리고 사실, 가족들이 먹은 성혼마다 특수한 처리를 해놓았다.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성혼 세 개 모두 희미한 회색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었던 것.

혼돈의 자취.

혼돈계의 천리안 종류 거울을 이용하면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한다. 혹시 몰라 처리를 했는데, 여기까지 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모레 뉴욕 간댔지?"

김애경의 질문.

"응."

"뉴욕 가서 뭐하게? 자유의 여신상에는 저스티스 팀이 들어갔잖아."

"돈을 좀 벌려고."

"응? 돈? 지금도 많이 벌었으면서 왜?"

가볍게 웃었다.

"이 세상 돈 말고, 저 세상 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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