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각성소 –2-
저 세상 돈.
성혼을 말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1성과 2성 등급 성혼들. 지금도 가끔 볼 수 있지만, 차원의 벽이 얇아질 시점이면 거의 발에 챌 정도로 굴러다니니까.
"차라리 3성 등급 구하러 다니는 게 낫지 않아? 그게 훨씬 효율적일 것 같은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
현재 3성 등급 성혼을 구할 방법은 침식 세계밖에 없다. 아니면 1달에 1번 정도 벌어지는 범람을 기다리거나.
모든 침식 세계를 다 복구하는 건 고민해 볼 문제다. 그만큼 성혼 생산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혼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남겨놓고 범람을 유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래도 안전이 최우선 아닐까?"
"지금 다 복구하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꼴밖에 안 돼. 일단 10군데에서 15군데 정도로 유지하기로 합의했어. 도심에 생긴 건 바로바로 복구하고."
현재 미국에 있는 침식 세계는 총 20곳. 김현 일행이 복구하고,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이 2곳씩 더 복구해서 이 정도였다. 아마 그 두 팀이 미숙 세계 몇 군데를 더 복구하겠지.
"그럼 성혼은 어떻게 구하려고? 저번처럼 지원받게?"
"아니. 그러면 편하고 좋긴 한데 문제가 있어. 각성자들 수가 안 느니까 결과적으로는 손해야."
이번에만 해도 그렇다.
6월 6일, 2차 대침식에서 침식되는 곳의 수가 줄어들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원 역사와 같았다. 똑같이 120곳. 김현이 각성 방법을 대놓고 밝혔는데도 그랬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과 어울리는 성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향이 맞아야 하고, 계열도 비슷해야 하니까.
지금은 그저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식 아닌가. 이 성혼에 손대보고, 저 성혼에 손대보고...... 그러다 느낌이 오면 흡수하는데, 그렇게 흡수한 성혼이 또 본인의 마음에 들 확률도 낮다.
성혼 각성에 있어서 새로운 모델이 필요했다.
"그게 각성소야?"
"그렇지."
이미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밝혔고, 미국의 대통령에게도 설명한 개념.
두 나라에서 준비 중이긴 한데 아직 그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각성소를 맡아 운영할 각성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음 대침식 전까지 각성소를 열어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쯤 하면 다른 사람들도 곧잘 따라 하겠지. 그렇게 모은 성혼으로 할 일도 있고.
"알았어. 너 알아서 해."
"고마워. 도와줄 거지? 각성소 운영도 꽤 힘들거든."
"경리 같은 거 맡기면 화낸다. 월급도 많이 줘야 해. 나 서기관도 때려치우고 너 쫓아 왔다고."
"미국 정부에서 많이 받고 있잖아."
"그래도."
김현 일행 모두 국방부 소속이다. 지금은 임시직을 달고 있지만 받는 연봉과 대우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 혜택이 너무 많아서 여기 옮겨놓기가 부담스러울 정도.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타임스퀘어 인근의 고층 아파트를 내어주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사실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아파트에 도착하고 나서 크게 입을 벌렸다.
펜트하우스.
영화에서나 보던 곳이다. 초고층에 위치하여 뉴욕의 정경이 바로 펼쳐진다. 침실도 여섯 개, 거실은 두 개, 욕실 세 개에 화려한 대리석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통령께서 보내시는 마음의 선물입니다."
"미국이 아니고요?"
"그건 아래층에 사무실로 만들었습니다. Mr. 김의 품격에는 어울리지 않아서요."
이것 참......
부동산 재벌 출신이라 돈이 많다더니 인심을 썼나 보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김현이 귀화한다는 속보가 터진 후로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늘을 뚫고 있으니까. 펜타곤 복구, 슈퍼 팀 경쟁 등의 이슈가 터진 뒤로 더 그랬고.
"우와! 완전 좋네요! 진짜 슈퍼히어로!"
"저한테는 뭐 없어요?"
"음...... 켄트 양이 원하신다면 같은 건물에 숙소를 배정해달라고 건의해 보겠습니다."
피터는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에일리가 따지듯이 묻자 백악관에서 나온 관료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다 같이 여기서 묵죠."
"네? 그래도 돼요?"
"네. 마침 방도 여섯 개나 있네요. 한 사람이 하나씩 쓰면 되겠어요."
여기에 수영장까지 있었으면 딱이었겠지만 그것까진 없었다. 대신 상당히 큰 사우나와 회의실이 있었다. 갑부의 휴양용이라기보다는 업무용에 가까워 보인다.
짐만 풀어놓고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사무실로 내려갔다. 어떤 방식으로 쓸지 얘기가 다 된 다음이라 인테리어가 끝난 상태였다.
각성소.
들어가면 커다란 대기실이 나온다. 소파가 둥글게 배치되어 있고, 온갖 잡지와 만화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거기서 더 들어가면 상담실이고, 한쪽으로는 병원 침대가 가지런히 놓였다. 또 그 뒤로 개방된 형태의 사무실이 위치했다.
"병원이네요?"
각성소를 둘러본 이세희의 첫 발언이었다.
김애경도 머리를 끄덕였다.
"진짜. 그런데 병원보다는 한의원 같지 않아? 저기 사무실만 없으면 완전히 한의원인데."
"비슷하지? 많이 참고했어. 누나랑 선생님, 그리고 피터랑 켄트 양은 여기 사무실에서 절 도와주시면 돼요."
"어떻게요?"
"이렇게."
김현은 미리 준비해둔 수첩을 꺼냈다.
은색으로 물든 수첩.
그걸 왼손으로 쥐고 위에다가 오른손을 살짝 덮었다. 혼원의 힘을 발휘하자 오른손 전체가 묘한 형광색으로 물든다.
살짝 피어오르는 회색의 불꽃.
끌어당겼다.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그것이 수첩을 감싸 안는다. 이어 낚싯바늘 걸듯이 감싸고 잡아당기자 수첩에서 은색 빛이 살짝 떠올랐다.
"오오!"
피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항하면 당기고, 끌려오면 풀어주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반응이 보였다. 수첩 표면에 은색 광채가 뭉치며 작은 구를 형성한 것.
지금!
확 잡아채자 작은 빛이 톡 튀어나왔다. 빛이 공중에서 제멋대로 회전하더니, 쭈뼛쭈뼛 불어나며 젤리 같은 형상이 된다.
"성혼 분리한 거예요?"
역시 경험의 차이는 크다. 피터와 에일리는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이세희는 단숨에 요점을 짚었다.
"맞아요. 앞으로 각성소를 운영하면서 얻는 성혼은 다 이렇게 분리할 겁니다. 제가 요령을 알려드릴게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혹시, 백흔귀는 이렇게 분리한 것만 받아?"
"그렇진 않지. 해보면 알아. 혼력 제어 능력이 아주 좋아지거든."
쉽게 말해 능력치가 오른다. 혼력은 물론 의지와 통찰까지. 그만큼 성혼 추출 작업은 섬세한 제어 능력이 필요했다.
백악관 관료가 광고 사항을 확인했다.
"성혼 두 개를 가져오면 원하는 계열의 동급 성혼 한 개로 바꿔주고 즉석에서 각성시킨다...... 맞지요?"
"예, 맞습니다."
"성혼 감정료는 100달러, 자질 판독료는 200달러에 자질이 없을 시 무료, 성혼 교환 시에는 무료고요."
"맞습니다."
현재 성혼의 시세는 고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한 일. 무슨 성혼이 들어있는 줄 알고 시세가 형성된단 말인가. 또, 스마트폰 같은 비싼 물건에 든 성혼과 볼펜이나 수첩에 든 성혼이 같은 취급을 받을 수도 없고. 심지어 겉으로 봐서는 1성인지 2성인지 구별도 안 된다.
그래서 성혼 교환을 내걸었다. 고객이 잡동사니를 들고 오면 거기서 성혼만 추출하고 물건은 돌려주는 것이다.
"그거, 저희도 마찬가지입니까?"
"당연하죠. 일은 일 아닙니까? 컨설턴트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받은 것도 있고, 저렴하게 해드릴게요."
백악관 관료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안 그래도 군대와 경찰에서 계획서 수십 장이 올라오고 있었다. 괴물을 상대하고, 앞으로 반드시 나타날 각성자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못해도 수십 개의 특수 부대와 경찰 특공대가 필요하겠지. 여기 필요한 각성자를 수급하려면 김현과의 협력이 필수.
"그래도 특수 부대에 너무 의존하시면 안 됩니다. 괴물들 잡기에는 좋아도 한계가 있어요. 무엇보다 각성자 등록제를 빨리 시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웨스트윙에서 초안을 다듬는 중입니다. 다음 달에는 시행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성소 개소는 내일로 잡았습니다. 계속 광고 중인데 괜찮겠습니까? 피곤하실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예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실습을 했다.
성혼 추출 실습.
김애경과 이세희는 금방 익숙해졌지만, 피터와 에일리는 계속 헤매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던 에일리가 들고 있던 은색 곰 인형을 집어 던졌다.
"으아악!"
"왜 그래요?"
"으으, 죽을 것 같아요! 이거 꼭 해야 해요? 저 그냥 훈련만 하고 있으면 안 돼요?"
"훈련하고 싶으시면 해도 됩니다."
"어, 어, Mr. 김. 그럼 저도......"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더니.
김현은 말없이 백일몽을 꺼내 왔다. 그걸 본 피터와 에일리가 풀쩍 뛰었다.
"잠깐만요! 그거 그만한다면서요?"
"성혼 추출도 수련입니다. 하기 싫으면 가상훈련이라도 해야지요."
피터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 그냥 성혼 추출할게요."
"잘 생각했습니다."
반면 에일리는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다소 거친 느낌의 성혼을 쓰다 보니 섬세한 혼력 제어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힘들어도 성혼 추출을 계속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경험이 피가 되고 살이 돼요.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이 오면 저도 도울 거고, 한 분 더 오셔서 도와주실 겁니다."
"한 명 더 온다고?"
"응. 올 때가 됐는데......"
띵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주자 산적같이 생긴 남자가 들어온다.
"오랜만이야. 다들 잘 있었지?"
"아저씨!"
이세희가 반색하며 일어났다.
한철군.
같이 미국으로 오긴 했으나, 그동안 대장간 설립 문제로 떨어져 있다가 합류했다.
"대장간은 완성됐나요?"
"어. 뉴욕 외곽에 킹스 포인트? 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세웠어. 그런데 규모가 너무 큰 것 같아. 거의 공장 수준이라니까?"
저번에 99륜을 만들 때는 대장간이 완성되지 않아 미군기에 설치된 작업실을 썼다. 다음에는 찾아갈 곳이 생겼으니 다행이다.
"아직 안을 채우지는 않았고요."
"그 뭐지, 비행기에 있던 것만 옮겨왔어. 정말 그걸로 되겠어? 대장간이 워낙에 넓어서, 10%도 못 채웠는데."
"충분합니다. 기념비적인 첫 성혼 공방인데, 지구의 구닥다리 장비로 채울 수는 없지요."
"응? 무슨 공방?"
못 들었으면 거기까지. 김현은 싱긋 웃으며 은색 지갑 하나를 내밀었다.
"아마 2주 정도 후에 본격적으로 가동할 것 같네요. 그 전에 한 아저씨께서 도와주실 일이 있습니다."
"뭔데?"
"누나, 시범 좀 보여줘."
김애경이 성혼을 추출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한철군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거야 원, 이젠 별 걸 다 하게 생겼네."
그러더니 지갑을 잡고 정신을 집중한다.
생각외로 빨랐다. 김애경 다음, 이세희보다 빠르게 성혼 추출에 성공했다.
이세희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저씨, 잘하시네요?"
"아니, 그럼. 평생 뭘 만들고 살았는데 이 정도는 쉽지."
예전처럼 불의 보호 성혼 하나만 달랑 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혼력에 대한 제어 능력이 떨어지니까.
하지만 지금의 한철군은 여기 있는 누구와 비교해도 퍽 떨어지지 않았다.
[불의 보호(염옥, 2★)]
[강철손(기갑, 2★)]
김현의 지원을 양분 삼아 2성 등급 각성자로 성장했으니까.
비록 괴물들과 싸우진 않았어도 체력의 수정과 의지의 수정을 복용했고, 여러 수련 방법을 전달받았다. 지금은 성혼 장인으로서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으아아......"
기가 죽었는지 피터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한 아저씨, 인사하세요. 여기는 피터 엘렌, 여기는 에일리 켄트에요. 아시겠지만 저희 새로운 동료들이고요."
"어어...... 나이스 투 미츄?"
영어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한철군. 어색하나마 새로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야 피터와 에일리가 성혼을 추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맥주 파티를 벌인 후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예고했던 대로 오전 8시가 되자마자 각성소를 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글바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열자마자 화제가 된 각성소. 자연히 미국의 각성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며칠 뒤에는 별의 관찰과 비슷한 판독 계열 성혼을 각성한 이들이 김현을 모방하여 각성소를 열기도 했다.
"너무 하는 거 아냐? 특허라도 등록하지."
"특허는 무슨. 이건 내 욕심만 차리려고 하는 게 아니야."
언젠가 다짐했었지.
시대의 아이콘이 되겠다고.
각성소 또한 그걸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했다. 언제까지고 직접 할 생각도 없었다. 적당한 시점에 판독 계열 각성자를 고용하여 맡길 예정이었다. 당연히 이 사업을 독점할 마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선두주자로서 얻을 건 확실히 얻었다.
김현은 창고 안의 대형 금고를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은색의 젤리 같은 것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그 수가 물경 2천 하고도 2백 개.
각성소를 열고 1주일도 안 되어 올린 쾌거.
3성 등급은 없다.
1성 등급이 1984개, 2성 등급이 232개였다. 3성 등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좋다.
만들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