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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57화 (57/200)

# 57

성혼 공방 –1-

향에 불을 붙였다.

스멀스멀 아지랑이 같은 게 일렁였다. 그게 허공에서 뭉치더니 해골 형상을 이룬다.

백흔귀가 퍼런 눈으로 쌓여 있는 성혼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불퉁한 어조로 대답한다.

[많이도 모으셨군. 부자 되셨어.]

사실 김현 일행이 모은 성혼은 이것 말고도 많다.

1성 153개, 2성 245개, 3성 58개. 6월 초 벌인 강행군으로 얻은 성혼들이었다.

백흔귀도 그걸 알고 성혼을 팔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다 거절했더니 기분이 상한 모양.

"이봐, 백흔귀. 거래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너한테 다 팔아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자꾸 보채고 그래?"

[선지자, 그대도 내 사정을 알지 않은가? 백영귀 놈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알아, 알아. 하지만 백흔귀. 솔직히 말해서 1성 등급 수천 개, 2성 등급 수백 개 거래하는 것보다는 3성 등급 수십 개를 거래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그건 그렇다만 너무 늦어지면 의미가 없다. 선지자여, 이 행성에는 이미 농익은 세계가 백 개도 넘게 있다. 어째서 그곳들을 보고만 있는 것이지?]

김애경도, 대통령도 의문을 표했던 항목.

가볍게 웃었다.

"꼭 침식된 세계에 들어가야 3성 등급 성혼을 얻는 건 아니잖아?"

[그럼?]

"농축시켜서 승화할 거야."

농축 승화.

하급 성혼을 결합하여 상급 성혼을 얻는 방법.

백흔귀의 안광이 거칠게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농축 승화의 교환비가 얼마나 되는 줄 알고 말하는 건가? 현 단계에서 가장 뛰어난 교환비를 자랑하는 곳이 혼돈계인데 그곳의 비전으로도 12대 1을 넘지 못한다. 그 정도로는 의미가 없어. 차라리 그냥 파는 게 낫지. 통상적으로 1등급이 오르면 10배를 더 쳐주는데 농축 승화를 한다고? 그건 아까운 성혼을 이차원에 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랬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농축 승화 기술로는 15대 1이 한계다. 혼돈계의 비전 기술을 써도 12대 1이었다. 그래서 외계종들은 어떻게든 성혼이 생산되는 행성을 점령하고 최대한 원주민들을 쥐어짜 더 높은 등급의 성혼을 뽑아내려고 했다.

김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8대 1."

[음?]

"8대 1이라고 했어. 비록 1성과 2성에 국한되긴 하지만 8대 1로 농축 승화시키는 기술을 알아."

[그, 그게 정말인가?]

"그래. 어디, 계산해 볼까? 내가 가진 1성 등급이 2137개니까 2성 등급 267개로 변환되겠네. 그러면 2성 등급 744개가 되니까 3성 등급 93개, 다 합쳐서 161개가 되는 셈이지. 어때?"

3성 등급 161개!

백흔귀의 안광이 거세게 흔들렸다.

엄청난 대박이었다. 현재 지구에 진출한 어떤 세계의 사자들도 이 정도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니까.

아니, 지금까지의 환혼 탐사 역사상 이런 적은 없다. 이제 겨우 두 주기째인데 이 정도라? 3성 등급 161개 중에서 100개만 상관인 백마혼에게만 바쳐도 백마혼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좋다, 거래하지.]

"잠깐만. 난 뭘 살 건지도 말 안 했는데."

[뭐든 좋다. 어차피 수수료 없이 거래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럼 서비스 좀 줘. 그 정도는 괜찮지?"

[끙, 또 뭘 요구하려고?]

"별 것 아냐. 이 정도?"

미리 적어둔 걸 건넸다. 한글로 적었지만 모조리 읽어낸다. 한 번 쭉 훑어본 백흔귀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선지자여...... 내 등골을 빼먹을 셈인가?]

"에이, 엄살은. 이 정도는 괜찮잖아?"

[으으으......]

백흔귀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이나 안광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슬며시 김현을 바라본다.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

[선지자여, 그대가 작업하는 광경을 참관할 수 있게 해다오. 그럼 기꺼이 선지자가 원한 물건을 쾌척하겠다.]

교활하기는.

백흔귀도 아득한 시선과 비슷한 판독 계열 성혼 정도는 있다. 그걸로 김현의 기술을 복제하려는 의도.

김현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면 수지가 안 맞는데...... 이봐, 백흔귀. 이 정도 물건으로 8대 1짜리 농축 승화 기술을 시연하라는 건 너무 안 맞지 않아?"

[보기만 하겠다. 따로 기록하지는 않겠다고 맹세하지.]

"유명계에 무슨 기록 문화가 있다고? 괜히 속이려 들지 말고 솔직해지지그래?"

[미안하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겉으로는 툭툭거렸으나 사실 김현은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김현이 앞으로 쓸 농축 승화 기술은 유명계에서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

가능하다면 오직 혼돈계뿐. 그나마 99륜을 개발하지 못하면 헛수고. 혼돈계에서 자기들 힘을 억제하는 99륜을 만들 리가 없으니 사실 김현의 독점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참관을 허락하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네.]

백흔귀가 몸이 잔뜩 달아서는 김현에게 달라붙었다. 혼력이 일그러지자 왼팔을 흔들어 쫓아냈다. 백흔귀가 몇 미터 물러나서는 미안하다고 머리를 숙인다.

"첫째, 백혈탑의 도래지를 뉴욕 타임스퀘어 인근으로 할 것. 센트럴 파크 쪽도 좋고."

[선지자여, 그건 내 권한 밖이다.]

"둘째, 백혈탑의 탑주를 독립 현혼 탐사대 소속 백흔귀로 임명하고 최소 백 년 동안 탑에 대한 완벽히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부여할 것."

[서, 선지자여, 그건......]

백흔귀가 말을 더듬는다.

뜻밖이겠지. 이건 김현이 아니라 백흔귀에게 이득이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완벽히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라는 것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이 경우 유명계는 지구 백혈탑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설령 백흔귀가 그 권리를 다른 이에게 팔아넘겨도 개입할 수가 없다는 뜻.

속내를 감춘 채 어깨를 으쓱였다.

"백흔귀. 이 두 가지는 너한테 요구하는 게 아니고 유명계의 백혈존에게 요구하는 거야. 그리고 네게는 개인적으로 따로 요구할 게 있어."

[선지자여, 뭔가? 나 또한 그 두 가지 조건이 성사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간단해. 원래는 로열티를 요구할까 했는데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 난 당장 앞날이 바쁘니까. 명금 백만 관, 어때?"

[배, 백만 관!]

"탑주 자리 얻는 것 치곤 싸지? 상부에도 그렇게 말해. 내가 로열티 1% 달라고 하는 걸 잘 설득해서 백만 관으로 퉁쳤다고."

[으흠, 그럼 내 개인적으로 써먹기가 힘들어지는데......]

"백흔귀. 잘 알면서 왜 그래? 욕심부리지 마. 이 기술, 네가 지킬 수 있겠어? 지금 네 힘으로?"

[그렇군. 알아들었다. 잠깐, 그럼 네가 어떻게 그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지? 선지자의 정체가 벌써 밝혀져서는 안 된다.]

"어쩌긴 뭘 어째? 혼돈의 지혜를 얻었다고 하면 되지."

[아, 그게 있었지.]

혼돈계.

이곳은 지구에 도래하는 열여덟 세계에서도 가장 이질적이다. 머나먼 심연과 아득한 피안이 공존하는 곳. 생물체는 접촉하는 즉시 영육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혼돈에 먹히고도 살아남았다면 그 생물체는 막강한 힘과 이계의 지식을 함께 얻게 된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니 핑계로 대자면 충분했다.

백흔귀가 한탄을 했다.

[상부에서도 이제 선지자를 주목하게 되겠군.]

"그렇다고 동업자를 버릴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아, 다 잡은 물고기라고 방치하면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방심하진 말고."

[알겠다, 선지자여. 일단 백마혼께 보고를 하겠다. 어쩌면 직접 오실지도 모르겠다.]

"그건 불가능하지. 백영귀가 대신 오지 싶은데."

[아차, 아직 대천공이 이뤄지지 않았지. 으으, 그 꼴도 보기 싫은 작자를 봐야 하는가?]

"좋은 거지. 이번 일만 잘되면 네가 탑주로 확정되는 건데, 그놈 상관이 되는 거잖아."

[딴에는 그렇군. 금방 다녀오겠다.]

"후아!"

백흔귀가 사라지자 피터가 길게 숨을 토했다.

"으, 외계종들은 다 느낌이 이상하네요."

피터도 외계종을 제법 만나보았다. 피터가 끼어서 복구한 세계만 다섯 군데나 되니 당연한 일.

"움직이죠. 킹스 포인트로 가요."

"윽, 지금 시간에요?"

에일리가 질색했다.

하필이면 오전 8시 반. 뉴욕의 러시아워. 대장간이 위치한 킹스 포인트까지 가려면 엄청난 교통 혼잡을 뚫고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던 것.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로 가면 되죠."

권력은 뒀다가 어디에 쓰게?

이미 펜트하우스 옥상에 헬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걸 타고 편하게 이동했다.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킹스 포인트 대장간에 도착.

부지는 넓은데 건물은 단출했다. 다만 높은 울타리를 치고 군인들이 경계 중이라 보안은 확실할 것 같다.

김현은 널찍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행에게 당부했다.

"이번 건 위험하니까 멀리서 보기만 하세요. 한 아저씨도요."

"나, 나도?"

"네. 휘말리면 정말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안에서 하는 게 아냐?"

"응. 어차피 연장이 필요한 건 아니어서."

이때쯤 향에 저절로 불이 붙었다. 백흔귀가 거기서 꾸물거리며 나오고, 그 옆에 음울한 그림자가 나오더니 어떤 형상을 갖춘다.

언뜻 보면 사람인 듯한,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해파리 같은 형태의 그림자. 아주 옅고 흐려서 싸늘한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뭐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백영귀.

원 역사에서는 일본 오사카 백혈탑의 탑주였던 존재.

[네가 백흔귀의 거래자인가.]

"그렇다만."

[흠, 기이하군. 혼돈을 몸에 담다니...... 그러고도 살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하지만 시한폭탄과 같군. 너는 언젠가 거악이 되어 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짓밟을 것이다.]

혼돈에 침습된 자들의 흔한 말로.

김현은 씨익 웃었다.

"듣던 대로 재수 없는 새끼네."

[무어라?]

"패배자 주제에 짖지 말라는 소리다, 이 쓰레기야."

[고깃덩이 주제에 감히......]

"아,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담은 오롯한 존재가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나도 좋아서 전달하는 게 아니거든. 어쨌든 말이지, 너 진짜 재수 없다."

선글라스를 벗고 두 발짝 다가갔다.

백영귀와 김현의 몸이 겹쳐진다.

기다렸다는 듯 타오르는 혼돈. 백영귀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크아악! 무슨 짓이냐?]

"실체 없는 유령 주제에 그만 시부렁대고 결론이나 말해. 예스야, 노야?"

혼돈의 불을 품은 채 쏘아보는 김현.

백영귀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린다.

확연히 어떤 감정이 느껴진다.

불쾌감.

그러나 백영귀가 여기서 대들 수는 없다. 이번 사안은 단지 백마혼이 아니라, 그 위의 백명신에게 결재를 받았고 추후 백염공은 물론 백라왕까지 올라간다고 했으니까.

[크크크, 예스다. 거래자여.]

백흔귀가 통쾌한 듯이 대신 대답했다.

[크흠, 그 말대로다. 단, 네놈의 그 알량한 기술이 사실일 경우에 한해서이다. 티끌만큼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백흔귀는 영존(靈尊)을 능멸한 책임을 물어 소멸할 거다.]

소멸은 무슨.

거짓말도 잘한다. 지금 시간이면 끽해야 신급에게 결재받은 게 전부인데 무슨 영존을 능멸한 책임을 물어?

콧방귀를 끼고는 손을 내밀었다.

"계약서부터 보지."

[흥.]

두 부의 계약서.

하나는 유명계와, 하나는 백흔귀와.

찬찬히 살펴보니 거짓은 없어 보였다. 하긴 유명계는 이런 종류의 장난은 잘 안 치니까. 개개 유령들이야 어떻게든 속여먹으려고 해도 유명계 이름을 걸었을 때만큼은 깐깐하게 나오는 것.

"참관 만이다. 알지?"

[흐흐. 당연하지. 기록은 하지 않으마.]

"그놈의 기록 타령은...... 아니, 육체도 없는 것들이 무슨 기록이 필요해?"

[제법 잘 아는군. 그것도 혼돈의 지식인가?]

"아아, 이상하게도 내 앞에 있는 쓰레기 하나는 잘 알게 되어서 말이지. 흐흠, 누구의 지식이 흘러들어와서 그런 걸까?"

[놈......]

"어쨌든 시작하지. 백흔귀?"

[알았다.]

백흔귀가 크게 차원 구멍을 열었다.

물건이 쌓인다.

하늘벼락, 지옥 핏물, 태초의 불, 멸절의 서리, 어두운 빛, 찬란한 어둠, 유령 비명, 불사자의 신음.

무형과 유형 사이, 힘과 물질의 사이에 있는 기이한 재료들.

내려놓자마자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놔두면 흩어져서 써먹지도 못하게 된다.

김현이 눈을 감은 것은 바로 그때.

99륜을 거꾸로 돌렸다.

폭주.

억제되던 혼돈의 힘이 일거에 풀려나왔다.

육체가 기화된다.

음울한 빛이, 탁한 무지갯빛 불꽃이 김현을 단숨에 집어삼킨다.

순간적으로 타올라서 수십 미터까지 솟구치는 거대한 불길.

모두들 그 장면을 멍하니 쳐다본다.

지독히 비현실적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유령들과 떠들던 김현이 빛바랜 화염에 휘말려 사라지는 광경은.

"김현 님!"

"이봐, 이봐!"

"Mr. 김!"

"왜, 왜!"

모두가 목놓아 김현을 불렀다.

다만......

김애경만큼은 신뢰 어린 눈으로 춤추는 혼돈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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