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성혼 공방 –2-
"너, 현이지?"
불을 향해 말을 거는 김애경.
이세희와 한철군이 불신하는 눈으로 김애경을 본다. 아무렴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불꽃으로 변하겠느냐고.
화염이 한 차례 흔들렸다.
괴상하게도, 그 흔들림을 본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당혹해 했다.
꼭 불길이 웃는 것 같았으니까.
[맞아. 나야.]
뇌를 향해 직접 전달되는 말.
피터가 입을 쩍 벌렸다.
"말도 안 돼."
불꽃이 너울너울 춤추다가 어떤 형체를 갖추었다.
거인?
사람의 형상이다. 다만 하체는 없이 상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쓸데없이 가슴과 어깨가 부풀어진, 만화 속 화염 거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쩡, 쩌저저정.
그리고 인상 깊은 것.
의수. 흉갑.
금속 의수가 수십 분절이 난 상태로 띄엄띄엄 벌어졌다. 진한 불길이 의수 조각을 휘감고 있어 쇠와 불로 이뤄진 거대한 손이 허공에서 유영하는 듯했다. 흉갑 또한 마찬가지. 조각조각 난 채 상체 표면에 떠다녔다. 자연히 흉갑이라기보다는 구속구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불의 마왕.
바깥에서 잠깐 소동이 벌어졌다. 지휘관들은 미리 귀띔을 받았지만 일반 군인들은 그렇지 못한 까닭에 혼란에 빠진 것.
근방을 지나던 차들도 마찬가지. 깜짝 놀라 경적을 울려댄다. 잠깐 정차해놓고 머리만 빼서 이쪽을 보는 시민들도 많았다.
[놀랍군.]
[이건......]
백흔귀와 백영귀가 살짝 동요했다. 특히 백영귀의 감정 변화가 심했다. 흐릿하던 몸이 뚜렷해져서 얼굴 윤곽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속으로 웃었다.
이 모습. 백영귀가 생전에 집착하던 어떤 인물과 관련이 있으니까. 착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김현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불의 몸이 공간을 휩쓸며 공기를 소멸시키고, 기압 차로 인한 기이한 바람이 칼날처럼 불어왔다.
"꺅!"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에일리가 비명을 질렀다. 바람이 치마를 휘감는 덕에 팬티가 살짝 노출되었으니까.
피터가 그런 에일리를 훔쳐보았다.
'빨간색.'
김현도 그걸 보았으나 관심이 없었다. 모든 정신이 99륜과 혼돈으로 변한 자신의 육체에 가 있었으니.
[후웁.]
숨을 쉴 필요는 없지만 버릇처럼 호흡을 들이쉰다.
두 불의 손이 크게 일렁였다. 한쪽에 쌓아두었던 성혼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지정된 경로를 따라 두둥실 떠 왔다.
정확히 여덟 개.
흡수하진 않았다. 대신 두 개의 손 사이에 여덟 개의 성혼을 둔다. 고양이 털실 뭉치 굴리듯, 혹은 피에로 저글링 하듯 그렇게 허공에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혼돈의 불을 내뿜는다. 성혼이 거기에 자극을 받았다. 몇 번 은빛 섬광을 뿜더니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
안타까움의 탄성을 지르는 백흔귀.
이 상태로 가면 승화고 뭐고 다 소멸하게 생겼으니까.
김현의 눈이 짜르르 빛을 토한 것은 바로 이때.
입술을 앙다문다는 느낌으로 99륜을 재차 돌렸다. 역으로 폭주하던 99륜이 다시금 정방향으로 틀어진다. 그리하여 조금 전 일이 역순으로 재생되었다.
불꽃이 작아진다.
대장간을 뒤엎을 크기에서 그 절반으로, 거의 사람 크기로.
의수가, 흉갑이 맞춰진다.
화염은 흩어지고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원래 크기로 돌아간다.
기화되었던 육체가 고드름 돋아나듯 쑥쑥 자랐다. 심장 부분부터 육체가 자라나는 걸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다.
기이한 감각.
없어졌던 감각이 새로 생겨난다. 막대한 정보의 홍수가 뇌를 두드린다. 육화된 심장이 격렬하게 뛰어서 전신이 다 터질 것 같았다.
이 와중에 김현은 전혀 다른 곳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99륜.
여기서 발생하는 힘을 인도하여 두 손 사이로 보내고 있었던 것.
이제 막 혼돈의 불꽃이 닿아 외피가 녹은 성혼.
그리하여 그 안의 힘이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려는 찰나.
99륜의 힘이 가로막는다.
9종의 조화, 9종의 억제, 9종의 진화라고 할 만한 것이......
성혼이 황홀한 빛을 내뿜었다.
아니, 8개의 성혼이 내는 빛이 아니다. 그것은 99륜, 이 혼돈이자 질서이며, 무질서이자 혼원인 법칙이 빚어내는 힘의 광채였다.
그대로 압축.
99륜을 또다시 역으로 돌린다.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뇌가 그대로 불타버리는 것 같다.
육체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는 행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 짓만으로도 육체가 완전히 승화되어 혼돈계의 주민이 되었을 터.
김현은 견뎠다.
웃어넘겼다.
곡절 많은 전생에서 얻은 정신력과 경험으로, 이번 생을 살며 제련한 사명감과 자신감으로.
혼돈의 주사위가 굴러가고 있었다.
수많은 단면이 뇌에 맺혔다가 사라진다.
김현 자신이 혼돈수가 되는 미래, 뇌가 사라져 백치가 되는 미래, 성혼이 이대로 녹아 없어지는 미래, 폭주하여 괴물이 탄생하는 미래......
조금씩 힘을 교차하여 가한다. 어떨 때는 천상계의 힘을 더 넣어주고, 그다음에는 유명계의 힘을 첨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혼돈의 주사위가 어떤 단면을 내놓았을 때 힘껏 성혼을 내던졌다.
푸확!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은색의 빛이 허공을 관통한다.
힘껏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까. 은색 빛 덩이가 김현의 바로 발밑에 떨어졌다.
[오호.]
백흔귀의 작은 감탄사.
[영혼 포식(유명, 3★)]
예전에 신촌 병원에서 혈귀를 잡고 나왔던 바로 그 성혼이다. 유명계에서는 특히 좋아하는 종류지.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겠다.
[계속할 수 있겠나? 힘들어 보이는데.]
상태를 알아봤는지 백흔귀가 걱정하는 투로 묻는다.
[난 괜찮으니까 계속하지.]
담담히 대답하는 김현.
사실 지금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만약 여기서 인간 형태로 돌아간다면 전신에서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을 터. 그런데도 강행하는 이유가 있었다.
[혼력] 30
각성소를 운영하는 1주, 딱 1이 올랐던 혼력 능력치가 또 1이 올랐으니까.
이것만이 아니다. 다른 능력치도 자극받아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기화했다가 육화하면 최대한 이상적인 형태의 육체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 4성 각성자가 되자.'
무늬만 4성이 아닌, 진짜 4성 각성자가.
아니, 그걸 넘어서 모든 성혼을 다 4성까지 상승시키도록 하자. 장비도 마찬가지고.
[네놈... 그 기법, 어디서 배운 거지?]
백영귀가 또렷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코웃음을 치는 김현.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백영귀는 지금 이 기술이 혼돈계에 녹아든 자신의 옛 애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착각하도록 김현이 유도하기도 했고.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이 농축 승화 기술은 어디까지나 99륜의 창시자, 차오 박사의 작품이다. 백영귀의 애인이 남긴 지식이 혼돈 저편에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최소한 지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또 성혼을 집어 든다. 99륜을 정방향으로 돌리며 성혼에 불꽃을 가했다. 이번에도 8가닥의 힘을 이리저리 집어넣는다.
마지막에 8종류의 힘을 불어넣는 것은 김현의 고유 기법.
차오 박사의 경우 혼돈의 불꽃으로 성혼의 외피를 녹인 후 한순간 압력을 가해 그대로 압착시키는 방법을 썼다. 이 경우에는 나오는 성혼이 오로지 혼돈계 성혼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것이 김현의 손끝에서 더욱 진화한 것이다. 넣는 힘의 종류에 따라서 혼돈계만 아니라 다른 여덟 세계의 성혼도 뽑아낼 수 있으니까.
[후웁, 후웁.]
김현의 제련이 계속된다.
불의 거인으로 변했다가 인간으로 변하며 농축 승화를 시행한 게 벌써 100번이 넘어갔다.
이쯤 되자 정신이 혼몽해진다. 99륜을 정방향으로 돌릴 때마다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하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텁텁 막혔다.
그래도 강행.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기계적으로 성혼 제련을 반복한다. 불이 되었다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가 불이 되며 3성 성혼을 뱉어낸다.
이 기이한 장면은 인근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처음에는 놀라워하던 시민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중에는 가까이, 울타리 코앞까지 와서 사진을 찍었다.
군인들?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계는 뒷선이었다. 아예 김현 쪽을 보며 구경하기 바빴다.
투타타타타타.
소식을 듣고 날아온 기자들도 있었다. 지상에서는 김현의 모습이 잘 보이질 않자 아예 헬기까지 대동했다. 드론을 날린 기자도 보였다. 공중을 돌면서 김현을 촬영하여 속보로 내보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계처럼 뻗은 팔에 아무것도 잡히지를 않는다. 그제야 김현은 상황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
푸시시시.
힘이 빠진다.
언제 그렇게 강렬하게 불꽃을 피웠냐는 듯이 완전히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김현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커헉! 쿨럭!"
"김현 님! 괜찮아요?"
이세희가 얼른 김현의 등에 손을 얹는다.
성혼을 직접 주입한다.
영혼의 보호, 성스러운 축복, 빛의 치유......
사실은 의미가 없다. 지금 김현이 골골거리는 건 상처를 입거나 병에 걸려서 그런 게 아니니까.
끼기긱.
99륜이 심상치 않았다.
삐걱대며 잘 돌아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덕택에 김현의 몸 곳곳이 불꽃으로 변했다가 육체로 변했다가를 반복했다.
김애경이 다가온다.
옆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현을 내려보다가, 문득 가슴에서 덜그럭대는 작은 바퀴에 손을 얹었다.
'그러지 마.'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김현이 손을 들어 말리려고 할 때였다.
시리도록 청량한 힘이 밀려들었다.
서리거인 성혼?
아니다. 이것은 지독하도록 순수하게 정련된 혼력, 그 자체였다. 얼음 속성도 거인계 성향도 전혀 묻어나오지 않았다.
완벽히 순수한 힘이 물처럼 99륜에 스며든다. 그리하여 윤활유가 되었다. 삐걱거리던 99륜이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완벽히 제 기능을 되찾는다.
묘한 감각에 눈을 껌뻑였다.
가슴이 촉촉하면서 따스해지는 이 느낌......
가족이라서 그런 걸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게 이토록 좋은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역시 애경 장군은 대단......'
아니, 이제는 이렇게 부르지 말아야겠다.
'우리 누나는 대단하네.'
김현은 씨익 웃었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빗장 하나를 비로소 내려놓은 것.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누나. 덕분에 살았어."
"괜찮은 거지?"
"그럼. 이거 볼래?"
팔짱을 끼고는 가슴 근육에 힘을 준다. 흉갑 안쪽 탄탄한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날렵한 체구라 그런지 액션 영화 속 미남 배우들의 것을 보는 듯하다. 이세희가 꺄악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김애경도 감탄하며 가슴을 콕콕 찔렀다. 제련 시작 전만 해도 솔직히 말하면 빈약했던 게 이리 변해 버렸으니 놀랐나 보다.
"우와!"
"꼴깍."
피터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에일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감탄한 건 김현도 마찬가지. 아득한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니 어마어마하게 강력해졌다.
<능력>
[이름] 김현 [성별] 남성 [나이] 2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29 [체력] 31 [민첩] 28 [감각] 30
[혼력] 47 [의지] 35 [통찰] 33 [위엄] 39
[성향] 혼돈
[성혼] 혼원(혼돈, 4★), 아득한 시선(혼돈, 4★), 혼돈의 주사위(혼돈, 4★)
[보물] 혼원의수(4★), 혼원의족(4★), 혼원흉갑(4★)
수백 번의 농축 승화.
그것은 상급 성혼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김현이라는 한 인간을 담금질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영육이 크게 성장하고, 거기 영향받은 성혼이 강화되었다.
보물도 그랬다. 애초에 혼돈 속에서 빚어낸 보물 아닌가. 더욱 강화되고, 새로운 기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장 한계구나.'
지금부터는 더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5성 등급 성혼을 각성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얻기 전까지는.
[놀랍군......]
백흔귀가 3성 성혼 161개를 확인하고는 안광을 흐트러뜨렸다.
당연하지. 같은 3성 등급이라고 다 가치가 같지는 않다. 세계마다 선호하는 성혼이 분명히 있었다.
천상계는 정신 계열을 좋아하고, 유명계는 포식 계열을 좋아하는 등의. 지구인들이야 천상계 성향이면 보호나 치유, 유명계 성향이면 소환이나 저격 계열을 선호하지만.
161개 전부가 알짜인 건 백흔귀도 처음 본다. 백흔귀가 사람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성혼을 챙겼다.
정확히 150개.
나머지 11개는 김현이 챙겼다. 자신은 성장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동료들을 강화할 차례이니까. 아무리 김현이 강해도 독불장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는 사이, 백영귀는 허여디 허연 눈으로 김현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약속은 지켜. 아, 명금은 언제 줄 거야?"
[음? 아, 그렇지. 명금은 따로였지. 명금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내가 그 정도 거금을 쌓아두고 사는 건 아니어서. 지구 시간으로 몇 주일만 기다려다오.]
"좋아. 기다리지."
[대신 성혼 대금은 바로 치르도록 하겠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배라도 한 척 만들 생각인가? 차원 탐사선 같은?]
이번에 많이 주문하긴 했지. 예전처럼 갑옷이나 만들고 무기나 몇 점 만드는 수준의 수십 배 이상으로.
김현은 그저 적당히 웃어 보였다.
"글쎄? 나중에 와서 봐."
[좋다. 조금만 기다려라.]
백흔귀가 황급히 몸을 감췄다. 얼른 가서 보고하고 싶다는 듯이. 그 뒤를 따라 백영귀가 흩어진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타는 듯한 눈빛만 이곳에 남겨놓고서.
사위가 조용해졌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10분 정도 지난 후 김현이 서 있는 곳 앞에 차원문이 하나 열렸다.
집 두어 채는 간단히 삼킬듯한, 거대한 차원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