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59화 (59/200)

# 59

성혼 공방 –3-

쾅! 쾅쾅!

차원문에서 거대한 물체들이 떨어졌다.

가장 먼저 떨어진 것은 잿빛의 금고. 정육면체 형태로 너비와 높이 모두가 4미터에 달했다. 말 그대로 집채만 한 크기. 무게가 엄청나서 땅이 둔중하게 울렸다.

이어서 비슷한 크기의 물체들이 낙하했다.

용광로, 모루, 얼어붙은 가마, 우물......

"뭐가 저렇게 커?"

멍하니 보던 한철군이 입을 쩍 벌렸다.

하나 같이 높이가 3미터에서 4미터 정도. 저걸 써서 대장간 일을 하려면 거신계의 거인들이나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차원문은 계속해서 주문한 물품을 뱉어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너울너울 내려오고, 기이한 색의 광채가 그 옆을 차지한다. 무형의 바람이 어느새 불어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낙하하는 기기묘묘한 연장들. 언뜻 보면 지구의 것과 비슷한데 뭔가 다르다. 표면에 정체불명의 회로가 새겨진 채 무광으로 번들거리는 것.

이것들 말고도 온갖 세계의 재료가 수북하니 쌓였다.

무쇠흙, 차원철, 전뇌 회로, 용암 결정, 화산은 등등.

주로 기갑계와 염옥계의 재료들. 한철군을 위한 거였다.

[쓰는 방법은 알고 있지?]

백흔귀가 묻는다.

"당연하지."

전생에서 몇 번이나 다뤄봤는데.

수북이 쌓인 설비 중심에 있는 금고에 다가가 손을 댔다.

문이 없는 거대 금고.

혼력을 주입했다.

금고 내부를 어지럽게 주행하는 마법진이 느껴진다. 그 마법진들이 김현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차분히 읽은 후 조합하여 어떤 방정식을 만들었다.

금고가 열렸다.

바람이 불어온다. 태풍처럼 격렬한, 어쩌면 용오름보다 강렬한 거대한 바람이.

쌔애앵!

"우앗!"

"어어?"

한철군도 이세희도 기겁했다. 김애경 또한 반사적으로 몸을 낮춘다. 피터는 벌러덩 넘어지고, 에일리의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며 파르르 울부짖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금고 주변에 널려 있던 재료와 설비가 바람에 이끌리듯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보고 있던 김애경의 눈에 의문의 빛이 스쳤다.

이 정도 바람으로 저렇게 무거운 설비들이 떠오른다고? 척 보기에도 작은 집 크기인데?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소리.

그러나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중심을 다잡는 사이 눈앞에 널려 있던 것들이 몽땅 바람에 휘말려 금고로 들어가고 만다.

꾸울꺽.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청소를 끝낸 금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 바람을 들이마셨냐 싶게 평범한 금고로 돌아간 것.

"이상한 금고네."

"방금 그거, 저게 한 거예요?"

"허헛,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오 마이 갓!"

"와, 진짜 별일이 다 있네요. 오디션 보길 잘 했어요."

벌써 놀라는 건 이른데.

"백흔귀. 다음은 무진의 표 차례야."

[괜찮겠나? 선지자가 원하니 구해오긴 했다만 위험한 물건이다. 자칫 선지자의 성혼만 잡아먹을 수도 있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도 잘 알잖아?"

[하긴, 선지자라면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너무 욕심부리지는 마라. 5대 1 비율을 추천한다.]

차원문이 사라지며 작은 종잇조각을 뱉었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겉으로 봐서는 특별할 게 없는 물건이다.

김현은 빙긋 웃었다. 혼력을 주입하자 종잇조각에 저절로 불이 붙는다. 불꽃 너머에서 희뿌연 연기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상승한다. 위로, 김현의 머리 너머로. 그리하여 정육면체 구획을 만들었다.

전후좌우상하 정확히 5미터. 작디작다. 아래쪽에 버티고 선 거인의 금고만 집어삼켜도 거의 찰 테니까.

이걸로 끝이냐고?

천만에. 그랬으면 애초에 구입하지도 않았지.

무진.

무진(霧陣)이며 무진(無盡)이자 무진(戊辰).

안개의 진이다. 그 끝이 없다. 처절한 위험과 크나큰 성취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의수를 통해 혼력을 흘려보낸다.

안개로 이뤄진 정육면체 구획이 천천히 회전했다. 그리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잡아먹히면 그것으로 끝. 모든 성혼을 약탈당한다.

하지만 김현은 차갑게 웃을 뿐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얘기. 이깟 무진의 표는 전생에서도 충분히 다뤄보았다. 저항군 기지에 설치된 성혼 억제 결계 또한 무진의 표를 응용한 것이었으니.

다룬다.

성난 고양이 다루듯 조심스럽게.

혹은 어여쁜 애인 애무하듯 부드럽고 온화하게.

두 손을 뒤집었다.

정육면체 또한 뒤집힌다.

힘을 훅 불어넣었다.

심장 박동하듯 크게 쿵쾅거린다.

손을 넓게 펼쳤다.

정육면체가 활짝 벌어졌다.

아아......

커진다.

확대된다.

10배로 커져 인근 대장간을 뒤덮고, 이내 50배로 커져 이곳 킹스 포인트 일대를 모조리 장악해버린다.

안개에서 퍼지는 기이한 힘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뭔가가, 뭔가 압도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만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입을 벌린 채 정육면체를 올려다보게 된다.

[말도 안 돼!]

가장 놀란 것은 백흔귀.

벌써 100배로 커진 정육면체가 아직도 그 세력을 확장 중이지 않은가.

비록 정육면체에서 찌그러져서, 상하로는 거의 늘어나고 있진 않긴 해도 그것만으로 대단했다.

200배, 300배, 400배...... 1000배.

거기까지 가서야 멈춘다.

도무지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흔귀의 안광이 짙어졌다가 옅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무진의 표는 용왕계에서 나온 물건.

용왕계 성향 공간 계열 5성 등급 각성자는 되어야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다. 4성 등급이 된 것은 알고, 선지자인 것도 알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백흔귀의 속내가 복잡해진다.

과연 김현과 손을 잡은 게 잘한 것인지 싶어서.

"후우."

김현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것보다 10배는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었다. 지금은 축구장 3개 정도 규모인데, 20배 정도 더 키워서 잠실 경기장 수준까지 올릴까 생각했던 것.

그러나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당장 백흔귀가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해서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얕보지 말라고 적당히 과시할 필요도 있지만, 너무 나가는 것도 위험했으니.

다시 금고에 손을 얹는다. 내부 마법진을 자극하자 금고가 크게 부풀었다.

꿀룩!

괴상한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려 용광로를 뱉어낸다.

"으아!"

"으, 소름!"

용광로. 내부에 용암이 철철 끓는 물건이다. 지구의 어떤 용광로보다 온도가 높았다.

안개 공간 중심에 용암 용광로를 심었다. 그 옆에 시초쇠 모루를 놓는다. 모루 뒤쪽에는 만년빙로가 놓였다. 만년빙로에서 흐르는 물이 졸졸졸 흘러 심해 우물로 들어갔다.

조명은 우주광채. 바닥에는 우주암흑. 그 둘이 빚어내는 반발력을 무형풍이 해소한다. 그 힘이 알게 모르게 모루로 집중되고 있었다.

한쪽 기둥에는 기갑계의 대장장이 세트가 걸려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우주광채와 우주암흑의 반발력을 벼려서 강력한 보구를 만들 테니까.

이 과정 모두가 안개 공간 속에서 진행이 된다. 기이하게도 안개 공간을 보면 변화하는 부분만 확대되듯이 잘 보였다. 김현 주변에서만 아니라, 정육면체 거대한 안개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찰칵! 찰칵!

이세희가 사진을 찍기 바빴다. 피터와 에일리는 진작부터 동영상 녹화 중이었다. 심지어 미국 시민들은 물론 군인들도 그랬다.

손을 오므린다.

안개 공간이 덩달아 축소되었다. 급기야 처음 크기, 25제곱미터로 줄어들면서 그 안에 있던 대장간은 장난감처럼 변화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내리는 김현.

그걸 따라 안개 공간이 천천히 낙하했다. 마지막에는 지표면에 닿더니 훅 꺼져버렸다.

멀쩡히 존재하던 대장간이 사라진 것.

한철군이 눈을 껌뻑였다.

"어? 왜 이래?"

"원래 이렇습니다. 자,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안개 공간이 내려앉은 자리로 걸어가자 비로소 안개가 펼쳐진다. 외부에서는 안 보이고, 정확히 그 지점에서만 보이는 안개. 거기에다 대고 혼력을 주입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각성자마다 혼력 패턴이 다르다. 그것을 안개 공간에 각인시키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대장간이 눈앞에 있었다.

"허허, 이것 참......"

한철군이 실성한 것처럼 웃는다.

그렇겠지.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한철군이 뒷걸음질을 쳤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온다. 비로소 대장간이 보이자 또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피터가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뒤로 걸어갔다가 앞으로 와서 대장간에 진입하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러다 결국 정신 사납다고 에일리한테 얻어듣고 나서 평정을 찾았다.

"이게 내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 정정해 주었다.

"제 겁니다. 빌려드리는 거예요."

"끄응, 이거 받았다가 뺏기는 느낌인데."

"그럼 도로 가져갈까요? 사실 2성 등급 성혼 두 개 드린 것만으로도 미국 오신 값은 한 것 같은데......"

"아냐, 아냐! 절대 아냐! 얼른 계약서 쓰자고!"

한철군이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눈앞에 이국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이계적인 광경이 꿈꾸듯 펼쳐져 있으니까.

"흐아아......"

한철군이 괴상한 소리를 뱉으며 대장간에 들어섰다. 벽도 천장도 없는 대장간을 꿈꾸듯 둘러보더니 기둥에 걸린 망치와 집게 같은 걸 들어본다.

"어어?"

얼굴색이 변하는 한철군. 연장 표면의 전뇌 회로가 기이한 묵색 광채를 뿜고 있었다. 한철군이 허공에 망치를 휘두르더니 급기야 주저앉고 말았다.

"조심하세요. 그냥 들면 안 됩니다. 강철손 쓰면서 드세요."

"이렇게?"

한철군의 손이 쇠로 변했다. 그 상태에서 망치를 들자 전뇌 회로가 한 번 빛나고 만다. 대신 전뇌 회로가 더욱 또렷해졌다.

"어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철군.

그럴 만도 했다.

서리쇠를 다루던 김애경처럼, 한철군은 지금 망치가 자기 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테니까.

김애경이 벅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김현을 쿡쿡 찔렀다.

"야, 우리 각성소도 이런 식으로 꾸미면 안 돼?"

"그럴 필요가 있어? 이용하는 사람 다 일반인인데."

"왜. 비주얼이라는 게 있잖아. 딱 들어와서 아, 여기가 이계구나 싶은 인테리어면 우리도 장사하기 편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원 역사의 화염 궁전이나 철심해도 그런 것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마음을 끌어들였었다. 다른 세계의 거점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생각하는 건 있어. 나중에 보여줄게."

"진짜?"

"응. 일단은 성혼을 더 모아야지. 이것도 미국 와서 열심히 침식 세계 돌고 각성소 운영해서 번 성혼으로 구한 거잖아."

"기대된다."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세희가 주먹을 꾹 쥐며 결의를 다졌다. 김현은 그저 한 번 웃어 보였다.

옅은 안개가 낀 공간......

나중에는 신촌의 사무실과 직접 연결할 작정이었다. 혹시 다른 곳에 또 거점을 마련하면 거기도 마찬가지.

'환수계 풍운의 표가 필요했지.'

원래는 축지와 공간 이동의 묘를 가진 보물이다. 하지만 용왕계 무진의 표와 결합하면 어떤 특이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어쨌든 나중 일.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

"그럼 계약서를 쓸까요?"

"그러세."

이곳 대장간, 더 정확히 말해서 성혼 공방의 권리는 기본적으로 김현에게 있다.

처음에는 지분을 나눠줄까 하다가 김현이 한철군을 고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철군은 지분을 원했으나 고용 조건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1년에 천만 달러씩 드리겠습니다. 어떠세요?"

"그, 그게 정말이야?"

한철군이 침을 삼켰다.

"천만 달러......"

피터의 눈이 몽롱해진다. 에일리도 얼마나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야, 너 그렇게 부자였어?"

"백흔귀한테 받을 게 많거든. 지구의 화폐는 이미 의미가 없어. 한 아저씨, 어떻게 하실래요?"

바보가 아닌 이상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 한철군이 김현과 계약서를 번갈아 보더니 쾅 하고 도장을 찍었다.

"김현 님, 전 뭐 없어요?"

이세희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톡 하고 쳤다.

"선생님한테는 여기 지분을 드릴게요."

"아, 진짜요?"

"그럼요. 기여도 계산해서 나눠드릴 거예요. 아, 돈 필요하시면 그냥 저한테 팔아도 좋아요. 저한테는 더 이익이니까."

"호, 혹시 저희도 지분 받을 수 있나요?"

피터의 질문에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싸! 백만장자다!"

피터가 좋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에일리도 말은 안 했지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봤자 김현이 지분의 대부분을 갖는다.

거의 90% 가까이.

당연한 일. 김현이 없었다면 성혼 공방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테니까.

공방을 둘러보던 일행을 불러모았다.

"조금 이른 것 같지만,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가죠."

지난 1주 동안 성혼을 추출하면서 혼력 능력치가 상당히 상승한 일행.

그들에게 미리 준비한 선물을 나눠주었다.

새로운 성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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